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가격 45년 만의 최대 폭락. 50년 만의 최악 가뭄. 숫자가 가리거나 미처 드러내지 못하는 고통들이 있지만, 그 숫자 사이사이로 배어나올 수밖에 없을 만큼 지금 농민과 남부 지방 주민의 고통은 절박하다.
재작년 말과 작년 여름부터 이어졌다는 쌀값 폭락과 가뭄은 사실 한 두 해를 넘어선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언론이고 정치권이고,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숫자를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듣는 척이라도 하는 상황은 바로 이 고통을 야기한 본질의 일부다. 언제나 뒤늦고 지엽적인 기술적·관료적 대응들은 농민과 지역주민을 분노와 무력감에 몰아넣으면서 그들의 고통을 악화시키고, 또 재생산한다.
# 쌀값 폭락과 양곡관리법
지난 23일 정부·여당의 반대 속에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현행 양곡관리법이 규정한 쌀 시장격리(정부 매입) 조치가 실효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이 골자다. 작년 9월 산지 쌀값이 재작년 최고 가격보다 약 30% 폭락해 통계조사 45년 만의 최대 하락폭을 기록했는데, 정부가 뒤늦게 시장격리 대책을 발표한 후에야 쌀값이 반등한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3년간 한시적으로 시행한 타작물 재배 지원 사업을 제도화하는 내용도 담겼다. 쌀 공급과잉 구조를 해소하고 사료작물 등 타작물의 자급률을 높이기 위한 조치다.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처리했다는 정부·여당과 언론의 말은 절반만 진실이다. 표결에 참여한 266명 의원 중 찬성 169표에는 정의당, 기본소득당 표가 함께다. 전농 등 농업인단체도 반대한다는 정부·여당의 말은 절반의 진실은커녕 사실 왜곡이다. 양곡관리법 개정을 덮어놓고 반대하는 여당, 한참 후퇴한 법안을 만들고 만 야당을 모두 비판하며, 생산비를 반영하는 쌀 최저가격제, 농업에 대한 국가책임 강화를 쟁취하겠다는 게 전농의 입장이다.
본회의 통과 후 국무총리가 무려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다. 이번 정부 최초일 뿐 아니라 역대 어느 정부에서도 흔치 않은 사건이다. 최초 개정안이 발의된 후 1년 넘게 정쟁이 반복되는 동안 정부가 보여준 가장 적극적 행보로 보인다는 데서, 정작 그 내용은 개정안 반대, 정부의 시장개입 최소화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부조화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가능성도 공식화했다.
“개정안은 시장의 수급 조절 기능을 마비시킵니다… 이 조치[쌀 시장격리]는 시장이 제 역할을 못 하는 긴급한 상황에 한해, 최소한의 수준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공급과잉이 더 심해지고 가격은 더 떨어질 것입니다.”
“개정안에 따른 재정부담은 연간 1조 원 이상입니다… 농업 경쟁력 강화와 청년 농업인 육성에 써야 할 재원을 남아도는 쌀 매입에 쏟아 부으면 농촌의 혁신은 더욱 멀어집니다.”
“시장 원리를 거스르는 ‘포퓰리즘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개정안으로 인해 정말 공급과잉이 더 심해지고 가격은 더 떨어지는지, 연간 1조원 이상의 재정 부담을 야기할지에 관해 여러 언론이 ‘팩트 체크’를 벌였다. 모든 언론의 결론은 사실상 ‘아니다’라는 것. 불충분한 방안이라는 점, 수요량과 생산량을 모두 조정하는 보다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식량대책이 필요하다는 진단과 비판은 공통적이다(관련 언론 기사 링크1, 링크2, 링크3).
‘팩트 왜곡’을 넘어 더 문제적인 것은 이것이다. 세계화라는 미명 하에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이후 한미FTA를 비롯한 수많은 자유무역협정으로 농업·농촌을 고사시켜온 역사는 고스란히 무시하고, 경쟁력과 혁신, 심지어 청년을 호명하면서 초과 생산량을 결과하는 모든 책임을 농민에게 돌리는 것.
한국은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따라 매년 40만t의 쌀을 의무 수입하고 있다. 연간 소비량의 10%를 훌쩍 뛰어넘지만, 쌀 소비량이 줄어도 의무 수입량은 줄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문제다. 2005년 이래 쌀 초과 생산량은 연평균 17만t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40만t을 넘었던 건 2008년과 2009년, 단 두 차례다. 2019년과 2020년에는 도리어 수요량보다 생산량이 적어 문제가 되었으며, 농식품부는 올해도 쌀 수요량 대비 생산량이 28만t 부족할 것으로 전망했다.
전농은 정부가 농업에 대한 국가책임을 망각하고 만능주문인양 스마트팜과 푸드테크만 염불처럼 외고 있다며, 작년 9월 정부가 뒤늦게 발표한 일회성·선심성 시장격리야말로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했다.
# 가뭄과 제한 급수
농민의 시름을 더하는 것은 광주·전남 등 남부 지방의 가뭄이다. 모내기철이 돌아왔지만, 지난해 여름부터 이어진 50년 만의 최악 가뭄으로 농업용수는 물론 도서지역 주민은 식수, 생활용수마저 부족하다. 560여명이 사는 전남 완도군 넙도에서는 1년 가까이 1주일에 무려 ‘6일 단수 1일 급수(!)’를 시행하는 중이다. 인구 2,300명의 소안면, 3,650명의 금일읍도 주 2일 급수를 이어오고 있다.
언론에서는 이대로 가면 대도시 광주에서도 30년 만에 제한급수를 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하지만, 1년 가까이 빨래도 샤워도 줄이고, 가족 모두가 1주일간 먹고 씻을 물을 욕조와 대야에 받아야 하는 넙도 주민의 고통 역시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다. 만일 같은 상황이 서울에서 벌어졌다면 어땠을까? 아니, 서울에서 벌어지는 것이 상상이나 가능한가?
50년 만의 최악 가뭄이라고는 하지만, 완도군만 해도 이미 2013년부터 폭염과 가뭄에 따른 제한급수 시행과 함께 근본적 대책 필요성을 거론했다. 2019년이 되어서야 국비 지원을 받아 식수원 개발 사업을 시작했고 넙도의 경우 4월 중 해수 담수화 시설이 준공된다고 한다. 지금의 가뭄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유지운영 예산 부담을 이유로 한 수원지 폐쇄, 중앙-지역, 지역-지역 간 조정된 상시대응 체계 부재 등이 원인으로 거론되고 있다.
# 지역 불평등을 야기하는 사회적 힘
‘사회적 고통’ 관점은 인간에게 고통을 야기하는 ‘사회적 힘’에 주목한다. 고통은 개인에서 발생하지만 또한 사회 안에서, 사회적으로 발생하며 신체적·정신적 차원과 동시에 정치적·경제적·역사적·제도적·문화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개인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사회적 고통이 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고통은 단순히 개인적 고통의 합이 아니다. 결과이자 원인이며,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사회적 과정이기도 하다. 사회적 고통 관점은 개인-사회라는 이분법을 넘어, 각 개인이 경험하는 고통의 총체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농촌과 비수도권 지역의 고통은 도시와 농촌, 수도권과 비수도권 사이 불평등과 착취 관계, 이를 조장하거나 방치한 중앙(국가)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회적 고통’의 관점에 부합한다.
쌀 작황이나 강수량에는 분명 자연적 요인이 있지만 쌀과 물의 수급 불균형이라는 결과는 차라리 사회적 현상에 가깝다. 기상현상조차 기후위기로 인해 변동 폭이 커지고 예측 불가능성도 높아졌다는 진단이 나온 지 오래다.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자체는 예측되었다. 이른바 ‘불확실성의 확실성’. 하지만 그에 걸맞은 대비는 없었다.
전남 지역을 예로 들더라도 농업이 지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전체 농업 중에서도 벼농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 농사로 먹고사는 사람이 많지만 노인 인구의 비중이 높고, 고령화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익숙하고, 기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벼농사에서 타작물 농사로 이전이 쉽지 않다는 분석이다. 벼농사는 다른 작물에 비해 농업용수 수요량도 많다.
쌀 가격 역시 시장기전에 의한 결정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양곡관리법에 따른 쌀 시장격리제도는 기존의 쌀 목표가격제도를 중지하는 대신 도입되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밀, 옥수수 국제 가격이 폭등하자 언론과 정부가 나서 식량안보를 부르짖었던 것이 엊그제지만, 경제위기로 모든 물가가 인상되는 와중에 생산비는 폭등하는데 산지 쌀값은 도리어 폭락했다. 쌀은 언제나 물가관리의 희생양이었다.
사회적 고통 관점은 신체적이고도 정신적인 건강 문제, 나아가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보건과 의료, 돌봄의 문제를 사회 구조적 결정요인이라는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건강 불평등’의 문제 인식에도 부합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보건의료를 둘러싸고 지역이 경험하는 불평등과 부정의에 접근하는 우리의 관점 역시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도 손쉽게 ‘의료격차’와 ‘의료취약지’를 호명하고 있지 않은가? 비수도권 농촌 지역에서 의료가 ‘취약’하고 수도권 도시 지역에 비해 ‘격차’가 발생하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기원에 대해서는 눈감고,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대응 대신 단지 병원 하나, 의과대학 하나 더 짓는 일회성·선심성 대응만 상상하도록 강제하고 있지 않은가?
정부는 필수·지역의료를 강화한다고 하면서 그 수단은 ‘공공정책수가’와 ‘지역수가’만을 제시하고 있다. 공공정책수가를 지급한다고 해서 민간 공급자들이 지역으로 찾아갈까? 의료를 이용할 인구도, 돈도 부족하고 나와 내 가족이 누릴 인프라도 부족해 안중에도 없던 지역이, 공공정책수가만으로 평생 살고 일할 만한 지역으로 여겨질까?
도리어 필수·지역의료 강화 정책이 취약지역의 필수의료를 망가뜨리고 나머지 지역과의 불평등을 심화시킬 가능성도 높다. 민간 중심 의료공급체계를 그대로 둔 채 수가만 지원한다면 민간의료조차 취약한 지역은 지원을 받으려 해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역이 살 만하지 않으면 사람은 사라지고, 민간에 의존하는 지역의료 역시 당연히 난망이다. 제 아무리 민간병원과 의사에게 돈을 쏟아 부어도 미봉책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비수도권 농촌 지역의 불평등이 사회적 고통인 만큼, 건강과 보건의료의 지역 간 불평등도 사회적 고통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정부가 생산자로서, 혹은 ‘이해당사자’로서 농민·지역주민을 어떻게 대하는지부터 문제제기의 대상이다. 의료계와 수차례 ‘의료현안협의체’를 가지는데 들이는 품의 다만 몇 %라도 지역주민과 농민의 목소리를 듣고 반영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