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수도권 집중폭우로 발생한 ‘반지하 참사’는 우리 사회에 큰 슬픔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서울시가 졸속으로 발표한 ‘반지하 주택 근절 대책’의 실효성 논란이 더해지면서 지난 2주 간 사회적 시선은 반지하 주택에 집중되었다. 이 과정에서 반지하 거주자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심화될 우려가 커졌다.
이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것은 단지 ‘열악한’ 주거환경만이 아니다. 반지하 거주자라고 하는 부정적 사회정체성 역시 ‘낙인효과(Stigma effect)’를 통해 이들의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악화시킨다. 이는 많은 보건학적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사회경제적으로 불리한 이들에 대한 ‘표적화’된 정책 대응방식은 필시 낙인을 유발하고 고착화한다. 근시안적 대책 마련에 매몰되기보다 불평등 구조에 대한 근본적 고민과 대안 모색이 더 바람직한 접근인 이유다.
한편 이번 기후재난이 보여주었듯 우리는 취약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 모두 위기 앞에 취약한 존재이고 서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자각은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 침수된 주택에 갇힌 이웃을 구조하는 이들의 모습은 “위기는 인간을 윤리적으로 만든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사실처럼 느껴지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가 가장 취약한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떠올리면 ‘취약성의 윤리’에 섣불리 희망을 걸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 사회가 만든 법과 제도로 인해 극도로 취약해진 존재들이 있다. 바로 이주노동자들이다. 고용허가제를 비롯한 여러 차별적 형태의 제도들로 인해 이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주거환경 속에 내몰려 있다. 직장 내 임금체불과 신체적, 언어적 학대, 성폭력이 만연해 있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개선은 더딘 실정이다. 이들은 기본적인 인권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취약한 상황에 놓여있다.
건강권 보장도 예외가 아니다. 이주민의 의료보장률은 2020년 기준 77.1%로 거의 100%에 가까운 선주민들에 비해 저조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관련자료 바로가기). 또한, 선주민보다 경제활동참가율과 고용률이 더 높은데도 불구하고 지역가입자 비율이 높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납부하는 건강보험료는 선주민 지역가입자들에 비하여 월등히 많다. 이주민들은 직장가입자가 되기 어려운 임시직·일용직의 불안정 고용노동자나 농·축산·어업 사업장에 고용된 이들이 많은데다가 소득 수준과 상관없이 선주민의 평균 보험료 또는 그 이상을 부과하는 불합리한 보험료 산정 방식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보험료가 한번만 체납돼도 바로 급여를 중지하고 이후 완납해도 소급 적용하지 않는 점, 피부양자와 세대원 등록을 엄격히 제한하는 점, 저소득층 건강보험료 경감·면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점 등 이주민 의료보장제도를 살펴보면 불합리하고 차별적인 요소들로 넘쳐난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40만 명이 넘는 미등록 체류 이주노동자들이 공적 의료안전망 바깥에 방치돼 있다는 점이다. ‘외국인근로자 등 의료지원사업’이 있지만, 지원대상자 선정 문제나 이용 가능한 의료기관의 제한, 사업예산 부족 등으로 한계가 뚜렷한 실정이다. 민간 영역의 지원 사업만으로는 이 공백을 메우는 데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해도 적절한 치료를 받기 어려운 취약한 상황에 처해 있다.
미등록 즉, ‘불법’ 체류상태에서는 의료를 포함한 각종 사회보장제도의 지원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그만큼 더 크게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사회적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지난 1일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은 광복절 대통령 특별사면에 미등록 이주민을 포함할 것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관련자료 바로가기). 하지만 서민생계형 형사범이나 장애인, 중증환자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사면조치는 이뤄졌지만, 이들은 별다른 언급 없이 사면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사회적 약자이기는 매한가지라는 점에서 이주민들은 국가가 포용해야 할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제된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부 입장에도 미묘한 변화의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관련기사 바로가기). 이들의 노동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제조업과 농업 분야의 현실을 외면한 채 계속 불법 체류자 단속을 고집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필요를 위해 데려 온 이들을 합법화하는 것은 특별한 배려가 아니라 ‘비정상의 정상화’일 뿐이다.
모든 사회는 그 사회가 배제하는 것에 의해 정의된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 사회의 건강보장제도 역시 배제된 이들의 관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지금 이 시점에서 이주노동자들의 눈에 비친 한국의 건강보장제도는 결코 정의롭지도, 인간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하긴 우리 사회 전체가 이들에게 인간적이지 않은데, 어떻게 인간적인 제도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매리언 영에 따르면, 지금 한국사회에서 선주민과 이주민의 관계는 억압과 지배의 관계로 정의될 수 있다. 우리는 이주민을 차별과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찍고 주변화,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억압하고 있다. 또 이들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이들을 철저히 배제하는 방식으로 지배하고 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적이고 불합리한 제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구조적 부정의인 지배와 억압의 체계를 종식해야 한다.
사람중심 관점은 편협한 국민의 경계를 뛰어넘어 누구에게나 정의롭고 평등한 건강사회를 만들어 갈 것을 요구한다. 강조하건대 국민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다. 이를 위해 먼저 정치적 대표 불능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주민들에게 ‘정치적 성원권(political membership)’을 부여할 것을 주장하자. 아울러 이들에 대한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정당화하는 인종주의에 맞서자. 이주민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없애고 이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할 수 있으려면 우리 각자 마음속에 이들을 열등하고 위험한 존재로 여기고 있지 않은지에 대한 상호 성찰도 필수적이다.
농촌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고스란히 폭로한 <깻잎 투쟁기>(우춘희, 2022)의 책 소개글은 “그 많은 깻잎은 누가 다 키웠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참고로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인만 즐겨 먹는 깻잎을 하루 1만 5천장 따기 위해 10시간 이상 일하고 있다) 우리는 질문을 바꿔 스스로에게 “그 많은 깻잎은 누가 다 먹었을까?”라고 물어야 한다. 우리의 풍족한 일상은 그들의 노동의 대가로 유지되고 있다. 선주민과 이주민으로서 우리와 그들은 상호의존적 관계 속에 살아가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있다는 인식이 심화되고 확산될 때 ‘취약성의 윤리’, 그리고 ‘취약성의 정치’의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