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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무엇을 안보 문제로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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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공식 명칭은 6.25 전쟁이다. 전쟁 복판에 만들어진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로 시작하는 ‘6.25의 노래’가 여전히 매년 6.25 기념행사에 울려 퍼진다. 정전 70년을 맞는 2023년에도 대한민국 대통령의 입에서는 맥락 가리지 않고 반공 메시지가 흘러나온다. 일본의 치안유지법을 모방하여 1948년 이승만 정부가 제정한 국가보안법은 75년이 지나도록 끈질기게 살아남아 노동조합과 시민사회 단속에 (다시) 쓰이고 있다.

 

현 정권 혹은 현 시대 한국 국가와 사회에 대한 여러 진단이 있다. 검찰국가, 감시사회, 단속사회, 혐오사회… 6.25 이튿날인 오늘, ‘안보’와 ‘안보화’를 되새긴다. 틈만 나면 국가안보와 반공을 부르짖는 대통령과 여당의 언행을 시대착오적이라 비판하기는 쉽지만, 새로운 시대 다시 등장한 오래된 담론은 그 시대의 맥락에 맞춰 다시 고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바야흐로 모든 사회 문제가 안보 문제로 환원되는 시대다. 정치화 단계를 넘어 안보화에 이르면, 해당 문제는 이제 한두 가지 정책으로 해결할 대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총동원체제의 대상이 된다. 정부, 정권은 손쉽게 사람들을 감시, 단속하고 나아가 구금, 구속, 추방까지 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기실 이 정권이 제시하는 안보 문제와 그 해결책은 반북에 그치지 않는다. 대표적 사례가 반중이다. 최근 여당 인사들은 중국의 내정간섭 가능성, 한·중 관계 재정립 필요성을 주장하며 중국 국적 주민의 지방선거 투표권을 제한하겠다 공언하고 있다. 건강보험도 함께 불려 나왔다. 무임승차를 막기 위해 피부양자 범위를 제한하겠다는 내용이 골자다. 반중 정서를 자극하고, 전임 정부 및 야당의 외교 노선과 대비되는 효과를 노린다는 게 중론이다.

 

나아가 정부는 코로나19 기간 불가항력으로 증가한 체류기간 초과 이주민 수를 줄이겠다고 올 초부터 연이은 강제 합동단속도 벌이고 있다. 내한한 태국 가수의 콘서트장, 예배중인 필리핀 이주민 교회에까지 들이닥쳤고, 미등록 체류 신분인 부모의 3세, 6세 자녀를 동반 구금하는 끔찍한 만행까지 저질렀다.

 

이주단체들은 국내 이주 역사를 통틀어 전례 없는 무리수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연초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미등록 이주민 수를 5년 안에 절반으로 줄이겠다 공언한 법무부 장관의 정치적 드라이브라는 해석이 많다. 법무부는 “국민 안전을 위협하는 마약 등 외국인 범죄” “국민의 일자리 잠식 업종”을 집중단속 대상으로 제시하며 이주민을 범죄자 취급하는 동시에 반이민 정서를 적극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주민과 난민을 안보위협으로 호명하고 적대적 환경을 조성해온 역사는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미 오랜 일이다. 최근 그리스 남부 해안에서의 난민 보트 전복으로 인한 대규모 사망이 정부의 단속 과정에서 발생한 재해라는 생존자 증언에서 보듯이, 이주민과 난민 문제를 안보화하는 폐해는 명확하다.

 

이러한 폐해는 비단 이주민에서 그치지 않는다. 주지하듯이 9.11 테러 이후 테러리스트로부터 미국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벌어진 미국의 대테러 안보 정책은 해외 유입 외국인 뿐 아니라 자국 내 외국 국적 주민, 나아가 미국 국적 주민에까지 전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외부의 안보위협은 손쉽게 내부 치안단속의 구실이 됐다.

 

한국 정부에게 북한과 중국이 여전히 든든한 외부의 적이라면, 이주민은 새롭게 발견한 내부의 적이다. 때로는 중국 국적 이주민, 때로는 미등록 이주민이 그 대상이다. 수많은 문화 콘텐츠, 언론기사에서 재연되는 것처럼 이들은 사회의 치안을 위협하는 범죄자일 뿐이다.

 

안보화가 당사자를 넘어 전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은 건강 렌즈를 통해 보면 더욱 명확하다. 전쟁, 항구적 전시상태가 야기하는 건강 영향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미등록 신분의 이주민이 놓인 일상적 감시와 단속, 구금과 추방의 위협은 당사자의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넘어 전 사회적으로도 두려움과 불신, 차별과 혐오를 확산한다.

 

코로나19 팬데믹,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동반된 전 지구적 공급망 붕괴와 식량·에너지·경제위기는 감염병 유행과 같은 공중보건 위기, 나아가 건강 문제를 안보로 바라보는 시각에 힘을 실었다. 좀처럼 정치화되지 않는, 통치의 위협으로 인식되지 않는 건강 문제, 특히 그것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기원을 환기하고, 통상 수준 이상의 발언권과 자원배분을 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안보화에는 장점도 있을 수 있다.

 

반면 안보화 프레임이 갖는 단점도 명확하다. 안보의 문제로 호명된 이슈는 연대의 정신보다는 이기심과 공포에 근거하기 때문에 민주적인 의사소통과 합의보다는 국가와 전문가에 의한 하향식 논의와 실천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 혹은 통치의 의제로서의 갑작스러운 부각 역시 기존의 오랜 사회적 논의를 무시하고 자원배분을 왜곡하거나, 권력불평등을 강화할 수 있다. 건강과 보건을 말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정치경제적 수단으로 건강과 보건이 동원되는 점, 무엇보다 전통적 국가안보를 넘어서 산업안보, 경제안보를 내세우면서 기업의 역할과 권한이 확대되는 점이 그렇다.

 

전통적 안보인 국가안보와 비전통적 안보인 인간안보는 다르다는 식으로 안보 개념이 확장된 맥락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안보라는 개념이 갖는 근본적 속성은 다르지 않다. 위협으로부터의 보호. 위협이 되는 대상과 보호의 대상이 다르고, 보호의 주체 역시 다르다. 70년째 정전 상태에 놓인 한국의 역사 사회적 맥락으로 보면, 안보 담론은 그것이 가진 외포와 내연이 제아무리 확장되어도 근본적으로 가진 한계가 있다.

 

보건안보라는 프레임이 정치적 힘을 얻는다면, 그것은 과연 사람들의 고통이라는 입장에서도 유의미한가. 여전히 통치 관점은 아닌가. 인간안보라는 담론이 등장했지만, 우리는 과연 그것을 안보라고 부르고 싶은가. 혹은 안전보장이라고 바꿔 불러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을 살리고 죽이는 일에 (국가)안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정책, 나아가 통치 행위가 경제 권력을 살찌우고 사회 권력을 탄압하는 기전을 더 예민하게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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