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예산 철이다. 물론, 가을 바람이 부는 때니 대부분은 늦었다. 그래도 연말에 국회를 통과하기까지 예산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그까짓 것 하는 작은 돈이 다른 어떤 이에게는 삶과 죽음을 가른다.
새정치민주연합 김용익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았다는 2015년도 예산 증감 상황을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정부는 내년 복지예산 비율이 사상 처음으로 30퍼센트를 넘었다고 선전했지만 줄줄이 깎인 취약층 지원 예산 때문이다.
신생아집중치료실 지원, 영유아 건강관리, 노인건강관리, 노인 틀니 지원, 암환자 지원 등 취약계층 복지예산이 2014년에 비해 1,357억 원이나 줄었다(표 참조). 아이스버킷으로 요란했던 희귀난치성질환이 같은 신세인 것은 차라리 한편의 코미디다.
양육수당은 무려 1,135억 원이나 줄었다. 그리고 이 표에는 없지만 기초생활보장이 6,991억 원 줄었고, 노인돌봄 서비스와 치매관리체계 구축 예산도 감소했다. 정부는 입만 열면 저출산, 고령화가 문제라는데 뭐가 진심인지 모르겠다.
어찌 줄기만 했을까. 물론 속사정이 있을 터, 늘어난 데에는 그게 더 궁금하다. 금연지원은 113억 원에서 1,521억 원으로, 1,408억 원(무려 1,248.8퍼센트!)이나 늘어났다 (보건복지부 보도자료). 보건복지부가 직접 분류한 ‘보건의료’ 예산 증가액 3,124억 원의 45퍼센트를 독차지한다.
복지 분야에서도 전체를 헛갈리게 만드는 불균형이 크다. 정부가 분류한 ‘사회복지’ 예산 증가분 3조 9,471억 원 가운데, 그 말썽 많은 기초연금 증가가 2조 3,823억 원을 차지한다. 전체 사회복지 예산 증가의 60 퍼센트를 ‘독식’하는 셈이다.
국민연금 급여에서 늘어난 것도 2조 원을 넘으니 이 역시 기초연금과 비슷하다(이른바 ‘자연증가분’이다). 둘을 합해 전체 증가분을 훌쩍 넘는다는 이야기는 결국 다른 것(기초생활보장, 보육, 노인)을 깎았다는 뜻이다. 화려하게 내세운 “복지예산 30% 돌파”의 실상이 이렇다.
예산을 두고 이제 와 할 수 있는 일이라야 기껏 몇 억, 몇 십억을 어떻게 하는 정도일 것이다. 그나마 국회 심의 과정에서 격렬한 ‘투쟁’을 거쳐야 할 터. 그렇더라도 몇 가지는 바로잡히길 기대한다.
세부 정책이나 사업이 아쉬우면 지레 비관할 필요가 없다. 금연사업 예산을 보라. 문제가 정치화되니 예산이 단번에 놀랍도록 늘기도 한다. 그동안 이리 저리 둘러댄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다(물론, 이제부터 예산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별개 문제다).
무슨 예산이 적으니 어떤 것이 깎였느니 하는 이야기는 여기서 접어둔다. 사실 한 두 해 어떤 예산이 늘고 줄었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무슨 일이든 사정과 의지에 따라 부침과 증감이 있기 마련 아닌가.
그보다는 정부 예산 편성의 토대가 되는 어떤 ‘구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여기서 구조란 쉽게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그런 점에서 상당 기간 지속되는 안정적인 어떤 것을 말한다.
구조가 작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표적 지출이 국민연금이다. 국민연금 수급자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으니 그만큼 지출이 따라가야 한다. 누가, 어떤 정권이, 무슨 사정이 생겼다고, 마음대로 바꾸기 어렵다. 이런 것이 구조다.
그렇다면 현재 보건복지 예산의 구조라고 할 만한 것은 무엇일까. 물론 보기에 따라 여러 가지가 중첩된 것이 또한 구조다(예를 들면 관료의 우위, 미흡한 투명성, 비민주적 결정 등). 그러나 오늘은 그 가운데서도 ‘선별주의’에 집중하자. 선별이 구조라니, 안정적으로 불안정하다는 말장난에 가깝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생아 집중치료, 틀니, 암환자, 분만 취약지 지원 등등. 선별에 기초한 보건복지 사업과 예산을 꼽으라고 하면 끝도 없다. 보건복지 예산의 핵심 항목들인 기초생활보장이나 의료급여, 기초연금조차 선별주의를 벗어나지 않는다.
선별적 보건복지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자격자’를 정한다는 것이다. 나이나 성별, 지역 같은 것도 기준이 되지만, 소득이나 경제적 능력이 중요한 기준으로 쓰인다.
선별적 보건복지가 가진 한계와 문제점 모두를 다룰 참은 아니다. 여기서 자격을 정하는 문제를 거론한 이유는 재정 지출에서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자격을 정하는 방식이면 대상자나 대상을 정하는 기준을 쉽게 바꿀 수 있다. 이른바 선별주의의 함정이다. 신생아 집중치료실을 지원한다고 하지만, 대상 지역이나 기관을 정하는 기준은 흔히 매우 불안정하다. 심하면 매년 바뀔 수도 있다. 게다가 관료체계 안에서 그것은 기술적이고 전문적이며 또한 복잡하다.
이런 사정 때문에 지출 총액을 먼저 정하고 나중에 기준을 맞추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이번에도 그랬을 것으로 짐작한다.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총량 목표를 먼저 결정한 다음, 그 돈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는 이제부터 구상하기로 했을 것이다.
이렇게 정해지는 예산은 당연히 쉽게 후퇴한다. 자격 여부를 나누는 기준이 달라질 때마다 대상과 지출 규모 또한 달라지기 때문이다. 정치적, 사회적 이유로 한 때 관심을 끌었더라도, 이런 식으로 선별하는 한 지속성을 보장할 수 없다.
이런 사정과 연관된 것이지만, 선별적 보건복지는 정치적 기반과 에너지도 분산시킨다. 당사자 말고는 관심을 끌기 어렵고 이해관계에서도 벗어나 있다. 예산이 줄고 대상자가 달라져도 당장은 나와는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가 되기 쉽다.
암환자 지원 사업이나 노인의치 지원 사업의 예산이 줄어들어도 나에게 해당이 없으면 관심이 줄어드는 것이 당연하다. 이해관계의 ‘전선’이 분산되는 셈이다. 예산 축소에 대한 반발, 그리고 이를 되돌리려는 길항의 힘은 그만큼 줄어들고 흩어진다. 사회 연대의 기반도 따라서 약화된다.
복지 ‘후퇴’를 막는 것이 이처럼 어려울진대, 확충하고 강화하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울까. 이번 예산안에 반영된 ‘공공의료 지원’과 같은 항목만 보더라도 어려움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번에 ‘지역거점병원 공공성 강화’라는 항목으로 편성된 예산은 670억 원으로 작년에 비해 겨우 26억 원(!) 늘어났다. 진주의료원 사태의 논란은 이미 식었다. 여기에 연결되는 관심은 그야말로 아주 적은 사람들이 가진 부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힘이 모아지고 압력이 생길 리 만무하다.
보건복지 예산이 자리 잡은 토대가 강력한 선별주의인 한 올해와 같은 ‘각론’ 복지의 후퇴는 피하기 어렵다. 더구나 앞으로 구조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는 예산의 비중은 더 커진다. 그렇다면 잠간 주목을 받더라도 오래 가지 못한다. 윗돌과 아랫돌을 바꾸는 일은 더욱 빈번해질 것이다.
결국 멀리 보면 선별에서 보편으로 틀을 바꿔야 한다. 몇몇 중증질환이 아니라 건강보장 전체의 보장성을, 일부 취약계층의 소득이 아니라 보편적 소득보장이 가야 할 길이다.
보건복지 예산은 결국 우리 사회와 정치공동체가 가진 보건복지의 원리를 반영한다. 매년 거듭되는 보건복지 예산의 ‘난맥상’을 보면서 얻을 교훈은 한 가지다. 보편 복지의 구상을 더욱 가다듬고 동력을 키우는 것. 새로운 보건복지의 정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