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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풀 논평

새 정부가 ‘성공하기’를 바란다

  정권 교체와 새 정부 출범을 축하한다. 국가 권력은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아지는 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 국가 권력의 중추인 정권이 바뀐 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중요하다. 행정부와 국가 권력의 성격을 두고 그 주체가 누구든 ‘오십보 백보’ 차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나,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한 가지 이유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그 고통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아가려면 디딜 수밖에 없는 토대가 달라지는 것이다.   ‘진보’가 상대적 개념임을 전제한다면, 지난 정권에 비하여 이번 정권이 조금은 더 진보적일 것이라고 기대한다. 다만, 아직은 가능성일 뿐이다. 그 어떤 것도 정권의 성격을 저절로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이 아닌가. 더구나 진보의 기준이 기존 권력 관계 ‘구조’를 조금이라도 흔들어야 하는 것이면, 그럴 생각이 있는가는 차치하고라도 그럴 조건과 능력이 되는가를 물을 수밖에 없다. 앞으로 5년, 권력과 정권의 성격은 열려 있다. 그 모든 사회변동을 통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유동적인 것이다. 여러 가지 힘의 균형과 조건, 상호작용에 따라 어느 정도는 끝이 열려 있으니, 미리 구속할 필요가 없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지금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낙관도 비관도, 열광도 냉소도, 모두 경계한다. 다시 일상으로, 지루하고 고단한 삶으로 돌아갈 때,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우리가 더 중요한

서리풀 논평

‘재원 대책’을 묻는 진심은 무엇인가?

  대통령 선거는 권력을 나누고 돈을 (재)배분하는 중요한 결정이기도 하다. 차별이 얼마나 줄어들지, 소수자의 목소리가 더 커질 수 있는지, 대통령 선거가 영향을 미친다. 어린이 복지에 쓰는 예산과 토목 공사에 쓸 나랏돈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우리는 돈(자원)을 배분할 때 나타나는 대통령 선거의 오랜 관행과 습관을 다시 생각해 보려 한다. 단지 과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대통령 선거와 그 후보, 정당을 움직이고 반응하게 하는 오랜 습관. 그것은 어떤 약속을 할 때마다 따라붙는 질문, ‘재원 대책’이다.   다음은 눈에 띄는 대로 고른 일간 신문 기사 중 하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16 더 나은 삶 지수’ 조사에서 우리나라는 38개국 중 28위에 그쳤다. 심지어 2012년과 비교하면 4계단이나 하락한 것이다. 대선 후보들은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기초연금 인상 등 복지 확대에 힘을 쏟겠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대부분 재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지 않아 ‘포퓰리즘’ 논란도 거세질 전망이다.”(바로가기)   특정 신문이나 기사를 가릴 필요가 없다. 조금만 돈이 많이 든다 싶으면, 재원, 포퓰리즘, 퍼주기, 탁상공론 등의 습관성 용어가 꼬리를 문다. 대통령 후보들이 직접 만나는 토론 때도 빠지지 않는 주제다. 공허하다고 서로 공박하는 것이 보통이다.   바람직한 변화에 돈(자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국가가 하는 일에는 반드시 재정과 재원이 필요하다.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할지 생각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것도 당연하다. 부인하지 않는다.   문제는

서리풀 논평

‘을(乙)’을 위한 일상의 민주주의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도 어렵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 말 많은 ‘갑을’ 관계는 이제 갈 데까지 가서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청와대 대변인 사건은 그 중 압권이다.   양상은 달라도 흐름은 일관된다. 봉건과 권위주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시장과 관료제가 그토록 자부해마지 않는 능률과 효율성은 형식으로도 작동하지 않는다. 마치 조선 시대에나 있음직한 일들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은 당혹스럽다.   ‘지체된 근대’가 한국 사회의 특징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봉건적 잔재가 시장의 겉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이 그나마 꼴은 근대라고 불러야 할까. 겉으로는 시장의 합리성을 내세우지만 허울뿐이다.   물론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피지배 계급이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나 해방되었다고 서양 경제사는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부분적으로만 진실이고, 해방되었다는 그들이 얻은 자유 역시 부분적이었을 뿐이다. 경제적 예속이 존재하는 한 신분의 해방은 불완전하다.   그 중에서도 한국 자본주의의 봉건성은 유난스러운 점이 있다. 자본주의나 근대의 형성과 발전을 어떻게 설명하든, 봉건의 유산은 곳곳에 남아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반(半)봉건’이라는 규정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장과 봉건의 기묘한 결합은 어렵지 않게 경험하는 일상이다.   재벌 체제의 비(非)자본주의적 성격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봉건성은 그보다 훨씬 더 일상적이다. 그 누구도 여기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없을 정도다.   예를 들어 사회적 가치와 관계없이 어떤 직업을 낮추어 보는 일은 흔하다. 학벌이 남다른 위력을 발휘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