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기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술,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적당한 신체활동이 우리 몸에 보약이라는 사실도 마찬가지. 그런데 왜 우리는 아는 대로 실천하지 못할까? 의지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가 속한 사회의 여러 환경과 조건이 선택에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일하는 시간이 너무 길면 운동에 시간을 내기 어렵고, 주거비가 비싸고 살림살이가 빠듯하면 신선한 채소는 사치가 된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의 여러 조건이 얽히면 어떤 사람들은 건강한 삶을 사는 데 체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이고 만다. ‘건강 불평등’이라는 말이 내포하는 의미다.
한국에서는 지역 간의 건강 불평등이 점점 심해져 문제가 되고 있다. 비수도권, 특히 농어촌 지역의 병원과 의료인력이 부족한 것이 주로 관심을 받지만, 그것만 문제는 아니다. 지역은 안전한 도보 환경과 공원, 수영장이나 체육관 같은 운동 시설, 여가를 다채롭게 보낼만한 문화적 기반 등 기본적인 인프라가 부족하므로 건강한 삶을 선택하기 위한 시간적, 물질적, 정신적 비용이 서울에서보다 훨씬 크다.
비수도권, 농어촌의 낙후된 인프라는 ‘원래 그런 것’이라고 여겨지기 쉽지만, 산이나 하천이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과는 다르다. 한국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전략적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지역 간 자원 배분은 가격 경쟁력 있는 수출품을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데 유리한 방향으로 이루어졌고, 이러한 정책은 지역 주민의 의사를 민주적으로 반영하지 못했다. 정책의 결과로 수도권이 남한 인구의 절반을 흡수하는 동안 10만이 넘었던 전라남도 곡성군 인구는 3만 명으로 쪼그라들었다. 곡성군뿐 아니라 대부분의 농어촌 지역이 삶의 기본적인 필요조차 생활권 내에서 채우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처럼 건강한 삶을 위한 조건이 지역 간에 구조적으로 불평등하고, 이것이 일련의 정책으로 인한 결과라면 금연 캠페인을 벌이고 걷기 실천 대회를 개최하는 것만으로는 건강 불평등을 해소할 수 없다. 지금까지 주류였던 질병 중심, 프로그램 중심의 보건 사업을 넘어 사회생태적 조건을 바꾸는 ‘민주적 접근법’이 필요한 이유다(☞논문 바로가기: 정책으로 인한 구조적인 건강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지역사회의 역량 기르기).
민주주의는 주민들이 권한을 갖고 직접적인 참여나 간접적인 옹호 활동을 통해 정부가 책임을 지게 만드는 거버넌스 방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책임을 물으려면 힘이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목소리를 모아 함께 행동해야 한다. 논문의 저자들은 ‘지역사회 역량’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이를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민주적인 활동 조직을 이루어 의제를 설정하고, 공공 담론을 바꾸며, 정책 결정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정부와 서로 책임을 지는 지속적 관계를 만드는 능력’이라고 정의했다.
논문은 건강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민주적 접근법을 설명하기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의 프레즈노 지역사회가 역량을 기르고 행사할 수 있도록 지원한 ‘건강한 지역사회 만들기(Building Healthy Communities)’ 사례를 소개한다. 프레즈노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 중 하나인데, 지역사회 조직가들은 초기 단계에서 주민들에게 “충분한 돈이 있다면 무엇을 바꾸고 싶은가?” 하고 물었다. 많은 주민이 공원이 부족한 문제를 꼽았고, 라틴계, 아프리카계, 아시아계 주민이 많은 곳일수록 필요가 더 컸다.
프레즈노 주민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프리카계, 라틴계, 동남아시아계 주민, 오악사카 원주민이 주도하는 ‘모두를 위한 공원(Parks4All)’ 캠페인을 시작했다. 주민들은 도시의 선출직 공무원을 지역사회 주민 회의와 공청회에 불러 공원이 부족하다고 호소했다. 또한 공원이 인종에 따라 불평등하게 분포한다는 사실을 부각하는 버스 광고를 제작했다. 그러나 시 당국은 광고가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게재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전국 언론의 주목을 받아 이슈가 되었고, 결국 시 당국은 공원 시설에 대한 투자를 약속해야 했다.
주민들은 예산 공청회에 참석해 공원 계획을 위한 45만 달러를 확보하는가 하면, 주립 채권 기금을 유치하기 위해 집중적인 조직화와 옹호 활동을 벌였다. 나아가 프레즈노의 공원과 산책로를 개선하는 목적으로 판매세를 인상하자는 주민투표안을 발의하기 위해 3만 5천 명의 서명을 모았고, 투표 결과 52%의 찬성을 얻었다. 시청과 경제계는 법안에 반대하며 특별세를 부과하려면 2/3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이 요건은 주민발의안이 아닌 정부안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기금을 모아 소송을 진행했고, 결국 주 대법원은 주민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건강한 지역사회 만들기’를 통해 프레즈노 지역사회는 정부에 불평등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수많은 정책을 도입하고, 시스템을 바꾸었으며, 여러 실질적인 혜택을 얻어냈다. 이 사례를 통해 저자들은 몇 가지 시사점을 제시한다. 첫째, 건강 불평등을 해소하려면 예산 지원 관행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특정 질병이나 사업을 중심에 둔 단기 예산은 민주적 접근법과 양립할 수 없으며, 장기적 관점에서 지역사회의 역량을 강화하며 정책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예산을 수립해야 한다. 둘째, 시‧도청의 보건과나 시군구 보건소는 지역사회 역량을 지원하는 조직과 협력하는 법을 배우고, 지역사회에 책임을 지는 절차를 개발하며, 불평등 해소를 위한 변화에 수용적이어야 한다. 셋째, 보건 전문가는 사회적 조건을 바꾸는 데 필요한 지식을 지역사회와 공유하고 협력해야 한다. 또한 예산 수립 및 집행, 사업 수행 등 공공 시스템이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지 파악하고, 이를 지역사회 주민들에게 알려야 한다.
미국의 건강 불평등이 인종차별적 정책과 깊게 관련된 것처럼, 한국의 지역 간 건강 불평등 또한 수도권/제조업/대기업 중심의 정책이 누적된 결과다. 어떤 지역이나 집단이 혜택을 얻은 만큼 다른 사람들은 자원과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건강 불평등이 단지 개인의 선호나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자원 배분을 둘러싼 특정한 의사결정에서 비롯된 사회 구조가 만들어내는 현상이라면 해결책 또한 자원 배분의 거버넌스를 우회할 수 없다. 지역사회의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일이 가장 근본적인 건강 불평등 개입이라는 뜻이다. 예컨대 지방정부의 소극적인 예산 운용으로 남은 돈인 세계잉여금을 주민들의 삶과 건강을 위해 제대로 사용하도록 ‘지역사회 역량’을 행사할 수 있으면 어떨까?(☞기사 바로가기: 철원군, 남는 돈이 너무 많다) 함께, 책임을 요구하자.
*서지 정보
Iton, A., Ross, R. K., & Tamber, P. S. (2022). Building Community Power To Dismantle Policy-Based Structural Inequity In Population Health. Health Affairs, 41(12), 1763-17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