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리라(시민건강연구소 회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사상의 위험에 노출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군인들뿐 아니라, 피격의 위험을 피해 전장으로 변한 삶의 터전을 뒤로하고 피난길에 올라야 하는 우크라이나의 일반 시민들까지 모두가 참혹한 전쟁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전쟁은 이와 같은 직접적 피해를 포함하여 전쟁기간 동안 전우 및 시민들의 사망과 부상을 목격하거나,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함으로써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도덕적 상처(moral injury)*를 남긴다. 전쟁으로 인한 희생과 피해는 승자와 패자를 가릴 것 없다.
최근 코브닉 연구팀은 전쟁이 건강에 미치는 장기적인 영향력을 보여주는 논문을 국제학술지 <건강과 사회적 행위>에 실었다(논문 바로가기 ☞ 중북부 베트남에 거주하는 노인들의 정신건강에 생애초기 전쟁 노출이 갖는 효과). 베트남전쟁과 건강에 관련된 상당수 선행연구들이 주로 참전했던 미국 군인들의 경험들에 주목했던 반면, 이 연구는 베트남인들의 전쟁 경험에 대해 다루었다. 현재 베트남의 중·북부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 1965년부터 1975년까지 벌어졌던 베트남전쟁을 경험했던 2,30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2018 Vietnam Health and Aging Study, 이하 VHAS)가 진행되었다. 응답자는 당시 군인이었거나 일반 시민이었던 사람 모두를 포함하였고, 이들이 청년기에 겪었던 전쟁 스트레스와 현재인 노년기 정신건강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연구에서 정신건강을 측정하는 척도는 두 가지가 사용되었는데, 첫 번째는 정서적 고통을 측정하기 위하여 베트남 문화에 맞게 수정한 우울과 불안의 주관적 상태에 대한 자가보고식 설문도구였다. 지난 한 달 동안 스트레스의 정서적, 신체적 경험을 묻는 총 9개 문항이 포함되며 점수가 높을수록 정신건강이 열악함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지난 한 달 간 자살생각 유무에 대한 질문이었다. 또한 전쟁 스트레스는 1) 전쟁으로 인한 가족 혹은 친구의 죽음, 2) 전쟁에서 사망자 목격, 3) 전쟁기간 동안 마주한 열악한 삶의 조건들, 4) 전쟁으로 인한 목숨의 위협 혹은 위험에 처한 경험, 5) 도덕적 상처 경험 유무로 평가했다. 연구자들은 전쟁 스트레스가 노년기 정신건강에 직접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최근 경험하는 스트레스 유발적 생애사건과 동반상병도 증가시킴으로써 정신건강을 악화시키는 간접 효과가 존재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분석결과 응답자 중 상당수가 전쟁 스트레스를 겪고 있었다. 이들 중 약 30%는 전쟁 기간 동안 가족을 잃었으며, 51.3%가 전쟁으로 인한 죽음의 상황과 맞닥뜨리거나 전사자들을 직접 목격해야 했다. 응답자의 29.4%는 폭격으로 인해 살던 거주지를 이전해야 했으며, 25.9%는 식량부족을 겪었고, 35.1%는 전쟁으로 인한 부상 혹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이들의 스트레스 경험은 전쟁 당시에만 그치지 않았는데, 지난 2-3년 간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생애사건을 경험한 비율이 절반을 넘었고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과 배우자의 질병이 공통으로 언급되었다. 평균적으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정서적 고통을 더 많이 보고했으며, 자살생각도 더 많았다. 그러나 성별에 관계없이 전쟁 시기 더 많은 스트레스 경험에 노출될수록 정서적 고통 점수가 높게 나타나 전쟁경험과 노년기 정신건강 간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었다.
한편, 전쟁 스트레스 중 죽거나 다친 시민을 목격한 것과 심각한 식량부족 경험 및 부상 혹은 죽음에 대한 공포는 특히 노년기 정서적 고통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자살생각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가족을 잃거나 시민들의 죽음 혹은 심각한 부상 목격, 폭격으로 인한 이주 및 식량부족 경험이 유의하게 연관되었다. 이 중 전쟁 시기 식량부족과 부상 혹은 죽음에 대한 공포는 정서적 고통 수준을 높였으나 자살생각과는 연관되지 않은 한편, 폭격으로 인한 강제적 이주는 자살 생각과 연관되었지만 정서적 고통을 높이지는 않았다. 이러한 결과는 전자의 경우 식량부족과 전쟁으로 인한 일반적인 공포는 지속적인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하여 우울이나 불안 등 만성적인 정신적 질환을 야기하는 반면, 전쟁 중 폭격으로 인한 이주경험은 단기간에 벌어진 충격적인 스트레스 요인으로써 트라우마를 유발하고 자살생각의 가능성을 높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연구는 베트남전 종전 후 4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군인들과 시민 모두에게 전쟁에서 마주한 끔찍한 경험들이 일생동안 지속되면서 정신건강을 악화시키는 누적과 확산 요인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권의 관점에서 볼 때 이념, 경제적 이권, 영토 분쟁 등 그 어떠한 갈등 상황 속에서도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잔인하고 위태로운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 이 전쟁을 시작함으로써 권력과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세력에게 책임을 묻는 한편, 전쟁의 피해를 고스란히 겪고 그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지지가 필요한 시점이다.
*도덕적 상처는 정신병리학과는 구분되는 트라우마의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며 평범한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사건(ex) 전쟁)에 대한 반응을 의미한다. 미국 보훈청(US 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에서는 이 개념을 도덕적 신념과 기대를 넘어서는 전투 행위를 목격했거나 가해를 행한 재향군인의 정신건강 문제를 다룰 때 사용된다(https://en.wikipedia.org/wiki/Moral_injury).
*서지사항
-Kovnick, M. O., Young, Y., Tran, N., Teerawichitchainan, B., Tran, T. K., & Korinek, K. (2021). The Impact of Early Life War Exposure on Mental Health among Older Adults in Northern and Central Vietnam. Journal of Health and Social Behavior, 62(4), 526-544.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매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