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014년 4월 23일자 <건강렌즈로 본 사회> 원고입니다 (바로가기)
인류 역사에서 술은 오래도록 희로애락을 함께해 온 위안거리다. 하지만 많은 이들을 죽음과 고통에 빠뜨리기도 했다. 사실, 오늘날의 술은 집에서 빚어 가족이나 마을 사람들과 오순도순 나눠 마시는 소박한 먹거리가 아니다. 글로벌 독점 기업의 대량생산과 영업 전략에 따라 판매되는 특별한 상품이다. 한때 식량 부족 때문에 술 만드는 것을 금지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오늘날은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술도 여기저기 넘쳐난다. 특히 우리나라는 다른 국가들과 달리 24시간 어디에서나 술을 쉽게 구하고 마실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의 절제만으로 술 소비를 줄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음주자들한테 절주를 권하는 것만큼이나 술이라는 소비 상품의 유통과 판매의 규제가 필요하다.
이번에 소개할 연구는 이런 접근에 좋은 실마리를 제공한다. 테리사 마토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팀은 최근 <사회과학과 의학>지에 슈퍼마켓 판매대 어느 곳에 술을 두는지가 소비자들의 구매 결정에 영향을 끼친다는 내용의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연구팀은 영국의 한 대형 슈퍼마켓 체인에서 1년 동안 자료를 모았다. 슈퍼마켓 카트에 추적장치를 붙여 손님들의 이동 경로와 제품의 전시 위치, 상품 구입 현황을 기록한 자료를 수집했다. 상품 가격이나 판촉 행사에 따른 판매 추이도 분석했다. 술의 종류는 맥주, 포도주, 증류주(위스키) 등 3종이었다. 영국에서는 보통 슈퍼마켓 매장판매대 끝 쪽에 판촉 행사를 위한 특별 배치가 이뤄진다. 연구팀은 매대 끝 쪽의 판촉 전시와 술 구입의 관계를 조사했다. 그 결과 매대 끝 쪽의 판촉 전시는 소비자들의 술 구입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맥주는 일주일 동안 구입량이 23.2% 늘었고 포도주와 증류주도 각각 33.6%와 46.1% 증가했다. 이를 양으로 환산하면 맥주는 38.9~47.9ℓ, 포도주는 12.4~16.6ℓ, 증류주는 7.6~11.1ℓ에 해당한다. 이 효과는 술값을 4~9% 낮췄을 때 예상되는 소비 증가와 맞먹었다. 연구팀은 이런 현상이 술뿐만 아니라 탄산음료와 커피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고 밝혔다.
이 연구 결과는 경영 분야에서는 새롭지 않을 것이다. 제품 판매를 늘리려는 기업들은 아마도 이런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매장 위치 선정이나 판촉 행사를 기획했을 것이다. 하지만 건강 정책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어떻게 하면 비교적 손쉽게 술 소비를 줄일 수 있을지 단서를 제공한다. 생각해 보자. 크게 써 붙인 특별 행사 안내를 보고 계획에도 없던 맥주 캔 묶음을 덜컥 산 경험은 없는지를. 사람은 그렇게 합리적인 소비자가 아니며, 기업은 이윤을 더 많이 얻으려 이런 행태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하지만 건강을 위해 슈퍼마켓에서조차 이성적인 소비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몹시도 피곤한 일이다. 건강을 위한 선택이 더 쉽도록 환경을 바꿔 준다면 그쪽이 훨씬 바람직하다. 규제는 그 중요한 방편이다.
정부는 4대 중독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시민들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이런 식의 간단한 조처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정부가 이런 규제를 기업 이익을 방해하는 ‘암덩어리’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김명희 시민건강증진연구소(health.re.kr)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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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 소개된 문헌의 서지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Ryota Nakamura, Rachel Pechey, Marc Suhrcke, Susan A. Jebb, Theresa M. Marteau. Sales impact of displaying alcoholic and non-alcoholic beverages in end-of-aisle locations: An observational study. Soc Sci Med 2014;108:68-73 (바로가기 open acc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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