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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과 노동시간, 노동자와 자본의 ‘자율적 합의’라는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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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가 오르면 돈의 가치가 떨어진다. 이럴 때 임금은 낮춰야 할까, 높여야 할까? 자본은 낮추거나 최소한 유지하자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은 당연히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임금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그럼 정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윤석열 정부는 자본의 손을 들어주려고 한다.

 

지난 6월 29일, 내년도 최저임금이 올해보다 5.0% 인상한 시간당 9,620원으로 확정됐다. 이미 지난 5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13년 9개월 만에 가장 높은 5.4%를 기록했고 6~8월 중에는 6%대 인상이 예고되는 상황에서 사실상 이는 임금 삭감 조치다.

 

최저임금이 확정되기 하루 전날,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를 만나 임금 인상 자제를 요청했다. IT 기업, 대기업의 임금 인상이 다른 산업과 기업으로 확산하면 고물가 상황과 대기업-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가 심화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인플레이션 그 자체의 역진적 성격(저소득자에 더 많은 부담)을 고려하면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 인상이 격차를 완화할 간단한 방법이련만, 수백만 취약 노동자의 임금 수준을 좌우하는 최저임금이 사실상 삭감되면서 임금 격차는 더 심화하게 됐다.

 

 

총임금을 결정짓는 또 다른 변수, 노동시간 규제도 퇴행 중이다. 지난 6월 23일,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현재 주 단위로 관리하는 연장근로 시간을 노사합의에 따라 월 단위로 관리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번에도 IT 산업과 젊은 세대가 호명됐다. 기업별·업종별 사정에 따라 ‘탄력적으로’, 개인의 선호에 따라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가 높다는 게 정부의 진단이었다.

 

발표대로 추진된다면 주 52시간 상한제는 무력화되고, 한 주에 몰아서 사용할 경우 주 최대 근무시간은 92시간까지도 늘어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미 후보 시절부터 ‘주 120시간 바짝 일할 수 있어야’ 함을 운운한 전력이 있다.

 

야간 노동이 ‘2급 발암물질’이고, 장시간 노동과 야간 노동이 과로사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이미 상식이 된 지 오래지만, 많은 경우 ‘야근’은 선택이 아니라 강제라는 현실을 모르는 사람도 있던가? 하물며 물가는 오르는데 임금이 오르지 않는다면, 노동자는 더 많이 일하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다. 더 많이 일하고 싶어도 일거리가 없는 경우에는 생계를 위협받게 된다.

 

노동시간과 임금은 노사 간의 ‘자율적 합의’에 맡겨야 한다면서도 연일 발표되는 정부의 ‘가이드라인’은 명백히 자본의 이해관계를 가리키고 있다. 노사 간의 본질적 권력 불평등을 고려하면, 노동자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선택’이란 허구적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불안정 저임금 노동자의 경우 더욱 불평등한 상황에 처할 것이 명백하다.

 

임금과 노동시간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그 자체로 노동자의 삶과 생계, 건강에 직결된다. 최저임금 결정과 연장근로 규제완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는 개인의 ‘능력’이나 ‘선택’에만 좌우되지 않는다. 노동시장 정책과 산업안전보건 규제, 나아가 이러한 거시 정책을 좌우하는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 사회 권력 사이의 관계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올해 총회에서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환경’을 노동기본권에 추가했고, 이에 따라 산업안전보건은 결사의자유, 차별금지, 강제노동금지, 아동노동금지와 함께 5대 노동기본권이 되었다. 노동자의 신체적, 정신적 수용력에 적합한 ‘적절한 노동시간’은 이미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환경의 핵심 요소로 인정되어 있다.

 

코로나19 유행 상황에서 ‘재택’할 수 없었던 대면 필수노동자들, 업무량 폭증으로 과로에 시달린 콜센터 노동자와 배달노동자들을 벌써부터 잊을 수 없다. 한국의 이중 노동시장 구조는 코로나19 유행 대응을 어렵게 했고, 유행 대응 과정에서 심지어 그 격차는 심화하였다.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한 적절한 처방 없이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노동시간 규제완화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고용노동부 장관은 “노동의 역사는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라는 말로 운을 띄웠다. 노동시간은 “가장 기본이 되는 노동조건”일 뿐만 아니라 “일터의 경쟁력과 직결되는 핵심 요소”라고도 했다.

 

자본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고용’부 장관에게 가르쳐 주자.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시간 단축 투쟁의 역사”라고(바로가기). 정부의 ‘임금 인상 자제’ 발언에 끓어오르는 분노만큼, 나와 우리의 건강한 노동, 인간다운 노동을 위해 힘을 모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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