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곳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을 이토록 무시하고, 권리를 침해하는 나라에서 감히 무슨 면목으로 저출산을 운운하고 있는가.
우리는 더 이상 비밀이고 싶지 않다! 국가는 임신중지를 건강권으로 보장하라!”
갈채와 환호 속에 2019년 4월 11일 ‘낙태죄’ 는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20년 12월 말까지의 대체 입법 마련 기한도 지난 채, 형법상 임신중지가 완전히 비범죄화되고 다시 2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오늘까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국가를 향해 우리의 존재를 인정하라는 비장한 외침이 어제 용산역 광장에 울려 퍼졌다(관련 보도).
여성의 삶에서 임신과 출산이 의미 있는 사건이라면, 피임과 임신중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결정이다. 그러나 출산과 결혼을 위해서는 지난 15년간 별 효과도 없는 ‘280조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으면서도 그와 뗄 수 없는 피임과 임신중지에 대해선 마치 없는 일처럼 다루는 이 극단적인 현상은 무엇일까? 실제로 임신중지는 제왕절개 수술과 비슷한 수치로 가임기 여성이 경험하는 가장 흔한 의료시술인데도 말이다.
현재 한국의 저출산 원인이 고용·주거·일가정 양립·보육과 돌봄의 부담과 성차별적 문화라는 진단은 누구나 동의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남녀 모두의 대응전략은 결혼이나 출산을 회피하거나 지연하고, 개인의 경제적 역량과 인적자본을 구축하여 생존력을 높이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현실은 성별에 무관하게 어려운가? 한국 정부에서 발표하는 <국가성평등지수>의 평가 결과만 보더라도 2021년 기준 성평등한 사회참여(69.7), 여성의 인권·복지(82.9), 성평등 의식·문화(74.9)가 완전 성평등(100)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고, 세계경제포럼(WEF)이 평가하는 2022년 젠더격차지수(GGI)에서는 세계 146개국 중 99위를 차지할 정도로 여성들의 상황이 더 나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월 28일 발표된 정부의 <제4차 저출산 고령사회 정책 과제 및 추진방향>은 2020년에 마련된 4차 기본계획(2021~2025)에 포함되어 있던 성평등한 노동과 돌봄, 포괄적인 성·재생산권 보장, 젠더폭력 피해 구제와 예방 등의 성평등 제고를 위한 목표와 추진 과제가 완전히 빠져있어 시민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여성들의 사회경제적 성취는 무엇보다 자신의 몸에 대한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통제로부터 출발한다. 임신중지와 피임 등을 포함하는 성·재생산 건강보장이 양성평등의 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은 빈국과 부국을 막론하고 이제 공리에 가깝다.
작년 8월 미국의 유에스뉴스 분석에 따르면, 임신중지에 대한 접근성이 잘 보장된 주들이 젠더 평등 면에서도 명백하게 더 나은 성과를 보였다. 그것은 교육, 경제, 건강, 가족계획과 돌봄, 선출직과 관리직에서의 대표성과 권력 등 다양한 사회지표에서 일관되었다. 젠더평등 수준이 가장 높은 주정부들은 임신중지에 대한 제한이 거의 없거나, 임신중지 절차를 추가로 보호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경향이 있었다(U.S news 2022.8.25).
과도한 염려일지 모르나, 이런 성평등의 효과는 여성의 성취와 삶에만 영향을 주고 남성들이 누리던 특권과 지위를 빼앗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성평등 수준이 높은 지역에 사는 남성은 다른 지역의 남성에 비해 행복할 가능성이 더 높았고, 이혼율이 낮았고 우울할 가능성은 1/3도 안됐다. 폭력사건에 의한 사망률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남녀 간의 자살률 격차도 적었으며, 배우자나 자녀를 폭행할 가능성도 낮았다(Holter, 2014).
성 다양성이 확보된, 성평등이 이루어진 직장에서 직원들의 업무 몰입도와 회사에 대한 충성도가 더 높고 더 좋은 성과를 낸다는 보고들도 많다. 생산성이 높아진 조직의 혜택은 남녀를 불문하고 함께 누리기 때문에 모두에게 이익이다. 종합하자면, 성평등이 개선되면 일관되고 강력하게 모든 사람의 주관적 웰빙이 향상되고, 해당 국가의 삶의 질이 전반적으로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Audette, 2019).
우리 연구소에서도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왜 ‘낙태죄’ 폐지가 필요한지, 여성의 성·재생산권리와 건강 현황이 어떠한지, 어떤 젠더건강불평등과 사회 부정의의 문제가 발생하는지를 알리는 여러 편의 논평과 연구결과들을 발표했다. 국내외에서 보고되는 수많은 의과학적 근거들, 역사적 진전을 이뤄낸 중요한 정치적 결정들, 무엇보다 여성들이 겪는 현실의 비참한 고통들을 앞에 두고도 정부당국이 임신중지권을 이처럼 철저히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이유를 윤석열 정부가 현재와 미래의 삶의 전망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종합적 평가결과라고 할 수 있는 ‘저출산’ 문제에 대하여 단지 걱정하고 해결하려는 시늉만 하는데서 그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성평등과 임신중지 권리보장을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문제로 인식하지 않거나,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행위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음으로써 기존의 젠더불평등한 구조의 이익을 누리려는 권력정치라고 해석한다.
정치는 자원의 배분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할 때 건강정책과 건강형평성의 핵심적인 결정요인이다. 이해관계자들의 물질적, 이상적, 제도적 이익과 힘은 누구의 건강이 중요한지와 그러한 결정에 누가 영향을 미치는지를 결정한다(Hawkes and Buse, 2019).
그래서 ‘더 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는 2022년 1월 윤석열 대통령 후보의 발언이 지금은 정확하게 ‘더 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에 대한 정책)은 없다’로 읽히는 것이 더욱 위험하다. 스스로 특권을 누리는 당사자로서 그렇지 않은 타인의 삶을 경험하거나 숙고의 대상으로 삼은 적이 없었던 사람의 상황 인식은 그 스스로의 무지에서 끝나지 않고,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우리 사회의 강고한 젠더불평등한 사회구조를 지지하고 존속하는데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즉 개인 윤석열의 관점과 이해에서 그치지 않고, 성평등에 대한 집단적 백래시를 오히려 국가권력의 작동을 통해 강고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가령 제약회사의 임신중지 의약품에 대한 허가신청이 있을 경우 신속하게 허가 심사를 진행하겠다던 식약처는 1년 5개월의 허가신청 절차를 지연시켜 도입을 무산시켰다. 또한 보건복지부는 국정감사나 언론 인터뷰에서는 임신중지는 ‘대체입법이 없어 건강보험 급여로 다룰 수 없다’고 하면서도, 대한산부인과학회를 통해서는 ‘합법적인 의료서비스’로 의사들이 외과적 수술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처리해주었다(시민건강연구소, 2023). 이번 정부조직 개편안에 여성가족부 폐지가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여가부를 폐지하겠다는 그 언급만으로 이미 소관 업무들이 동력과 비전을 잃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여성들이 자기 몸에 대한 통제를 실천할 수 없는 근원적인 불평등 구조를 건드리지 않고서는 각종 저출산 대책이나 양성평등 계획은 앞으로도 ‘재탕, 맹탕’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정부는 시민의 복리와 삶을 훼손하고 그 질을 저하시키는 젠더불평등이 만들어내는 위태롭고 불온한 이익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시민의 삶의 안녕과 자유를 위하여 더 늦기 전에 저 광장에서 울려 퍼진 절실한 외침을 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