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수많은 사람의 고통과 죽음이 이어진다. 모든 생명이 다 소중하지만, 전쟁의 피해는 끝도 없이 불평등하다. 우크라이나와 함께 시리아, 미얀마, 수단 사람들의 불평등한 죽음과 고통도 기억하려 한다.
많은 사람이 전쟁에 대해 말한다. 안타까움과 비참한 감정, 국제 정치 전망과 전략, 여러 경제주체의 손해와 이익 분석 등. 현실 정치가 ‘제 논에 물 대기’에 골몰하는 것이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가볍다. 사람은 사라지고 아픔은 너무 멀리 있는 모양이다.
여당 후보는 초보 정치인이 러시아를 자극해 전쟁이 났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사과했다. 냉혹한 국제 관계를 지적하고자 했겠지만, 침략적 전쟁의 폭력, 비윤리, 반생명을 먼저 말해야 했다. 사람들의 죽음과 고통을 막는 것이 우선이다.
제1야당 후보는 힘을 통해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는 ‘교훈’을 말하더니, 급기야 성인지 예산 일부만 떼어내도 안보 위협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예산도 아니고 스스로 ‘여성에게 도움이 된다’라고 했던 예산을 줄여 (가장 남성적인!) 국방에 예산을 더 투입하자니?
우리는 ‘성인지 예산’과 국방을 연결한 이 사고체계가 우연이거나 개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정 집단만 그렇다는 차원도 넘는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정파와 정당을 가릴 수 없이 하나의 구조 속에 있는, 말하자면 ‘체제’라 할 것이다.
굳이 국제관계 이론을 들먹일 것도 없이 전쟁은 지극히 남성 중심적이다. 아니 거의 독점이다. 전쟁의 주체가 누구인가. 단지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이들만 일컫는 게 아니다. 군비 증강을 주장하고 전쟁을 결정하는 정치인과 국제 관계는 냉혹한 현실이라며 힘과 힘의 대결로 프레이밍 하는 국제 정치학자들은 예외 없이 남성 엘리트다. 군수산업의 자본가는 어떤가?
남성 엘리트의 권리를 보존하는 가부장적 구조를 고려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가부장제는 남녀의 일과 덕목을 나누고, 남성의 특성에 더 많은 가치와 의미, 보상을 부여하며 여성적 특성은 평가 절하한다. 예컨대, 공적 영역, 이성과 합리, 경쟁, 생산성, 용맹함 같은 것은 사회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한다.
남성적인 것으로 분류되는 일과 덕목들은 흔히 전쟁과 폭력으로 연결된다. 노벨 평화상 후보로도 지목되었던 페미니스트 평화학 연구자 베티 리어든은 지적한다(<성차별주의는 전쟁을 불러온다>, 정희진 기획·감수·해제, 황미요조 옮김, 나무연필 펴냄).
“군사주의는 남성의 사회적 기능을 구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힘, 용맹성, 책임감 등을 함축해 마치스모(거칠게 과시하는 남성다움)라고 칭하곤 했던 특성이 과잉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전통적으로 남성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특성들, 감정과 정서, 돌봄, 상호의존성 등은 끼어들 틈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평화의 기초가 되는 것일 텐데….군비 경쟁이 더할수록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고 혐오의 굴레를 벗어나기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 누구도 전쟁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묻는다. 전쟁을 통해 평화를 얻을 수 있는가? 핵무기를 가지고 상대를 압박하면 ‘적’은 그냥 조용하게 있을까? 어떻게 평화를 얻고 누릴 것인가.
남성 엘리트끼리 합의하는 국제 관계는 평화를 증명한 적이 없다. 어떤 정책이나 특정 정권이 저절로 평화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진작 ‘확립된 지식’이 아닌가? 남은 길은 ‘글로벌 평화 체제’가 유일하다.
어떻게? 폭력과 지배, 억압과 불평등 체제에서 벗어나, 잘 드러나지 못했던 일의 가치, 덕목을 회복해야 한다. 생물학적 여성을 넘어, 평화 체제의 기초가 되는 ‘여성주의적’ 가치들. 단기간에 이뤄지기 힘들어도 지치지 않고 인식과 공감대, 필요성, 절박함을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
한국에서도, 선거의 와중에도, 곳곳에서 여러 사람이 말하고 실천한다. 마침 3월 8일이 세계 여성의 날이다. 지난 3월 1일 생산성 중심, 이성애·비장애·남성 중심 체제의 전환을 요구하는 행진이 있었다(선언문 바로가기). 며칠 전 3월 5일에는 여성 비정규직 발언대가 있었고, 3월 8일에는 가사노동 사회화 기자회견(바로가기)과 노동자대회(바로가기)가 이어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