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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를 억압하는 구조적 부정의에 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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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20주년을 맞이했다. 그동안 장애인 자신들이 투쟁한 결과로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와 저상버스 도입 등의 변화가 일어났고, 그 혜택은 교통약자를 포함한 모두가 누린다. 우리 사회 전체가 이 투쟁에 빚지고 있다.

먼저, 여전히 미흡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장애인 이동권의 실질적 보장을 위해 함께 연대할 것을 다짐한다. 이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가 지난 몇 달 동안 출근길 지하철 타기 시위를 이어가며 이동권의 실질적 보장을 요구하는 실천과 직접 연결된다.

장애인이 “눈에 보이도록” 시위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지난해 12월 31일 개정된 「교통약자의이동편의증진법」은 저상버스 의무도입 대상에서 시외·고속버스가 제외되고 중앙정부의 광역이동지원센터 운영비 지원이 무산되는 등 도무지 나아질 전망이 없기 때문이다(☞기사 바로가기).

이것도 시위의 효과라 해야 할까, 이제는 출근길 시민을 ‘볼모’로 하는 불법시위라며 적대감을 조장하는 혐오정치가 꿈틀거린다. 그 민낯은 지난 17일 언론에 공개돼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서울교통공사(이하 ‘공사’)의 내부 문건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기사 바로가기).

공사는 한 직원의 개인적 일탈이라고 부인했지만, 우리는 이를 공사를 포함한 ‘구조적’ 문제로 이해한다. 장애인을 억압하는 구조는 비단 지하철 운행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정치와 경제 구조 전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바로 그 불평등과 차별의 구조이다.

공사는 서울시 산하 지방공기업으로 기업성과 공익성을 함께 요구받지만, 현실에서는 사회적 가치보다 수익성을 강조하는 기업가주의가 지배한다(다른 공기업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은 당연히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된다.

조직의 이해관계를 내면화한 문건 작성자는 ‘도구적 합리성’에 매몰된 상태로 여론전(!)의 승리를 위해 이동권 보장에 “충분한 공감”을 표시하는 방법까지 제시한다. 장애인들에게 이동권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왜 이러한 방식으로 투쟁할 수밖에 없는지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이제는 상식이 되지 않았을까? 우리 대부분 아니 전부는 ‘일시적 비장애인’이다. 우리는 삶의 어느 시점에 이르러 ‘장애가 있는 사람’이 되기 마련이다. 장애는 앞으로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나’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우리도 또한 ‘당사자’이다. 이동권은 지금 나에게도 미래의 나에게도 중요하다.

 

우리는 개인의 자기 이해와 공감을 넘어 장애를 배제하고 차별하는 (잘 보이지 않는) 구조에도 주목하고자 한다. ‘비장애중심주의(ableism)’에 따른 지배적인 삶의 구조는 언제 어디서나 장애인을 배제하고 억압한다. 비장애인들이 누리는 (잘 느끼지 못하는) 이동의 자유는 장애인들을 부자유한 상태에 남겨놓는 구조적 부정의와 무관하지 않다. 지하철 역사 내 엘리베이터 설치와 저상버스 도입 등은 단지 기술과 예산의 문제일 뿐 아니라 공간의 배치 문제이기도 하다.

조금만 생각해도 금방 드러나지 않는가. 지하철의 출입구조차 오른손을 쓰는 사람에게 유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불평등한 권력관계는 비장애인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공간이 생산, 배치되도록 만들면서, 장애인을 주변화시킨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 장애인이 접근할 ‘자유’가 존재하는가.

공사가 준비한 문건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자신들이 여론전에서 불리한 까닭을 약자는 항상 선하다고 믿는 ‘언더도그마’의 문제에서 찾는 ‘반동’적 인식에 있다. 이는 이동권 투쟁의 본질을 완전히 왜곡한 것이다. 그 누구도 약자는 선하기 때문에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본질은 오히려 비장애인의 시혜와 동정에 기대는 ‘착한’ 장애인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들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구조에 저항하는 진보적 장애 운동이라는 데 있다.

불법시위는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는 실정법 만능주의도 문제다. 기존 법률과 제도가 장애인을 부당하게 배제하는 한, 장애를 둘러싼 투쟁은 체제에 대한 도전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장애인 운동의 역사도 그렇지 않은가. 법이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 머물러 요구하는 것만으로 그 완고한 질서를 바꾼 예가 얼마나 되는가.

장애인들이 출근길에 불편을 초래하고 그 때문에 큰 비난을 받을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시위를 이어가는 이유는 그 오랜 구조에 틈을 내기 위한 것일 터. 물론 보통의 시민들이 겪는 고통도 가볍지 않지만, 시위를 비난하고 장애를 혐오하는 것은 제 방향이 아니다. ‘을’과 ‘더 불리한을’이 싸우라고 그들이 설계한 마당을 벗어날 것. 오히려 이동권과 이동의 자유를 중심으로 단결하고 연대해야 한다.

이동권의 연대가 필요한 또 한 가지 이유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이동이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도시에서 이동의 제약은 실업과 빈곤, 즉 경제적 생존의 문제로 직결되므로 누구에게나(!) 이동권 보장이 절실하다. 지금 구조에서는 당연히 장애인 쪽이 훨씬 더하다.

물론, 어쩔 수 없는 경제적 제약을 그대로 수용하자는 뜻이 아니다. 장애인에 불리한 차별적인 노동시장의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이동권이 제대로 보장되어도 장애인에 대한 억압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동권을 토대로 하되 그를 넘어, 당연히 더 근본적인 비전으로 나아가야 한다.

문제는 현실이 차마 비전을 말할 여유가 없을 만큼 나쁘다는 점이다. 일부 유력 정치인이 정말 그 길로 나설지 모르지만, 장애를 새로운 혐오 정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가장 나쁜 미래다. 억압과 배제를 벗어나려는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과 연대하는 것이야말로 그 혐오 정치에 맞서는 시대적 과제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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