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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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강화, 장관도 예외가 아니다

  영국의 정책학자 길 월트는 장관에 네 가지 유형이 있다고 주장했다. 최소주의자, 정책선택자, 정책집행자, 정책 대사 중 하나라는 것(길 월트 지음, 김창엽 옮김, <건강정책의 이해>, 한울 펴냄).   “최소주의자는 부처의 기본 역할만 수행한다. 정책선택자는 똑똑한 일반인처럼 행동하면서 여러 정책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는 정도에 만족한다. 정책집행자는 관리자로서 해야 할 역할과 효율성에 모든 관심을 쏟고, 정책 대사는 일반대중과 만나 부처의 정책과 업무를 홍보하는 것을 주로 한다.”   더 중요한 내용이 이어진다. “공무원이 정보를 장악해 장관을 불리한 처지에 몰아넣은 다음, 정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어쩐지 익숙하지 않은가?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 대통령을 뽑느라 장관(그리고 책임이 있는 고위 공직자)을 소홀하게 생각하기 쉽다. 장관은 생각보다(생각만큼!) 중요하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두 달이 넘었지만 행정부 구성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사청문회를 거쳐 이미 활동을 시작한 장관이 있는가 하면, 이제야 지명된 장관도 있다. 장관 이외에 책임 있는 공직자까지 포함하면 한참 더 기다려야 할 모양이다.   좋은 정부를 가질 수 있다면 시간이 좀 더 걸린다고 무슨 큰 문제일까. 충분히 시간을 쓰는 것이 검증과 판단에 도움이 될 터이니 기다려도 된다. 행정부가 해야 할 정책과 사업의 방향을 논의하고 명확히 하는 기회가 되면 금상첨화다.   시간과 속도, 행정부 구성의 완결 여부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관심은 고위 공직자의 충원 구조에 대한 것이다. 위장 전입인지 아닌지, 제대로 인사 검증을 했느니 못했느니, 그 미시적 조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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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과정이 더 중요하다

대통령이 내년 지방 선거 때 개헌을 하자고 제안한 후 개헌 논의가 확산하는 분위기다. 무엇보다 국회 개헌특위가 내년 2월까지 개정안을 만든다고 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국회는  분과별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시민토론회까지 개최하는 중이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누구든 첫째 관심은 새로운 헌법에 무슨 내용이 담길 것인가 하는 것. 우리는 이미 2014년 10월에 사회권적 기본권을 강화하고, 그런 맥락에서 ‘건강권’을 적극적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기본 방향을 주장했다(서리플 논평 ‘새로운 헌법의 조건’ 바로 가기). “우리는 개헌 논의를 통해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다시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건강권은 상세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국가의 의무도 당연히 따라간다….(중략)… 소득, 교육, 고용, 노동조건, 환경, 주거…기본권마다 더 자세한 권리의 목록을 포함해야 하고, 국가의 책임을 분명히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조건과 환경이 바뀌었으니, 권리의 ‘최저’ ‘기본’ 또는 ‘적정’의 수준도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이 의견은 지금도 유효하다. 마침 국가인권위원회가 비슷한 취지에서 ‘기본권 보장 강화를 위한 헌법개정안’을 만들고 며칠 전 토론에 붙였다(국가인권위원 보도자료 바로 가기). 일단 방향을 이렇게 잡은 것을 환영하고 더 활발한 논의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기본권 강화가 개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논의는 또 있다. 지난주 6월 29일부터 7월 1일까지 제주에서 열린 ‘제주인권회의’에서도 ‘개헌과 인권’이 핵심 주제의 하나로 다루어졌다(한국인권재단 공지사항 바로 가기, ‘한국 사회 인권을 말한다…제주인권회의 열려’ 기사 바로 가기). 인권과 기본권을 강화하는 헌법 개정이라야 시민의 삶이 실질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공통된 인식이 논의 배경이 되었으리라. 헌법 개정안은 지금도 ‘구성’되는 중인만큼 결과를 속단할 수 없다. 다만, 현재 논의 정도와 수준을 고려할 때 기본권이 얼마나 강화될 수 있을지, 솔직히 걱정이 앞선다. 기본권 중에서도 이른바 사회적 기본권(또는 ‘사회권’), 그리고 우리의 관심인 건강권은 더 불확실하다. 이 논평은 주로 건강권에 관심을 두지만, 다른 사회적 기본권도 근본에서는 ‘오십보 백보’가 아닌가 싶다. 사회적 기본권으로서 건강권이 크게 진전되기 어렵다는 것은 국가인권위원회의 개정안에서도 드러난다. 이 개정안은 건강권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모든 사람은 건강을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 질병 예방과 보건의료체계의 향상 등 구체적인 내용은 법률로 정한다.” 개정안이 기존 헌법 조항(“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보다 한 걸음 나아간 것은 분명하나, ‘건강을 향유할 권리’는 여전히 추상적이고 선언적이다. 질병 예방과 보건의료체계의 향상 등을 법률로 미루었으니, 국가의 책무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한계가 명확하다. 국회 개헌특위가 마련한 개정안 초안도 건강권이 획기적으로 강화되었다 하기 어렵다. 특위의 분과에서 만들었다는 초안의 건강권 조항은 다음과 같다. “모든 국민은 적절한 보건, 의료 서비스를 보장받을 권리가 있으며, 국가는 국민의 건강 증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이 초안은 건강권을 건강이 아니라 보건, 의료 서비스를 보장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국가의 책무는 ‘의무’가 아니라 ‘노력’하는 것에(전통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 조항만으로는 새로운 헌법도 건강권을 보장하는 실질적인 지침 노릇을 하기 어렵다. 시민사회단체가 제안하는 건강권은 훨씬 적극적이다. 예를 들어 참여연대가 중심이 된 ‘개헌과 사회권 토론회’(2017년 5월 24일)에서는 다음과 같은 초안이 제안되었다. ① 국내에 합법적으로 거주하는 모든 사람은 정신적 및 육체적 건강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개인의 경제적 부담능력에 따라 건강권이 침해되지 않는 수준의 적절하고 합리적인 의료보장 및 공공 보건서비스 및 관련 제도를 실시할 의무를 진다. ②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공공책임 하에 제1항의 의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충분한 공공의료를 확충하여야 한다. ③ 국가는 질병 및 사고를 당한 생활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생명 또는 신체의 중대한 위험에 직면한 긴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적절한 의료보장을 실시하여야 한다. 분명히 나아진 것이나 우리는 이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건강권은 보건의료 서비스나 의료보장제도에 대한 권리를 넘어 누구나 건강한 상태(결과)를 누릴 수 있는 권리여야 한다. 최근 ‘사회적 결정요인’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잘 알려진 만큼,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소득, 교육, 노동, 고용 등도 권리의 대상에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사회적 기본권에 ‘개입’하는 것이 당연하다(다음 글을 참조할 것. ‘개헌과 건강권’ 바로 가기). 국가의 책무도 더 적극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사회권에 대한 국가 책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샌드라 프레드먼의 주장에 동의한다. 권리를 모두 충족하지 못해도 또는 그 권리를 충족하기 위한 의무가 아무리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그것이 의무를 소홀히 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즉, 권리가 충족되는지와 무관하게 (국가의) 의무는 존재한다(샌드라 프레드먼 지음, 조효제 옮김. <인권의 대전환>, 교양인 펴냄). 적극적으로 건강권을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지금은 건강권이 선언 수준 이상으로 규정될 가능성이 적다는 점을 인정한다. 헌법 개정과 그 방향이 상황과 맥락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면, 건강권을 보장하는 수준은 시민과 대중이 이해하고 참여하며 논의하는 것 이상으로 ‘돌출’할 수 없다. ‘사회적 이해’의 수준을 고려하면 건강권(나아가 사회적 기본권)에 대한 강한 지지와 옹호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취약한 사회적 이해 또는 기반 때문에라도 내용을 넘어 헌법 개정의 ‘과정’을 다시 꺼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부 집단과 정치인이 아니라, 대중과 시민이 개헌 논의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2016년 7월 18일 <서리풀 논평> ‘시민이 이끄는 개헌 논의를’ 바로 가기). “우리는 개헌이 목표로 하는 헌법 내용보다 그곳에 이르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중략)…누가 개헌을 이끌고 과정을 지배하는 주체인가? 형식적 절차를 준수해야 한다는 뜻보다는 헌법이 실질적인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 논의가 민주적이고 참여적일 때, 결과로서의 헌법은 비로소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시민이 만들어가고 또 만들어내는 헌법, ‘시민의 헌법’이 필요하다.” 과정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거듭 주장한다. 어떤 형식과 절차든 기본권, 사회적 기본권(사회권), 건강권을 배우고 논의하며 요구하는 것이 더 좋은 헌법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시민회의, 만민공동회, 시민행동, 그 무엇이든 좋다.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토론하고 요구해야 한다. 농민, 어민, 비정규 노동자, 아동, 소수자의 목소리를 들어 담지 않고 어떻게 개헌을 논의할 수 있단 말인가? 건강권도 마찬가지다. 삼성반도체 건강 피해 노동자, 핵발전소 주변 주민, 홈리스와 쪽방 거주자, 비정규 노동자, 섬에 사는 노인이 건강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알지 못한 채 건강권을 규정할 수 있을까? 건강을 잃은 사람들 그리고 불평등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따질 수 있을까? 더 많이 참여하고 어떤 소리라도 내고 듣는 민주적 개헌이 필요하다. 시간이 모자라면? 꼭 내년 4월에 개헌을 해야 할 급박한 이유가 있는가? 필요하면 시기를 늦추고 차분하게 그러나 치밀하게 논의해야 더 좋은 헌법을 가질 수 있다.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장담할 수 없으니, 더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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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가뭄, 기후변화의 증거인가

    어느 지역을 가릴 것 없이 가뭄 피해가 크다. 충남 서북부 등 일부 지역에서는 저수율이 0%가 되어 기능이 정지된 저수지가 속출한다니, ‘최악의 가뭄’이란 표현이 빈말이 아닌 모양이다. 어떻게든 농사 피해를 줄이는 것이 큰 걱정거리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냥 걱정이겠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생계가 달린 중대사가 아닌가. 정부는 가뭄 대책뿐 아니라, 곧 현실이 될 가뭄 피해를 어떻게 할지 미리 생각하기 바란다. 뉴스에 늘 나오는 것 같지만, 가뭄에 대한 관심과 의제는 보편적인 것이 되기 어렵다. 농사짓는 사람이 아니면 급수 제한, 상수도 정도가 문제일까 직접 영향 받을 일이 거의 없다. 아직은 대부분 지역에서 수도가 멀쩡하니, 걱정은 간접이고 추상이다.   일부만 관심을 보이는 문제면 정부와 사회가 힘을 모아 대응하는데 동력이 달린다. 대처 방식도 몇 가지, 그것도 당장 효과가 있을 법한 기술적인 방법밖에 없다. 예를 들어 굴착과 양수기 같은 전통적 방법들이다. 일이 벌어질 때마다 ‘항구적’ 대책을 마련한다 하나, 그때뿐이다. 그나마 수계연결이나 추가 용수원 확보, 댐 만들기 같은 (때때로 저의가 의심스러운) 토목 패러다임. 가뭄이 있을 때마다 비슷한 대책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그 일조차 지지부진인 모양이다.   오늘 우리는 가뭄으로부터 기후변화를 생각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이를 정치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피해에 대한 대응(부분)에서 ‘기후변화’의 정치(보편)가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언뜻 별개의 문제거나 관련이 있더라도 꽤 먼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근본에서 두 문제가 (완전히) 만난다고 생각한다.   첫째, 현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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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그렌펠타워 참사의 교훈

    외국 일은 사건, 선거, 그도 아니면 한국 관련 뉴스만 단편적으로 다루는 한국 언론도 런던의 대형 화재에는 좀 더 관심을 기울이는 분위기다. 14일 런던에서 일어난 큰불은 피해 규모와 사고 원인, 정부의 대처가 모두 뉴스거리가 되었다. 아무래도 한국 상황이 겹쳐 보이는 것은 아닐까?   우선, 피해 규모가 크다. 6월 18일 현재 사망자가 최소 58명으로 추정되고,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런던에서 일어난 화재로는 최악이라고 한다. 막연히 ‘선진국’으로 알던 영국, 그것도 수도 한복판에서 이런 큰 사고가 난 것이 놀랍다.   사고에 대한 대처도 말이 많다. 영국 정부는 불나고 12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내각회의를 소집할 정도로 늑장을 부렸고, 총리는 사고가 난 지 33시간 만에 현장을 찾았다. 그나마 피해 주민은 얼굴도 보지 않은 채 떠났다고 한다.   총리가 현장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만, 총리의 행동은 영국(또는 잉글랜드)이라는 국가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잘 보여준다. 앞으로 어떻게 피해를 수습하고 어떤 대책을 내는지 유심히 볼 일이다. 한국 사람들이 어떤 ‘기시감’을 느끼고 일부 한국 언론이 ‘세월호 참사’를 불러내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화재 원인에 이르면 더 익숙한 풍경을 만난다. 외국 언론들은 그렌펠타워 참사의 직접적 원인으로 엉터리 리모델링 공사를 지목했다. 불에 약한 싸구려 재료를 외장재로 써서 불을 걷잡을 수 없이 키웠다니, 한국인에게 이런 스토리는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그다음도 마찬가지, 리모델링에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없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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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창출과 환자 돌봄의 ‘정상화’

  새 정부가 ‘일자리’를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대통령 직속 위원회를 따로 설치하고 수석비서관 자리도 만들었으니 ‘최우선’이란 말이 빈말은 아닐 터. 대통령 집무실에 상황판까지 설치했다니 적어도 그 관심은 느낄 만하다.   정부는 우선 돈(추가경정예산)을 들여 공공부문과 사회서비스 분야에 직접 일자리를 만들기로 했다. 지난 5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추경예산은 11조 2천억 원 규모. 공무원 1만 2천 명을 포함해 공공부문 7만 1천 개, 민간부문 3만 9천 개 등 약 11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한다.   국회에서 티격태격하느라 어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예상대로(!) 정책 아이디어는 새롭지 않다. 일자리가 더 나올 곳은 공공부문과 보건을 비롯한 사회서비스뿐이라는 오랜 논의 그대로다.   “사회서비스 일자리에 전폭적인 재정 투입이 예고됐다. 정부는 직접일자리 창출을 위한 예산 2000억원 가운데 1500억원을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에 투입해 2만4000명의 인력을 채용할 계획이다….(중략)…사회서비스 일자리는 보육, 보건, 요양, 사회복지 등에 집중돼 있다. 보조교사(4000명), 대체교사(1000명), 치매관리(5100명), 노인돌봄서비스(600명), 아동안전지킴이(3100명), 산림재해일자리(4000명) 등의 분야에서 인력이 확대된다.”(기사 바로가기)   새로 만들겠다는 일자리는 누가 봐도 상식적이다. 꼭 이 정부와 이 정책이 아니라도 오래전부터 사람이 더 필요한 분야고 일이라 했다. 좋은 사람을 얼마나 많이 쓰는가에 따라 품질이 달라지는 일이기도 하다. 노인 인구와 저출산 등 사회가 변화하는 방향을 보더라도 늘려야 하는 일자리다.   일자리 정책을 둘러싼 논란은 접어두자. 다만,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시장)의 역할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 해야겠다. 시장이 일자리를 창출하는 주역이라는 것을 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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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국가책임제’를 환영한다. 그러나…

  우선, 지난 주말 여러 언론이 같이 보도한 것 한 가지(바로가기).   문재인 대통령이 2일 ‘치매 국가책임제’를 재차 언급하고 이달 말까지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마련하라고 지시함에 따라 국가 차원의 치매 종합대책이 곧 가시화할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이날 세곡동 서울요양원을 방문해 치매 환자와 그 가족들을 만나 “치매 관련 본인 건강보험 부담률을 10% 이내로 확 낮추겠다”고 약속했다….(중략)…   모든 치매 환자가 요양등급을 받을 수 있도록 등급제를 확대하고, 현재 47개에 불과한 치매지원센터를 250개 정도로 대폭 늘리겠다고 문 대통령은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또 치매 요양보호사 처우 개선과 방문 서비스 강화, 치매 관련 예산 2천억원 추경 반영 등도 약속했다.   치매 환자에 대한 국가 관리가 강화될 모양이다. 공약에 포함된 내용을 대통령이 취임 후 다시 강조하고 현장까지 방문했다. 이만하면 정책 의지를 충분히 표현한 셈이니, 정부와 공무원이 열심히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우리는 치매 환자를 더 잘 관리하고 가족의 부담을 줄인다는 방향에 원칙적으로 찬성한다. 재정이나 서비스에 국가가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에도 이견이 없다. 치매 환자는 이미 70만 명이 넘었고, 노인이 늘어날수록 환자 수가 가파르게 증가할 것이다.   치매는 가족의 돌봄 부담이라는 면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는데, 실재하는 것이든 상징이든 지금 한국에 사는 개인과 사회가 부담을 느끼는 질병으로 치매에 비길 만한 것은 찾기 어렵다. 치매 돌봄의 사회화와 국가 책임을 요구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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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복지법을 ‘공공보건의료’ 강화의 기회로

  과거의 ‘정신보건법’을 대신한 ‘정신건강복지법’이 일 년의 준비를 거쳐 5월 30일부터 시행된다. 1995년 정신보건법이 처음 만들어졌으니, 20여 년 만에 법이 바뀌는 셈이다. 새로운 이름 그대로, 정신질환과 정신장애를 가진 이들의 복지가 증진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제목에서, 또는 이 정도에서 이 <논평> 읽기를 멈추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나하고는 무관한 일이어서, 왠지 무겁고 답답한 주제여서, 전문가나 관심을 가질 일이어서 등, 여러 이유로 정신질환은 ‘배제’되어 왔다. 지금 그 생각을 잠시 멈추고, 약간의 시간을 내주기 부탁한다. 어떤 질병이나 사회문제인들 그렇지 않으랴. 관심과 논의가 환자와 보호자, 전문가, 공무원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면, 마땅히 사회적, 공적 과제가 되어야 하는 많은 것들이 개인과 시장에 맡겨진다. 어떤 건강문제 또는 사회문제와 비교해도 정신질환과 정신장애는 숨어들고 또 숨겨지기 쉽다.   이제라도 더 드러내고 밝혀야 한다. 다른 무엇보다 정신장애는 생각보다 많고 중요하다. 보건복지부와 국립정신건강센터에 따르면, 2011년 현재 정신장애의 평생유병률은 14.4%(니코틴, 알코올 사용장애 제외)에 이르고, 추정 환자 수는 368만 명을 넘는다 (바로가기). 입원 중인 환자 수와 진료비도 엄청나다. (건강보험이 아닌) ‘의료급여’ 대상자에 한정해도 2016년 한 해 약 3만 8천 명이 ‘조현병, 분열형 및 망상성 장애’로 입원했고 진료비는 4천억 원을 넘었다. 조현병 진료에 쓰는 건강보험 진료비만 한 해 3천억 원에 가깝지만, 그나마 환자 수(50만 명)의 20% 정도만 치료를 받는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가기).   정신질환의 특성상 인권을 둘러싼 논란은 중요한 질병 ‘부담’ 중 하나였고 지금도 그렇다. 새로운

서리풀 논평

시민의 힘으로 ‘개혁’ 청사진을

새 정부가 출범하고 열흘 남짓 지났다. 몇 가지 상징적 ‘개혁’을 발표했고, 우호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대통령의 새로운 스타일과 새로 임명한 사람들의 면면이 오래 묵은 답답함을 겨눴기 때문일 것이다. 환영하며, 새로운 변화와 개혁이 더 넓어지고 깊어지기 바란다. 대통령 중심제에서 대통령 자신과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이 중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미 시작한 ‘검찰 개혁’은 누가 어느 자리에 가는가 또는 무슨 수사를 다시 하는가를 떠나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언뜻 보기에 ‘개인기’에 의존하는 개혁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런 개혁도 큰 의미가 있다. 제대로 추진하면 많은 사람이 겪는 고통을 덜고, 다음 단계 더 크고 완고한 ‘구조’를 바꾸는 기반을 만들 수 있다. 근본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라는 이분법으로 볼 필요가 없다. 우리는 현상인가 또는 구조인가하는 이분법보다는 무엇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나, 누가 어떤 힘을 가졌는가, 또는 그런 힘을 어떻게 찾고 키울 것인가에 더 관심이 많다. 개혁과 변화를 둘러싼 정치적 기반이나 ‘권력관계’라 해도 좋다. 누구나 아는 대로, 새 정부가 가진 정치적 토대는 튼튼하지 못하다. 가시적이면서도 직접적인 ‘약한 고리’는 의회 권력이다. 다른 당과 힘을 합치지 않으면, 법 하나를 바꾸지 못하고 추경예산 편성도 불가능하다. 새 정부가 찬성 여론이 60%를 넘는 정책부터 추진하겠다는 것은 고육지책이다. 불리한 의회 권력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여러 정당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것은 당연지사, 이해관계의 방향이 일치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이 정부가 ‘실패’해야 정치적 기회가 온다면 정당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뻔하지 않는가. 다른 권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언론, 경제, 관료는 숨죽인 채 관망하고 있지만, 기존의 이해관계를 흔들면 언제라도 반(反)-개혁으로 돌아설 것이다. 이른바 ‘민주 정부’ 10년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모든 정부의 정책과 조치를 두고 같은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정권이 아니라 개혁의 권력관계! 이에 비해 변화와 개혁을 옹호하는 힘은 상대적으로 약하고 흩어져 있다. 대통령이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과제, 비정규 노동 개혁만 해도 그렇다. 정치권과 경제계, 학자, 노동조합, 언론, 그 모든 분야의 지형은 한쪽으로 치우쳤다. 드러내 말하지 않지만, 압도적 다수가 비정규 노동이 확대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어떤 이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물리적 토대를 넘어 역사, 문화, 윤리에 이르면 더욱 비관적이다. 내면화한 가치가 새로운 사회적 권력 관계를 만들 정도면(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참고할 것), 비정규 노동을 둘러싼 권력 관계는 좀처럼 변화를 허락하지 않을, 완고한 것이다. 아동수당, 기초연금이나 장기요양 확대도 비슷하다. 비정규 노동보다야 낫겠지만, 이 정도 복지를 추진할 권력도 토대가 튼튼하다 할 수 없다. 누가 얼마나 돈을 더 낼 것인가가 핵심 질문이라면, 이는 추가 재정 부담을 둘러싼 권력 관계를 그대로 반영한다. 보수 성향의 야당, 경제관료, 전경련과 경총, 보수 언론, 유명한 학자(특히 경제학 배경의), 여러 이름의 단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경제 상황을 외면하지 말아야” “실용적으로” 등의 주문이란, 완곡하지만 저항하는 권력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개혁적 복지 정책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권력도 허약하다. 목소리는 약할 뿐 아니라 흩어져 있다. 힘이 약하고 그나마 동요한다. 경제가 어렵다는데, 재정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라는데, 증세가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떨어뜨리면? 걱정하고 주저하며, 결국 후퇴하거나 침묵할 수도 있다. 결국, 권력 관계로만 보면 개혁이나 개혁적 정책이 성공하리라 장담하기 어렵다. 경제와 돈이 걸린, 사회경제적 개혁이 특히 더 그렇다. 시간이 가면서 정치적 ‘자산’이 줄어들면(기억, 여론, 지지 등), 사정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 우리는 어떤 정부나 정권의 성공과 실패 그 자체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다. 시민의 삶이 나아지고 사회(정치 공동체)가 진보할 수 있는가? 이 정권과 정부가 그 길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어떤 변화와 개혁이 이루어져야 하는가? 이런 맥락에서 정권과 정부를 이해하고 판단한다. 국가-경제-시민의 삼분법으로 권력 관계를 이해하면, 지금 개혁을 둘러싼 권력 지형에 ‘시민 권력’이 할 일은 분명해진다. 국가권력과 경제 권력에 영향을 미치고 압력을 가하며 ‘통제’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국가권력과 경제 권력이 시민의 힘을 의식하고 함부로 하지 못하게, 또는 시민과 사회 권력에 올라타게, 더 적극적으로는 시민의 의지와 뜻을 반영하도록 해야 한다. 시민사회의 역할은, 흔히 말하듯, 국가권력이나 경제 권력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국가-경제-사회 권력이 분립하여 상호작용하는 결과가 한 ‘국민국가’의 권력 구조라면, 사회 권력은 스스로 권력을 만들어내야 하며 국가 또는 경제와 긴장하고 겨루어야 한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터. 오늘 우리는 한 가지 시민 행동을 제안하고자 한다. 여러 정부 부처와 위원회의 계획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언론의 특집 기사에 기대를 걸 것이 아니라, 무슨 기업 연구소의 리포트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시민사회 또는 사회 권력, 무엇이라 불러도 좋다)이 개혁 로드맵을 만들고 전략을 짜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건강과 보건의료 같으면, 우선 시민사회(여러 개인, 단체, 조직, 연대 등)가 협력하여 개혁 과제를 고르고 갖가지 전략을 모색하는 데서 출발한다. 잘 되면 “건강권과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본 건강체제 개혁방안”과 같은 결과물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국가와 경제권력에 요구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어떻게 실천하고 강화해 나갈 것인가도 포함한다. 이 과정과 결과물은 다시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협력으로 이어지며, 비슷하면서도 새로운 ‘과정’으로 진화할 수 있다. 이런 구조와 과정(실천), 결과물이 모두 새로운 권력의 요소이며 또한 권력의 토대다. 이렇게 만들어진 권력은 국가권력 또는 경제 권력을 어떤 면에서는 강화, 지원하고, 또 다른 면에서는 반대, 저항, 통제한다. 협력과 연대, 경쟁, 반대와 저항. 상호관계는 중층적이고 복합적이다. 지금 새 정부(국가권력)가 제안하거나 제안하고자 하는 개혁적 정책이 성공하는 데에도 시민이, 그리고 시민이 만들어 나갈 사회 권력이 중요하다. ‘그들’이 아니라 ‘우리’의 몫이 크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서리풀 논평

새 정부가 ‘성공하기’를 바란다

  정권 교체와 새 정부 출범을 축하한다. 국가 권력은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아지는 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 국가 권력의 중추인 정권이 바뀐 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중요하다. 행정부와 국가 권력의 성격을 두고 그 주체가 누구든 ‘오십보 백보’ 차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나,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한 가지 이유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그 고통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아가려면 디딜 수밖에 없는 토대가 달라지는 것이다.   ‘진보’가 상대적 개념임을 전제한다면, 지난 정권에 비하여 이번 정권이 조금은 더 진보적일 것이라고 기대한다. 다만, 아직은 가능성일 뿐이다. 그 어떤 것도 정권의 성격을 저절로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이 아닌가. 더구나 진보의 기준이 기존 권력 관계 ‘구조’를 조금이라도 흔들어야 하는 것이면, 그럴 생각이 있는가는 차치하고라도 그럴 조건과 능력이 되는가를 물을 수밖에 없다. 앞으로 5년, 권력과 정권의 성격은 열려 있다. 그 모든 사회변동을 통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유동적인 것이다. 여러 가지 힘의 균형과 조건, 상호작용에 따라 어느 정도는 끝이 열려 있으니, 미리 구속할 필요가 없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지금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낙관도 비관도, 열광도 냉소도, 모두 경계한다. 다시 일상으로, 지루하고 고단한 삶으로 돌아갈 때,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우리가 더 중요한

서리풀 논평

대선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

  대통령 선거일이 이번 주 화요일, 5월 9일이다. 유권자의 26%가 사전투표를 했다니, 선거일이라기보다는 그날 선거가 끝난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선거 결과를 미리 점칠 수는 없지만, 어떤 후보가 되더라도 비슷한 과제가 남는다. 시민의 관점에서 다음 대통령과 정부에 몇 가지를 부탁한다. 스스로 다짐하는 것도 포함한다.   첫째, 이른바 ‘통합’에 대하여   선거 과정에서 거의 모든 후보가 ‘통합’을 주장했다. 다들 통합을 위해 가장 좋은 후보라고 자임했으나, 우리는 그 실체를 잘 모른다. 무엇을 통합한다는 것인지, 왜 그래야 하는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일반 시민은 이해하기 어렵다. 누가 당선되더라도 여소야대인 의회권력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을 모르지 않는다. 법 하나를 고치려 해도 큰 당 하나가 반대하면 잘 안 될 것이라고 한다. 이미 우리 사회가 집단으로 경험한, 그 악명 높은 언론권력의 지형은 또 어떤가? 지금 여러 후보가 말하는 통합이 그런 상황을 이기는 방도인가? 어떻게 하려고? 통합이 서로 다른 현실 정치세력이 권력과 자리, 자원(돈)을 나누는 것이면, 그것은 시민의 삶과 아무 상관이 없는 ‘그들’만의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국무총리를 누가 하고 장관 자리를 어떻게 나누는 것이 국민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우리 당의 지지가 약한 지역에 무엇을 지어주고 무엇을 옮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지난 시기 나쁜 짓을 했지만 통합 차원에서 그냥 덮는다? 겨우 이런 뜻이면, 또는 ‘나눠 먹기’나 ‘야합’ ‘이합집산’을 뜻한다면, 우리는 그런 통합을 반대한다. 통합은 ‘국론 통일’이거나 두루뭉술한 중도,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