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연구통

환자 관점에서 환자 ‘중심’ 병원이란?

36회 조회됨

 

권시정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종합병원을 홍보하는 문구 중 ‘환자 중심 의료’, ‘환자 중심 병원’이라는 말을 한 번쯤 접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다음은 한 민간 종합병원의 홍보 자료에서 가져온 단어들이다. “연 ○명이 찾는 병원”, “환자 중심의 최첨단 의료기관”, “세계 최신 로봇수술 도입”, “각종 적정성 평가 1등급”, “수술 잘 하는 병원”. 과연 이것이 환자의 관점에서도 ‘환자 중심’일까?

 

‘환자 중심 병원’의 의미를 정의하기란 정작 환자 당사자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은 환자’와 ‘나쁜 환자’의 구분이 일종의 상식으로 통용되며 환자들의 말과 행동을 규율하기 때문이다. 의료진의 지시에 순응적인 환자가 ‘좋은 환자’고 불평과 불만이 많은 환자는 ‘나쁜 환자’라는 게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암묵적인 상식이다.

 

이러한 상식은 환자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묻거나 불만을 표현할 때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든다. 다음에 또 진료를 받아야 하는데 혹여 너무 까탈스럽게 보일까봐 “이 질문을 해도 될까?” 망설이는 것이다.

 

이는 실제 병원과 의료계가 불만을 가진 환자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반영된다. 모 의료학회의 학술대회에서는 ‘불만 환자’에 대한 법적 대응 매뉴얼을 강연하기도 했다(☞관련기사: 바로가기). 심지어 어떤 병원 마케팅 업체는 ‘불만 환자’를 VIP 고객으로 만들어 병원의 성장을 돕겠다고 홍보하기도 하는데, 이때 환자의 불만은 관리의 대상이자, 수익성 증대의 기회로 여겨진다.

 

최근 스웨덴의 한 연구팀은 국제 학술지 <사회과학과 의학>에 환자들이 진료 과정에서 구두로 표현하는 비공식적 불만을 환자 본인과 의료 전문가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하는지를 분석한 논문을 게재하였다(☞논문 바로가기: ‘투덜거림’의 경계에서 일하기: 환자와 의료 전문가는 비공식적 불만 관행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특히 이들은 흔히 한국어로는 징징거림, 또는 투덜거림(whining)이라고 번역되는, 피해야 할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비공식적 불만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이를 위해 총 19명의 환자와 15명의 의료인을 대상으로 개별 및 집단 면담을 실시하였다. 연구 결과, 환자와 의료 전문가들이 이러한 불만의 타당성, 시간성, 그리고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의 정체성에 따라 복잡한 경계를 설정하고 협상하는 방식을 주제로 도출했다.

 

첫 번째 주제는 불만의 타당성을 협상하는 방식이었다. 환자들은 자신의 불만이 의학적 사실이나 개인적 필요에 기반하며, 정당하다는 것을 의료진에게 입증하려고 했다. 면담 참여자는 자신이 이미 이 문제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는 것을 보였을 때, 더 나은 대우 받았다고 느꼈다. 반대로 자신의 걱정 사항을 의료 전문가의 어휘나 이해에 맞추지 못할 경우, 환자의 불만은 타당하지 않다고 여겨질 위험에 놓였다. 한편, 의료 전문가들은 환자의 불만이 자신들의 전문적 책임 범위 내에 있을 경우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그러한 불만이 불안이나 슬픔으로 인한 것이라고 판단할 경우 자신의 책임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했다.

 

두 번째 주제는 불만의 시간성과 관련된 것이다. 환자가 반복적으로 명확한 목적 없이 같은 불만을 제기할 경우, 환자는 무책임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의료진이 아닌 관리자에게 인계되었다. 의료진이 생각하는 ‘좋은’ 비공식적인 불만이란 임상적으로 관련된 방식으로 포장된, 전체적 맥락을 포괄하는 메시지의 형태였다. 반면 환자들이 치료 과정에서 불만을 조각조각 나누어서 표현하는 경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고통은 본래 비선형적이며, 반복적이고, 다양한 감정, 사람, 장소와 얽혀 있기 때문에 명확하고 체계적인 메시지로 전달되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일부 환자들은 ‘투덜대는’ 환자라는 평가를 받는 것을 감수하고 약의 부작용에 대한 불만을 계속 토로했다. 이것이 미래의 환자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주제는 불평하는 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환자들은 ‘타당한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과 ‘투덜거리는 사람’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잡고자 했다. 환자들은 가능한 ‘투덜거리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싶어 했다. 좋은 환자로 인식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다양한 기술과 특성을 전략적으로 동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을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투덜거리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활용했다. 한 면담 참여자는 자신이 공식적으로 불만을 제기한 기록을 의료진들이 읽은 후, 대우가 더 나아졌다고 말했다. 많은 환자들은 불만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지식, 전략, 기술이 부족한 이들이 ‘투덜거리는 사람’으로 간주되어 중요한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이 연구는 의료 현장에서 환자의 비공식적인 불만과 투덜거림의 경계선은 의사와 환자 간의 복잡한 협상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협상은 ‘좋은 환자’와 ‘나쁜 환자’라는 규범을 기반으로 한다. 이 규범과 경계선이 의사-환자의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영향을 받는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환자 중심 병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환자 중심 병원이란 단지 최신 기기를 도입하고, 친절하며, 많은 환자가 찾아 수술 건수가 높은 병원이 아니라, 환자들이 자신의 치료에 참여하고, 불만과 비판을 권력관계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안전한 병원이라는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서지정보

Brüggemann, J., Nedlund, A. C., & Guntram, L. (2025). Working the boundaries of ‘whining’–how patients and care professionals make sense of informal complaining practices. Social Science & Medicine, 118112.


 

 

시민건강연구소 정기 후원을 하기 어려운 분들도 소액 결제로 일시 후원이 가능합니다.

추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