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차별과 혐오에 반대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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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혐오가 또 한 사람의 귀한 목숨을 앗아갔다. ‘인과관계’는 명확하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강제 전역이 인권침해라는 결정을 내리자 “트랜스젠더에게 웬 인권이냐?”라며 인권위를 해체하라는 주장까지 쏟아졌으니… 인권, 생존권, 건강권이라는 말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을 정도로 답답하다. 그이의 명복을 빈다.

 

앞으로는 그렇지 않아야 마땅하나 낙관하지 못한다. 생명까지 위협하는 차별과 혐오가 지금도 생산되고 전파되지 않는가. 대상은 성소수자에 머물지 않는다. 조금만 틈을 보이면 공기처럼 주위를 파고들어 갖가지 혐오가 본래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당장, 코로나19 유행이 차별과 혐오를 키우는 ‘온상’ 노릇을 한다는 어쩌면 익숙한 사실을 회피하기 어렵다. 그냥 그렇고 그런 조건이 아니라 언제 폭발할지 모를 정도로 아슬아슬하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대상을 향해도 놀랍지 않을 상황이다.

 

 

현재형인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위협’은 처음 경험이 아니다.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코로나19에 확진되는 일이 계속되는 중에, 아니나 다를까 앞뒤 재지 않는 혐오 댓글이 가득하다.

 

이번에도 과학과 합리성 차원에서는 그럴 만한 사정이 알려졌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 차별과 혐오의 한 가지 속성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건강이니 생명이니 하는 가치는 설 자리가 없고, ‘노동력 부족’이나 ‘방역 사각지대’ 같은 말로 차별과 혐오에 대응해야 하니 답답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하늘길이 끊기면서 불법체류자로 전락하는 외국인이 늘고 있는데, 이들이 합법적으로 체류할 방안을 고민해야…(중략)…이들을 양지로 끌어내지 못하면 코로나19가 어디서 전파되고 감염될지 모르는 상황…” (관련 기사 바로가기)

 

코로나 방역에 대한 피로감이 극에 달하고 삶의 조건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지는 것이 특히 위험하다. 자칫 코로나 ‘종식’과 생활의 ‘원상회복’을 늦추는(정확하게는 그런 것 같은) 모든 개인과 집단이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그대로, 누구에 대한 것이든 이유와 경과는 외국인 노동자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홈리스, 장애인, 가난한 사람들, 시설 수용자나 거주자 등.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의 노인도 안심할 수 없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구조적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금 어떤 길을 가느냐에 따라 생명을 구할 수도 해칠 수도 있는 것이 차별과 혐오의 ‘진화’ 과정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극단적인 사건, 사고가 난 후에야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하면 늦어진다는 사실도 함께다.

 

혐오와 차별의 과정이란 사회적으로 ‘훈련’되고 또한 ‘양성’되는 것이라는 사실에 특히 주목한다. 몇 년 전 여러 언론이 관심을 보였고 꽤 많은 사람이 읽었던 책에서 따왔다.

 

“…혐오와 증오는 개인적인 것도 우발적인 것도 아니다. 단순히 실수로 또는 궁지에 몰려서 자기도 모르게 분출하는 막연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따라 집단적으로 형성된 감정이다… 혐오와 증오는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고 훈련되고 양성된다.” (혐오사회. 카롤린 엠케 지음, 정지인 옮김, 다산초당 펴냄. 22~23쪽)

 

그렇다면 이 과정은 행위 주체들의 실천과 저항으로 구성되고, 당연히 ‘그들’과 ‘우리’의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그 가운데 먼저, 책임이라면 적어도 한국 상황에서는 정부, 현실 정치, 그리고 미디어에 일차 책임을 물어야 할 것 같다.

 

서울시장이 되겠다는 어떤 유력 정치인은 사실까지 왜곡하면서 ‘정해진 양식’에 따라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일부 종교 집단의 극단적인 혐오 정치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코로나19가 유행하는 상황에서 상당수 언론이 보인 태도도 근본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을 보도하는 데 무엇이 문제냐고 되물을지 모르지만, 미디어는 한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양성하고 훈련하는 유력한 도구이다. 무엇을 보도할 것인지 고르는(‘데스킹’) 방식으로 때로는 헤드라인을 통해 혐오의 이데올로기가 공고해지고 또 널리 퍼진다.

 

실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외국인 확진자를 보도하는 언론 보도의 제목에는 ‘방역 사각’ ‘외국인 집단 감염 속출’ ‘무더기 확진’ ‘지역 확산 우려’ 같은 말들이 곳곳에 따라붙는다. 사실 해당하는 기사 내용은 국적과 인종과 무관한 것이 대다수지만, ‘외국인’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만으로 일정한 효과를 낸다.

 

제목을 “수도권 확산, 외국인 노동자 집단감염 우려”나 “외국인 선제검사로 88명 확진…변이 여부도 검사”로 뽑으면 독자는 무엇을 먼저 떠올릴까(관련 기사 1, 2). 기계적으로는 틀린 사실이 없지만 이런 제목 만들기는 교묘한 연상 효과를 발휘한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혐오를 강화하는 데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침소봉대로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혐오와 차별이 개인적,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한 사회 전체가 개입하는 제도적이고 구조적(문화도 포함된다)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실 정치든 언론이든, 개인 차원에서는 전혀 의식하지도 못한 채 혐오와 증오를 훈련하고 양성하는 데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대로 더 나빠지면 안 된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다시 카롤린 엠케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진실의 연대’라 할 것이다.

 

“부족한 상상력은 정의와 해방의 막강한 적대자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상상력의 여지를 다시 넓혀주는 진실 말하기다.” (244쪽)

 

“막강한 부당함에 맞서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과 굳은 동맹을 맺는 것을 의미한다.” (246쪽)

 

“‘우리’는 사람들이 함께 행동할 때 생겨나고, 사람들이 분열할 때 사라진다. 증오에 저항하는 것, ‘우리’ 안에 한데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행동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용기 있고 건설적이며 온화한 형태의 권력일 것이다.”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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