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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정책 결정 과정에 시민 참여가 보장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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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다슬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오늘날 정책결정 과정에서 시민과 지역사회의 ‘참여’는 필수조건이 된 듯하다. 건강 영역에서도 다양한 이해관계자 참여는 보건의료 서비스의 개선과 지역사회 개입을 위한 핵심 원칙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시민 참여는 정책이 시민들의 필요와 요구에 보다 효과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강증진을 위한 시민 참여, 지역사회 역량강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알마아타 선언 이후 40년이 훌쩍 넘었지만, 건강정책 결정 과정에서 시민 참여는 여전히 미흡하다. 전문적 의학 지식이 필요한 경우가 많은 건강 영역에서 시민 참여는 한시적이거나 형식적인 경우가 많다. 만일 정책결정 과정에서 체계적인 조직화 과정을 통해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의 참여가 적극적으로 보장된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최근 국제학술지 <국제 보건서비스 저널>에서 발표된 영국과 스페인 공동연구팀의 논문은 2009~2018년의 10년 동안 엘살바도르 ‘국민건강포럼(National Health Forum)’ 경험을 통해 시민과 지역사회의 참여가 보건의료체계를 어떻게 강화시켰는지 분석했다 (논문 바로가기: 보건체계 강화에서 사회운동의 역할: 엘살바도르 국민건강포럼 경험을 중심으로(2009-2018)).

연구진은 정치인, 전문가, 지역사회 등 의사결정 참여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관련 정책 자료를 검토하여 엘살바도르의 공공보건체계 강화를 가능토록 했던 핵심 전략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그 핵심 전략은 바로 ‘국민건강포럼’을 토대로 한 사회운동, 시민과 지역사회 참여를 보장하도록 제도화한 것이었다.

엘살바도르의 국민건강포럼은 건강정책 결정에 지역사회 참여를 보장하고 역량강화를 통해 국가 보건체계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2009년 엘살바도르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정당인 FMLM (마르티 민족해방전선, 1980년대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게릴라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후보자가 당선됨으로써 20년 동안 장기 집권하던 우파 정권이 막을 내렸다. FMLM 정부 집권 직후 엘살바도르 보건부는 모든 국민의 건강권 보장을 목표로 일차보건의료 중심의 보건체계 개혁을 단행했다. 국민건강포럼은 그러한 개혁 프로그램의 일부로, 세 가지 원칙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첫째, 건강정책 결정에서 시민의 참여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둘째, 부문 간 협력체를 구성하며, 셋째, 시민의 필요에 기반한 (사회적 요인을 포함한) 건강 결정요인을 다룬다는 것이다. 엘살바도르의 4개 광역, 82개 지방정부 아래 750개 지역사회 위원회로 구성된 국민건강포럼은 보건부와 협력하여 건강정책 수립에 주요 역할을 담당한다. 우선 지역사회 위원회는 지역사회의 건강필요를 파악하고 제안하며, 건강권 보장, 국민건강보험, 의료의 질 향상 등 지역사회의 의무 사항에 대해 고민한다. 지방정부 수준의 국민건강포럼에서는 다부문 협력에 관한 논의가 주로 이루어지고, 광역 수준에서 그 논의 결과를 정책에 반영하려고 노력한다. 국가 수준 포럼에서는 보건부가 관련 정책을 제대로 수립하고 시행하며 서비스를 잘 제공하고 있는지 감시한다.

 

국민건강포럼은 어떻게 보건체계 강화에 기여할 수 있었을까? 인터뷰 분석과 문헌 검토 결과를 토대로 연구진은 다음의 다섯 가지 요인을 제시했다. 첫째, 건강정책 결정 과정에서 시민과 지역사회의 참여를 제도화했다. 둘째, 정책결정의 탈중앙화이다. 국민건강포럼은 중앙정부뿐 아니라 광역지자체, 지역사회 등 모든 수준에서 리더십을 강화했고, 그 결과 지역사회는 시민들의 건강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원을 사용할 수 있는 역량을 마련할 수 있었다. 셋째, 내전 등을 거치며 축적된 다양한 경험이다. 국민건강포럼은 내전 당시 구성된 주민보건요원(lay health worker) 조직이 발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내전 중 보건체계가 완전한 붕괴된 상황에서 FMLN 게릴라 부대는 주민보건요원을 조직했다. 동시에 식수 공급, 식량 생산, 교육, 그리고 안보 등 다양한 영역에서 주민 조직화가 이루어졌고, 부문과 지역들 사이에 총회와 회의 등 의사결정 기전이 체계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국민건강포럼은 오랜 기간 축적된 참여 지식과 경험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건강문제 해결을 위한 다부문 접근이다. 지역사회가 설정한 건강 우선순위를 반영하여 보다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공중보건 계획 수립이 가능하도록 주제별 위원회를 구성했다. ‘성과 재생산건강 위원회’가 대표적이다. 주제별 위원회에는 보건의료 외에도 노동시장, 환경, 위생 등 다양한 영역이 함께 고려된다. 다섯째, 사회적 건강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와 지지이다. 다양한 영역의 이해관계자들이 건강권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과정에서 건강은 비단 보건의료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보건체계 개선을 위한 여러 정책을 지지하는 분위기를 형성했다.

 

이러한 내용을 살피다보면 자연스럽게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 방안을 둘러싼 최근의 의사/의대생 파업이 떠오른다. 정부와 의사 집단 사이에서 수차례 논의가 이루어지는 동안, 의료 이용의 주체인 지역사회와 시민들은 말을 보탤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핵심 이슈가 지역별 의료 불균형 문제였음에도 말이다. 결국 해당 정책은 접점을 찾지 못한 채 보류되었다. ‘낙태죄’ 폐지 논의도 마찬가지다. 지난 9월 25일, 입법 시한을 3개월 남긴 시점에서야 국무총리실과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 법무부, 문화체육관광부, 교육부 등 관계부처가 모여 후속조치에 대한 협의를 시작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어떤 논의가 진행되었는지 시민들은 알지 못했고,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10월 7일에 낙태죄 존치를 담은 입법예고안이 깜짝 발표되면서 많은 시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국내에서 보건사업에 시민참여 경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경북 지역의 건강새마을 조성사업, 서울시 건강생태계 조성사업 등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시민 참여의 경험이 어느 정도 쌓여 있다. 이러한 경험을 적극 활용하고 발전시킨다면, 엘살바도르의 사례와 같이 지역사회부터 전국 단위에 이르기까지 좀더 체계적인 시민 참여 조직화를 통해 ‘시민’에게 필요한 건강정책을 ‘함께’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 서지정보

León M, Jiménez M, Vidal N, Bermúdez K, De Vos P. The Role of Social Movements in Strengthening Health Systems: The Experience of the National Health Forum in El Salvador (2009–2018). International Journal of Health Services. 2020;50(2):218-233. doi:10.1177/0020731420905262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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