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한국민중건강운동(PHM Korea) 펠로우
마침내 오는 26일, 많은 기대와 우려 가운데 국내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된다. 접종이 시작되기까지 백신 정책에 대한 평가는 대개 ‘재빠른’ 구매나 ‘많은’ 양의 확보와 같은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선 안 될 문제는 바로 전 지구적 차원에서 백신 접근성을 보장하는 일이다. 이는 비단 글로벌 정의라는 윤리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감염병 위기를 장기화 시킬 수 있다는 실질적 차원에서도 매우 시급한 과제이다.
우리는 지난 칼럼에서 고소득 국가가 개별 기업과 구매 계약을 맺는 ‘백신 국가주의’로 인해 국제 사회가 평등한 백신 보급을 위해 고안했던 코백스 퍼실리티(COVAX Facility)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한 바 있다.(☞ 관련 기사 : 팬데믹 시대, ‘백신 국가주의’를 비판한다)
이처럼 백신 분배를 둘러싼 예견된 재앙에 대항하고자, 지난해 10월 세계무역기구(이하 WTO) 무역 관련 지적재산권에 관한 협정(이하 TRIPS) 이사회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하 남아공)은 인도와 함께 코로나19의 예방, 억제, 치료와 관련한 보건의료기술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전 지구적 집단 면역이 형성될 때까지 유예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TRIPS 특정 조항 유예안(이하 유예안)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지난 2월 3일 국내 시민사회단체가 발표한 공동성명 참고 ☞ ‘[공동성명] 한국 정부는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를 전 세계 시민이 차별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TRIPS 유예안’을 지지해야 한다‘) 지적재산권은 그 자체로 중요한 건강 결정요인이므로, 팬데믹 상황에서 지식의 독점이 아닌 공유와 협력을 통해 보건의료기술에 대한 접근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련 기사 : <서리풀 연구通> 2020년 12월 3일 자 ‘코로나 백신 ‘특허’는 건강과 혁신을 저해한다‘) 10월과 12월의 연이은 TRIPS 이사회에서 유예안은 고소득 국가의 반대로 인해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후 100여개 국가, 세계보건기구(WHO), 유엔에이즈계획(UNAIDS), 국제의약품구매기구(UNITAID)를 비롯한 국제기구, 전 세계 300여개 시민사회단체의 지지를 얻으며 점차 정치적 기반을 키워나가게 되었다.
해를 넘긴 유예안은 이제 내달 초 WTO 일반 이사회 논의를 앞두고 있으나 결과를 낙관하기는 어렵다. 또한 혹여 유예안이 채택되더라도 전 세계 코로나19 백신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서는 백신 생산 역량을 증대해야 하는 등 실질적인 당면 과제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이사회 결과와 별개로, 어떻게 기존의 공고한 지적재산권 체제에 대항하는 유예안이 두 국가로부터 제안되고, 국제 사회의 핵심 의제가 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이 글은 두 국가 가운데 남아공이 유예안을 제안하게 된 배경을 코로나 19 팬데믹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고, 사례가 남기는 함의를 고민해 본다.
에이즈 치료제를 위한 시민사회의 투쟁
1982년 남아공에는 첫 에이즈 사례가 보고되었다. 이후 1990년대 에이즈는 급속도로 확산되며 단순 질병을 넘어서 사회의 복합적인 위협이 되었고, 1994년 수립된 최초의 민주 정부인 넬슨 만델라 행정부에게 이는 중요한 정치적 과제가 되었다. 한편 국제 사회에서는 1996년 WTO가 설립되고, 지적재산권 보호를 강화하는 TRIPS 협정이 체결되었다. 민주주의 전환 이후 경제 재건을 위해 자유무역 체제를 적극 수용하라는 외부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남아공 또한 WTO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는 곧 TRIPS 협정에 의거해 모든 의약 관련 제품과 과정에 대한 특허를 인정할 의무를 지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90년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이즈 감염률을 보인 남아공은 국내로의 지불 가능한 치료제 보급과 국제사회의 지적재산권 체제 간의 긴장 가운데 놓이게 된 것이다.
결정적 사건은 1997년 발생했다. 남아공 정부는 에이즈 치료제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특허의약품 강제실시와 병행수입에 관한 법안(Medicines and Related Substances Control Amendment Act)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 법안은 국내 공중보건 비상 상황에서 보건부 장관이 강제실시와 병행수입을 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이었다. 이듬해 이러한 조치에 반해 39개의 초국적 제약회사와 남아공 제약 협회는 남아공 정부를 상대로 이 개정안이 WTO의 TRIPS 협정을 위배했다는 주장의 일명 ‘프리토리아 소송’을 제기하였다.(☞ 관련 기사 : <경향신문> 2001년 4워 20일 자 ‘에이즈 약싸움 ‘골리앗 꺾었다’‘) 당시 남아공은 높은 치료제 가격으로 인해 40만 명의 에이즈 환자 중 1만 명만이 치료를 받고 있었고, 2010년까지 300만 명이 죽음에 내몰리게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관련 기사 : <시사IN> 291호(2013년 4월 19일 자) ‘의약품 특허 때문에 사람이 죽어간다‘)
‘생명보다 이윤’을 우선시 한 제약회사의 소송은 결국 국경을 넘어 전 지구적인 분노와 대대적인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남아공의 에이즈 치료제 접근권에 대한 시민사회단체인 치료행동캠페인(Treatment Action Campaign, 이하 TAC) 또한 당시에 조직되었다. TAC는 에이즈 환자이자 반-아파르트헤이트 활동가였던 Nkoli가 치료제 비용을 지불하지 못해 사망한 것을 계기로 그의 지인이자 HIV 감염인이었던 Zackie Achmat가 조직한 단체였다. 소수 인원이 거리에서 에이즈 치료제에 대한 팜플렛을 나눠주는 것으로 시작된 이 조직은 점차 네트워크를 확장해 현재 가장 중요한 에이즈 운동 단체이자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가장 성공적인 남아공 시민사회운동 사례로 남아있다(☞ 바로 가기 : Treatment Action Campaign). TAC를 비롯한 전 세계 시민사회의 대규모 저항으로 2001년 마침내 이 소송은 취하되었고, 같은 해 아프리카 국가, 인도, 브라질의 주도로 ‘TRIPS와 공중보건에 관한 도하 선언(이하 도하 선언)’이 채택됨에 따라 각국에서 건강 필요에 의해 강제 실시를 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관련 기사 : <spotlight> 2020년 4월 15일 자 ‘COVID-19: Patent victories from HIV fight are now more relevant than ever‘) 그리고 남아공에서는 치료제에 대한 지적재산권이 완화되고 제네릭 생산이 촉진됨에 따라 연간 인당 약 1만여 달러에 이르던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제(antiretroviral medicines, ARVs)의 가격이 하루 0.21달러 이하까지 극적으로 하락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관련 기사 : <HEALTH GAP> 2020년 5월 21일 자 ‘More Than 80 Academics, Researchers, and Teachers Call on President Ramaphosa to Fix the Patent Laws’)
의약품 접근성 운동에서 TRIPS 유예 제안에 이르기까지
도하 선언 후에도 지적재산권 체제에 저항하고 의약품 접근성 보장을 주장하는 남아공 시민사회의 노력은 지속되었다. 2010년에는 도하선언 10주년을 기념하며 TAC와 국경없는 의사회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특허법을 개정하라(Fix the Patent Laws)’라는 대규모 캠페인을 조직하였다.(☞ 바로 가기 : Fix the Patent Laws) 엄밀한 심사 없이 무분별한 특허등록이 가능해 값싼 제네릭을 사용하기가 어렵고, 강제실시와 같은 TRIPS 협정의 ‘유연성’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지 못한 남아공 특허법에 대한 개정을 촉구하는 캠페인이었다(☞ 바로 가기 : 정보공유연대 <IPLeft>의 ‘남아공 특허법 개정 무력화 시키기 위한 초국적제약회사들의 계획‘). 마침내 지난 2018년, 초국적 제약회사의 훼방에 저항한 수년간의 투쟁 끝에 이 캠페인은 남아공 국내에 의약품에 대한 강제실시 절차를 간소화하는 정책을 도입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이들은 과거 에이즈 투쟁과 현 상황 간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코로나19에서도 지적재산권 체제가 치료제와 백신에 대한 장벽이 될 것임을 수차례 경고하고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가령 지난해 5월, 80여 명의 남아공 학자들은 남아공 대통령에게 특허법을 개정하고, 코로나19 관련 기술 접근성을 보장하라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또한 10월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TRIPS 유예안이 그간 국제 무대에서 지적재산권과 관련하여 진보적 리더 역할을 해 온 남아공이 글로벌 리더십을 증명하고 글로벌 남북 관계를 재정의 할 기회임을 강조하였다.(☞ 관련 기사 : <InfoJustice> 2020년 10월 12일 자 ‘LETTER TO PRESIDENT RAMAPHOSA ON THE PROPOSED COVID-19 WAIVER, BY 43 SOUTH AFRICA AND INDIA AT THE WTO, FROM SOUTH AFRICA-AFFILIATED ACADEMICS, RESEARCHERS AND TEACHERS‘)
시민사회의 지속적인 노력은 남아공 정부의 응답으로 이어졌다. 남아공 정부는 전 지구적 지적재산권 체제가 코로나19 관련 기술에 대한 접근성을 저해하고, 이는 특히 중저소득국가에 불평등한 영향을 미침을 수차례 비판했다. 지난해 6월 TRIPS 비공개 이사회에서 남아공은 코로나19 상황에서 TRIPS 유연성 조항의 중요성과 실질적 어려움에 대해 호소하였다.(☞ 관련 기사 : <KNOWLEDGE ECOLOGY INTERNATIONAL> 2020년 5월 21일 자 ‘WTO TRIPS Council (informal): South Africa’s interventions on COVID-19, TRIPS flexibilities, and domestic manufacturing capacity‘) 8월 회의에서는 지적재산권이 기술 접근성을 저해할 수 있음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관련 기사 : <BUSINESS MAVERICK> 2020년 8월 13일 자 ‘SA’s WTO ambassador calls for access agreement to apply to Covid-19 medicines‘)
“남반구와 북반구의 지도자들은 백신이 ‘글로벌 공공재’로써 공평하게 배분되고 누구도 남겨지지 않아야 한다고 말해 왔다. 지금이 바로 행동으로 보여줄 때이다.”
그리고 두 달 후 남아공은 TRIPS 유예안을 제안하였다.
요컨대 남아공 정부의 TRIPS 유예안은 과거 에이즈 치료제에 대한 지적재산권 장벽으로 인해 경험해야 했던 수많은 피할 수 있던 죽음들, 지적재산권 체제에 대항해 온 시민사회의 역사적 경험과 축적된 역량, 이를 국제 사회 의제로 끌어올린 남아공 정부의 역할이 한데 모여 만들어 낸 결과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발표 직후 세계 시민사회의 강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역사가 우리에게 남기는 메시지
남아공의 TRIPS 유예안 제안 배경은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 지점에서 메시지를 남긴다. 우선 남아공에서 에이즈 치료제에 대한 접근권 운동 당시 형성된 시민사회 네트워크는 코로나19라는 새로운 위기 상황에서 예고되는 문제들을 빠르게 의제화하고 정부를 압박해 국제사회 의제로 끌어올렸다. 따라서 하나의 시민사회운동은 단절된 역사로서 성패가 평가될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역량을 축적하고 네트워크를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시민사회와 정부 간의 관계이다. 시민사회의 요구에 남아공 정부는 TRIPS 유예안 제안으로 응했다. 남아공 대통령 또한 최근 코로나19 백신 민족주의의 현실을 지적하며 TRIPS 유예안에 대한 국제 사회의 지지를 촉구하였다.(☞ 관련 기사 : <the africa report> 1월 28일 자 ‘Africa: AU chair Ramaphosa calls out ‘painful irony’ of vaccine access‘) 이러한 정부의 반응은 TRIPS 유예안 지지에 대한 국내 시민사회의 수차례 성명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는 한국 정부와 대조적이다.
물론 이 글이 남아공 시민사회와 정부가 이상적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기실 남아공 정부가 국제 사회에서 지적재산권과 관련하여 진보적 의제를 이끌고 있지만, 정작 앞서 언급한 정책의 국내 도입을 위한 특허법 개정 요구에 대해서는 묵인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경험에서 비롯된 이들의 주장에 우리는 여전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TRIPS 유예안을 반대하는 고소득국가들은 근거 없음을 주장하지만, 지적재산권 체제 하의 접근성 저해가 팬데믹 영향을 장기화하고, 막대한 희생을 발생시킬 것임을 뼈아픈 역사가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3월의 WTO 회의 결과에 모두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 참고문헌
1) 황예은. (2014). 제 7 장: 자유주제; 글로벌 보건 안보위협과 개도국의 대응-남아공의 에이즈 치료정책과 의약품 접근권 논쟁. 세계정치, 21, 247-287.
2) David Legge and Sun Kim, “EQUITABLE ACCESS TO COVID-19 VACCINES: COOPERATION AROUND RESEARCH AND PRODUCTION CAPACITY IS CRITICAL“, NAPSNet Special Reports, October 29, 2020,
3) Grebe, E. (2011). The Treatment Action Campaign’s struggle for AIDS treatment in South Africa: coalition-building through networks. Journal of Southern African Studies, 37(4), 849-868.
4) PHM South Africa. (2020). Barriers and Enablers to Equitable Access to COVID-19 Health Technologies in South Africa
5) Ellen ‘t Hoen. (2016). PRIVATE PATENTS AND PUBLIC HEALTH: CHANGING INTELLECTUAL PROPERTY RULES FOR ACCESS TO MEDICINES.
코로나19의 전 세계적 대유행을 맞아 많은 언론이 해외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 백신을 얼마나 확보했는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국가별 ‘순위표’로 이어집니다. 반면 코로나19 이면에 있는 각국의 역사와 제도적 맥락, 유행 대응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경제·사회적 역동을 짚는 보도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코로나와 글로벌 헬스 와치’를 통해 격주 수요일, 각국이 처한 건강보장의 위기와 그에 대응하는 움직임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모두의 건강 보장(Health for All)’을 위한 대안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