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새 정부가 들어선 지도 한 달이다. 지난 정부가 남겨놓은 악조건 속에서 대통령과 참모들이 여러 현안을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가운데 대통령은 30일만에 첫 공식 기자회견을 열고 두 시간 가량 언론의 질문에 답하기도 했고, 타운홀 미팅 등 여러 기회를 통해 다양한 메시지를 내놓았다. 그 메시지들이 실제 중요한 현안들을 다루고 있기도 해서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으나, 우리는 대통령이 ‘하지 않는 말’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 중에는 ‘보건의료’와 ‘돌봄’이 있다.
이번 정부는 아직까지 보건의료와 돌봄에 대한 비전을 전면에 내놓지 않는다. 처음부터 보장성 강화를 포기한 윤석열 정부는 논외로 하고(그도 ‘필수의료 국가책임제’를 말하기는 했다), 문재인 정부는 이른바 ‘문재인 케어’, ‘치매국가책임제’ 등을 강조했다. 박근혜 정부 역시 ‘의료비 걱정 없는 건강한 세상’이라는 슬로건 아래 ‘4대 중증질환 국가 보장’ 등을 내세웠다. 그것의 의도나 이행 여부, 과정, 결과 등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는 시기에는 보건의료에 대한 주요 슬로건 수준의 방향성은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이번 정부는 의료 개혁, 공공의대, 디지털 헬스케어 등 여러 보건의료 공약들을 언급해왔음에도, 현재까지 이를 총망라하는 뚜렷한 방향성이나 비전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지금 유일하게 언급되는 것은 ‘의정 갈등’과 전공의·의대생 복귀 문제다. 지난 취임 첫 공식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은 의대생이 복귀할 수 있는 상황을 정부 차원에서 많이 만들어 내겠다고 하고, 이어진 회의에서는 ‘가장 어려운 의제로 생각했던 것이 의료대란 문제’라 언급했다. 의료대란 해결은 이재명 정부와 이 사회가 당면한 어렵고도 중요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사안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의사 집단의 근본적 성찰 없이, 의정야합을 통해 일종의 승리의 경험을 만들어 준다면, 향후 한국 보건의료체계를 개선하는 과정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의료대란 문제 해결은 쉽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잘해봐야)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여전히 수많은 구조적 문제가 쌓여있다. 이전 정부가 의료 개혁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지역의료 붕괴, 필수의료 공백, 돌봄 체계 부재 등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으며, 상황은 더 절박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새 정부가 뚜렷하게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의료대란 수습 이외에는 그저 윤석열 정부가 하던대로 흘러가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보장성 강화보다는 재정건전성을 이유로 의료접근성을 오히려 후퇴시키고, 보건의료와 돌봄을 산업 성장의 도구로만 접근하면서 건강권을 침해하는 방향 말이다. 의료급여 정률제 개악도 대통령실에서 개입하기 전까지는 하던 대로 추진하지 않았던가(관련기사 바로가기).
그렇다면 정부는 왜 건강과 보건의료, 돌봄의 비전과 방향성을 제대로 언급하지 않는 것일까. 다른 더 급한 사안들이 있으니까? 실제로 한국 사회가 당면한 시급한 문제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정부는 언제나 여러 현안을 동시에 다룰 수밖에 없고, 보건의료와 돌봄 이슈 역시 시급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정부가 의도적으로 문제화 하지 않거나 그 시기를 늦추는 것은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그 배경에는 의정갈등이 있는 것 아닐까 짐작한다. 1년 반 동안 의료계와 실질적인 대화조차 하지 못하던 가운데 협상이 가시화 되는데, 다른 의료개혁 이슈들이 튀어나온다면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모른다. 모처럼 의정 갈등을 해소할 실마리가 보이는 상황에서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는 이것만이 아닐 것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새 정부의 실제 기조도 윤석열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산업의 관점과 재정건전성을 우선시하는 것 말이다. 공약에 이어 국정기획위원회 보고서에서도 바이오·헬스케어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육성하겠다는 구상이 담겼다. 또한 AI 3대 강국 진입을 주요 과제로 꼽은 가운데, ‘의료, 금융 등 민감한 개인정보를 다루는 분야에서도 데이터를 결합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규제 정비’를 하겠다며, 규제 완화도 명시했다(관련 보고서 바로가기). 국정 과제를 만들어내는 위원회의 활동이 다음달 말까지로 기한이 많이 남았으나, 현재로서는 우려가 더 크다.
정부가 인선한 보건복지부 차관과 식약처장도 같은 방향을 암시한다. 유임한 식약처장은 윤석열 정부에서 기업의 편에 서서 의약품과 의료기기 규제 완화를 주도했고, 복지부 1차관 역시 전 정부에서 연금개악을 추진하는 동안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에 노동계 위원을 위촉하지 않으면서, 민주적 절차와 공공성을 훼손했다. 2차관은 박근혜 정부 당시 전방위적 보건의료 영리화 정책을 추진했던 인물이었다(관련논평 바로가기). 이처럼 큰 틀에서 방향과 비전에서 이전과 뚜렷한 차이가 없다면 지역의사제나 공공의료 사관학교 등의 논의가 등장하더라도, 시장 중심 의료체계가 낳은 고통을 완화하는 데 그 효과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이처럼 보건의료와 돌봄에 대해 말하지 않는 현실은 단지 정책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경제성장과 기술혁신 담론이 건강권 담론보다 앞서는 현재의 담론 구조, 그리고 의료전문가와 공급자가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권력 지형 속에서 시민과 환자의 목소리가 주변화되는 현실을 드러낸다. 언론 역시 의료대란과 같은 공급자 중심 이슈 외에는 시민들이 일상에서 겪는 건강과 돌봄의 고통에 대해 정부에 묻지 않고, 크게 이슈화 하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시민사회는 사람들의 고통을 규범을 넘어 삶 속의 언어로 조직해내고, 시민이 스스로 건강권의 주체로 나설 수 있도록 하여, 정부가 응답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정부는 타운홀 미팅에서 대통령이 말한 “필요한 게 무엇인지 그 사람들 입장에서 발굴하는 게 중요”하다는 언급을 단순한 수사로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 시민과 환자의 고통과 요구야말로 정책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런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그 고통에 응답하고 ‘생명보다 돈이 우선’인 체계에 맞설 분명한 비전과 실행계획이다. 새 정부는 윤석열 정부와는 다른 길을 선택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