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50년 전, 미국의 한 정치철학자는 사회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기 위해 흥미로운 사고실험을 제시했다. 그 실험은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고자 하는 사회의 일반적인 상황은 알고 있지만 자기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무지의 장막(the veil of ignorance) 뒤에 스스로를 세워보자는 제안을 담고 있다. 그는 이런 장치를 상정함으로써 사람들이 현실의 이해관계나 친소를 넘어 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위치에서 사회적 질서에 대한 합의를 내릴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스스로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부자인지 빈자인지, 장애나 질병이 있는지 없는지, 직업은 무엇인지, 어떤 정체성을 가졌는지 알 수 없는 무지의 장막 뒤에 서서 한국 사회에 차별금지법이 필요한지에 관한 결정을 내린다면 우리는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될까?
우리는 차별에 반대하는 사회적 장치를 만들자는 데에 동의하는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으리라고 확신한다. 사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장막까지 동원하지 않더라도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의 대다수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한다는 결과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가상의 장막을 젖히고 나와 현실의 고통을 담아내고 있는 한국 곳곳의 천막들을 떠올려보자. 지난 겨울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부산에서 국회의사당까지 도보 행진을 했던 두 활동가, 미류와 종걸이 국회 앞에 천막을 치고 단식 투쟁을 벌인지 22일째다. 파리바게트 제빵기사들의 노동환경 개선과 부당노동행위 철폐를 위한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파리바게뜨지회 임종린 지회장의 천막 단식도 한 달을 넘어선 지 오래다.
거리의 풍경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지난 19일 전국장애인부모연대 회원 등 550여 명이 생존과 존엄을 위한 발달장애인 지원체계 구축을 요구하며 머리를 밀었다. 이동권 보장 투쟁을 이어온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활동가들은 휠체어에서 내려와 무릎과 두 팔로 몸을 지탱하며, 누군가에게는 아무 일도 아닐 승하차를 위해 온몸으로 지하철을 기었다.
이렇게 저항하는 몸들의 정치가 4월 한 달 내내 이어지는 동안, 그런 몸은 없다는 듯 완고하던 정치는 어땠을까.
검수완박과 국민투표 등으로 시끄럽던 국회는 지난주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 계획서를 채택했다. 이제야 겨우 의견은 들어보겠다고 결정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 의미가 법에 쓰여있는 절차를 하나 진행하기로 한 것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차별을 줄이고 평등을 지지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요구에 입법 권력도 더는 ‘사회적 합의’라는 미명으로 법안을 뭉개고 있기 어려운 상황이 만들어지고야 말았다고 판단한다.
우리는 혐오하고 차별할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의 겁박에 당당하게 맞서지 못하고 “사회적 합의”라는 편리한 말 뒤에 숨는 나쁜 정치의 책임을 묻는다. 그때의 “사회”는 어떤 사회이고 합의의 주체는 누구인가. 성별과 학력, 계급과 경험 어느 면으로 보아도 사회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의 의견만이 정치적 결정과 합의의 주체로 호명되는 정치를 언제까지 지속하려 하는가.
시민들이 고립된 위치에서 각자의 이해만을 꾀할 것이라 착각하는 나쁜 정치를 멈춰야 한다. 차별금지법 입법을 요구하는 가운데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이 사회의 구조적 차별이 나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다.
시민들이 자신만의 이해득실을 넘어 보편적 권리 구현을 위한 사회적 과정을 깨달아 가는 과정은 법 하나가 통과되는 것보다 더 큰 성과다. 국회와 정부는 생명, 존엄, 권리와 해방을 요구하는 몸의 정치가 불러일으킨 권력관계의 변화를 똑바로 보아야 한다. 이득과 손해만을 따지는 나쁜 정치가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음을 직시해야 한다.
마지막 질문을 통해 더 너르고 단단한 사회의 모습을 상상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무지의 장막을 걷어내었을 때 무엇을 볼 것이라고 기대하는가? 거기에 앉아있는 이들의 모습이 어떨 것이라고 상상하는가? 적어도 지금의 대통령실이나 국회의 모습과는 크게 달라야 한다.
그 다른 모습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이들이 이미 우리 곁에 있다.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장애여성공감의 20주년 선언)”를 통해 모든 시민이 자유롭고 평등할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서로를 돌보기를 멈추지 않는 정치를 촉구한다. 국가는 이미 시작된 이 정치에 온당히 동참할 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