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후 국민이 기대하는 정부(곧 국가라도 말해도 좋다)는 중립적이고 공평한 정부다. 어느 특정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갈등과 반목을 줄이는 ‘권위’ 있는 조정자를 원한다. 기댈 데 없는 약자가 의지할 수 있는 ‘보호자’ 노릇을 바랄 때도 많다.
물론 이런 기대가 허망한 ‘착각’이란 비판은 오래 되었다. 국가가 계급적 이해관계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19세기적 인식이 대표적인 것이다. 물론 그 때와 마찬가지로 국가를 한 사람의 순수한 인격체처럼 단선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지나고 세계 자본주의의 모습이 그 때와는 영 딴 판이 된 지금도 국가의 편파성은 여전하다. 의뭉스러운 속을 알아차리기는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법률과 제도를 앞세우고 겉으로는 좋은 말만 하니 말이다.
어느 때보다 복잡하지만 그 변함없는 치우침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오늘 일차적 관심이 아니다. 차분하고 정확한 분석도 필요하지만 당장의 현실이 더 급하다. 국가와 정부가 최소한의 공정성도 내버린 채, 대놓고 편들기에 나서고 있어서다.
이런 편들기가 또한 피해와 고통의 편 가르기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다시 조금 더 익숙한 말로 바꾸면, 이익은 개인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는 것. 바로 ‘이중적’인 의미에서의 편 가르기다.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밀양 송전탑 사태도 그렇지만, 새해 초부터 사회적 관심이 뜨거운 ‘민영화’ 논란이 국가와 정부의 성격을 다시 묻는다. 맞춤 교과서라고나 할까. 국가는 누구를 위해, 또 무엇을 위해 저렇게 하는가.
의료 영리화 문제에서 이 질문은 더 직접적이다. 모두 알다시피, 문제가 촉발된 것은 정부가 내놓은 ‘투자활성화’ 대책이었다. 바로(!) 제목부터 편파적이다. 바탕에 깔린 문제 의식과 방향이 저절로 드러난다.
내용도 마찬가지다. 투자에 모든 것이 맞추어져 있고 나머지는 모두 부록에 지나지 않는다. 온통 부작용을 어떻게 막고 보완을 어떻게 하겠다는 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중심은 어디까지나 투자와 돈벌이라는 소리다.
더 큰 문제는 숨겨져 있다. 이른바 ‘주류’ 정책학조차 좋은 정책이 되자면 이것이 명확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한다. 바로 정책의 목표와 대상이다. 일부러 그리 했겠으나, 이번 정책(KTX 민영화도 다를 바 없다)은 목표와 대상을 얼버무려 놓았다. 한참 생각해 봐야 겨우 짐작이라도 할 수 있다.
누가 보더라도 정책목표와 정책대상은 중요하다. 목표가 없거나 흐린 정책이 어떻게 제대로 될 것인가. 몇 번이고 목표가 바뀐(또는 숨긴) 이전 정권의 4대강 사업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정책 대상도 마찬가지다. 아니 정책 대상이야말로, 밝히든 숨기든 정책의 공정성과 편파성을 가르는 핵심 잣대다. 다시, 주류 정책학은 이렇게 말한다. “정책의 수혜 집단과 피해 집단, 그 중에서도 비용을 누가 부담할지”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의료 영리화 정책의 목표와 대상은 누구일까. 우선 목표가 의심스럽다. 투자 활성화라고 했으나, 최대한 좋게 봐도 이것은 정책목표를 이루기 위한 한 가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와 정부는 투자를 늘려 도대체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가.
장부의 수치로만 끝나는 경제성장률 올리기? 일인당 국민소득 3만 불? 새 일자리 창출? 도대체 무엇인가. 정부의 자료 안에는 영리 자법인을 통해 의료법인의 경영을 개선한다는 표현이 있다. 이것이 정책의 ‘최종’ 목표인가? 그럴 리 없다.
정책의 대상을 생각하면 더 한심하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진지한 정책 대상으로 고려되지 않는다. 누구에게 어떤 혜택이 있는지, 적어도 ‘수혜 집단’으로서의 시민은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의료법인과 새로운 투자자들뿐.
피해와 부담을 지는 쪽은 더 가려져 있다. 대책이 그대로 되면 의료법인의 경영이 좋아진다니, 누가 무엇인가를 더 부담해야 계산이 맞아 떨어진다. 4대강처럼 국가 예산을 퍼붓거나(이래도 국민이 부담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외국 사람에게 부담시킬 요량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누가 얼마나 피해를 보는지, 또는 무엇을 더 내놓아야 하는지, 일언반구 말하지 않는다.
정책을 만들고 죽을 힘으로 세일즈를 하고 있는 이 정부가 모를 리 없다. 이익의 독점과 손실의 사회화를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다른 곳으로 자꾸 초점을 옮기려고 한다. 예를 들어, 자꾸 건강보험을 포기하는 민영화는 아니라고 하는 것.
분명, 국가와 정부는 누군가의 편을 들고 있다. 그것도 편들 필요가 없이 스스로 잘 하고 잘 나가는 그 누군가를. 다음 사례를 다른 편에 놓고 보면 편파적이고 공평하지 못한 국가와 정책을 실감한다.
지난 해 국정감사에서 잠간 거론되었지만 금방 잊힌 일이 있다. 건강보험료를 6개월 이상 장기 체납한 가구가 2013년 8월 현재 153만 가구나 된다는 것이다(관련 보도). 전체 지역 가입자가 762만 세대라니 다섯 집 가운데 하나 꼴이다.
6개월 이상 보험료를 내지 않으면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여러 가지를 고려하더라도, 전문가들은 적어도 200만 명 이상이 이런 식으로 건강보험에서 제외되어 있다고 추정한다. 이들은 아파도 참거나, 약국에서 살 수 있는 약으로 때우거나, 또는 ‘불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는 사이 건강보험은 지난 해 11조원의 누적 흑자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것을 정부와 건강보험의 경영 ‘성과’로 봐야 할까. 아니다. 이미 경제 부처도 ‘불황형’ 흑자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좀처럼 경제가 회복되지 않고, 일자리도 크게 늘지 않는다. 정부가 광고하는 것과는 달리 보통 사람들의 소득은 제자리 걸음도 버겁다. 이처럼 살림이 어려우니 의료 이용도 줄어드는 것이다. 병원도 의원도 덜 간다(병의원의 경영이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또 다른 원인이다). 건강보험의 돈이 남을 수밖에.
그러나 국가와 정부는 공정하지 못하다. 이익을 키우라는 데에는 그토록 열성이면서, 돈을 더 벌게 하는 방법은 그렇게 정교하면서, 건강보험 혜택이 중지된 사람들, 아파도 병의원에 못가는 사람들, 이들에게는 어떤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손을 놓고 있는 것이다. 국가와 정부가 말하는 ‘국민’ 경제의 그 국민은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제 상식이 되었지만,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사람들을 죽게 만드는 것은 경제가 어려운 것 그 자체가 아니다. 정부의 ‘바른’ 정책이 더 중요하다. 공정한 국가, 정의로운 정부라면 이런 정책이 더 급하리라.
미국에서 대공황 시기만큼 경제가 어려웠던 때가 있을까만, 뉴딜 정책은 그 때 사망률은 물론 독감과 폐렴의 발생도 줄였다. 당시 소득이 반도 넘게 줄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상식을 벗어난다. 그러나 다른 묘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국가가 나선 긴급 구호와 보건사업이 실직과 가난의 저주를 막은 덕분이었다(데이비드 스티글러, 산제이 바수 지음. 안세민 옮김. <긴축은 죽음의 처방전인가>. 까치).
당시 미국의 사정도 그랬지만, 국가와 정부는 저절로 공정하고 정의롭지 않다. 어쩔 수 없을 때, 버틸 힘이 없을 때, 조금이나마 균형을 바꾸는 것이 아닐까. 그 힘을 키우는 것이 조금은 더 공정하고 정의로운 국가로 가는 방법이다.
지레 비관만 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자유의 역사는 발전해 왔다. 국가의 권력 균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간이 딱 그만큼 더 넓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틈을 찾고 영향을 미칠 만한 힘을 기르는 것이 보통 시민들이 해야 할 또 하나의 새해 과제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