박유경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돌봄의 많은 부분이 혈연 가족 너머 시장에 맡겨진 지도 꽤 오래 되었다. 그러나 코로나19 유행은 오랫동안 개인과 시장의 사적 영역으로 여겨왔던 것들을 공적 문제로 재조명하는 기회가 되었다. 전 지구적 수준의 장기적 위기가 지속되면서 돌봄은 더 이상 각자 알아서 떠맡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고용지표 통계에 의하면 코로나 유행 이후 고용률이 전반적으로 감소했는데 특히 여성의 고용률 감소는 남성의 1.5배였다. 실업자 증가도 남성의 1.2배인 것으로 나타났다(관련자료 바로가기). 감염위험을 줄이기 위해 학교, 아동과 노인 돌봄 시설, 사회복지시설 등의 운영이 축소되면서 돌봄의 책임이 가정으로 넘어갔다. 한편에서는 가족 돌봄의 부담을 떠안다 못해 일을 그만두는 여성이 늘어나고, 다른 한편에서는 돌봄서비스업에 종사하던 여성들이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일을 하면서 돌봄 부담이 증가하면 신체적,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가중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던 일을 그만두고 가족 돌봄자가 되는 것은 어떨까? 이제는 집에서 아이나 아픈 가족을 돌보는 경우를 두고 ‘집에서 쉰다’거나 ‘집에서 논다’고 표현하지는 않지만, 가족 안에서 비공식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의 고단함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헤아리지 않는다. 느리지만 성 평등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있는 와중에도, 우리 사회에는 가족을 돌보는 것이 숭고한 일, 당연한 희생이라는 전통적 인식과 기대가 돌봄을 받는 사람과 제공하는 사람 모두에게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최근 국제학술지 <사회과학과 의학>에 실린 독일 함부르크 대학 연구팀의 논문은 비공식 돌봄을 맡게 된 사람들의 심리적 영향을 분석했다. 특히 젠더 층화분석을 통해 같은 상황에서 남성과 여성이 다른 심리적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제시한 것이 흥미롭다.(논문 바로가기: 남성과 여성에서 비공식 돌봄으로의 이행이 가져온 사회심리적 결과 – 인구집단 기반 패널연구결과)
분석 대상은 독일의 고령화조사(Data from the German Ageing Survey, DEAS)에 참여한 40세 이상의 성인 중 2014년에는 비공식 돌봄을 맡지 않았으나 2017년에 아픈 사람을 위해 비공식 돌봄을 시작했다고 응답한 이들이다. 조사 참여자 전체의 2.5%인 547명이 관찰기간 3년 동안 비공식 돌봄자로 전환되었는데, 이들의 평균 연령은 65.8세, 약 55%가 여성이었다. 비공식 돌봄자가 된 이들 중 38%는 여전히 일을 하는 상태였고, 55%는 은퇴한 상태였다. 패널 고정효과 회귀분석을 이용한 분석 결과, 비공식 돌봄자로 전환된 이들에게서 우울 증상과 부정적 정서가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사회적 연결망이 커지는 연관성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젠더에 따라 결과가 조금 다르게 나타났다.
젠더를 층화한 경우, 남성에서는 비공식 돌봄자로 전환되었을 때 사회적 연결망(정기적으로 연락하는 중요한 사람)이 늘어났고 동시에 우울 증상과 외로움도 유의하게 증가했다. 반면 여성이 비공식 돌봄자로 전환되었을 때에는 사회적 연결망이나 다른 심리적 문제와의 연관성이 나타나지 않고 오직 부정적 정서만 증가했다.
보통 비공식 돌봄제공자가 되면 사회적 관계가 줄어들고 외로움, 고립감이 증가할 것이라는 인식과 달리 남성에서는 오히려 사회적 관계망이 늘어난 것에 대해 연구진은 이렇게 해석했다. 비공식 돌봄을 제공하게 된 사람이 비슷한 상황에 놓인 다른 사람이나 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과의 접촉을 늘리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존 연구들을 참고하면, 남성은 딸이나 여동생, 누나 같은 다른 가족에게 돌봄에 대한 도움을 받기 시작하면서 사회적 연결망이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남성에서 외로움과 우울증상이 높아진 것은, 사회적 연결망이라는 자원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돌봄 스트레스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성은 사회적 관계에서 거리를 두고 문제 해결에 집중된 대응을 하는 경향이 있다는 보고가 이러한 현상을 일부 설명해줄 수 있다.
여성에서 사회적 연결망에 변화가 없는 이유로는 다른 이의 도움을 받기보다 스스로의 일로 감당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게다가 기존의 사회적 연결망을 정서적 지지에 잘 활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돌봄으로 인한 심리적 영향에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이 이미 전통적인 역할 기대에 따라 돌봄자의 역할을 큰 갈등 없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도 추측해볼 수도 있다. 돌봄을 본래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남에게 일을 위임하지 않고 혼자 떠맡다보니 장기적으로는 돌봄 부담이 커지고 스트레스와 우울증상이 높아질 위험도 있다.
사회가 고령화되고 젠더 평등이 진전되는 과정에서 비공식 돌봄은 점점 더 ‘모두’의 역할이 되어 갈 것이다. 그러므로 돌봄 일이라는 것이 어떤 형태로 고단할 수 있고 어떻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이를 위해 어떤 사회구조를 만들어나가야 하는지 더 많은 사회적 대화와 연구가 필요하다. 이 논문의 저자들은 여성들에게는 전통적 역할에 대한 기대를 줄이는 인식 전환, 그리고 공식 돌봄으로 더 많이 위임할 것을 권고했다. 남성에 대해서는 보다 공식적인 지지가 도움이 될 것이고, 기본적 돌봄 업무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훈련 기회가 제공되면 유용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성별 특성을 고려한 이러한 권고는 민간과 시장에 크게 의존하는 한국 돌봄체계의 공공성이 더 강화되어야 적용할 수 있다. 불평등을 강화하고 돌봄 노동자의 인권과 안전을 위협하게 된다면, 여성이 대부분인 공식 돌봄 노동자에게 또 다른 고단함을 전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기사 바로가기)
비공식 돌봄이 나쁜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은 누군가의 돌봄 속에서 성장하고 나이 들며, 어느 시점에서든 한번쯤은 돌봄 제공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그렇기에 내가 돌봄의 역할을 맡게 되었을 때 어떤 변화가 생길 수 있는지 미리 아는 것이 필요하다. 서로를 지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 논의하고 요구도 해야 한다. 미래의 돌봄이 누구에게도 막막하고 외롭고 고단한 일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다.
<서지정보>
Zwar, L., König, H. H., & Hajek, A. (2020). Psychosocial consequences of transitioning into informal caregiving in male and female caregivers: Findings from a population-based panel study. Social Science & Medicine, 113281.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통通’에서 매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