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하고 공공부문을 압박하기로 한 모양이다. 그래도 ‘개혁’이라면 1990년대 말 경제위기 이후 일상사가 된지라 그리 낯설지 않다. 공무원 연금을 포함해 모든 수단을 묶은 종합 패키지라는 것, 그리고 되풀이되는 말의 약효 탓인지 ‘정상화’라는 대통령의 어법을 쓰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개혁인지 자해 행위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정권의 의례인지 판단하려면 정신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핵심 한 가지는 바른 이름, 즉 정명(正名)이다. 공공부문과 공공을 제대로 규정해야 그 다음이 풀린다.
공공부문이 제 이름값을 못하고 있는 현실은 부인할 수 없다. 공익과 공공성을 실현하는 주체라기보다 흔히 비효율과 철밥통을 상징한다. 정부 고위직도 그리 알고, 생업에 충실한 보통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비효율과 부패라면 꿀릴 것이 없는 기업이 가장 열렬하다.
다시 확인할 일은 국가와 시장, 공공부문은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고 그래 왔던 국가와 경제가 공공부문을 ‘식민지’로 만든 탓에 오늘 같은 사달이 났다. 그 가운데서도 사익의 각축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국가가 대중과 시민을 배제한 것이 핵심이다.
한 마디로 지금 공공부문은 제 모습이 아니다. 개혁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오히려 사익을 대변하는 국가와 경제 영역이 주인 노릇을 한 결과로 이 꼴이 났다는 것을 다시 강조한다. 그들에게 맡길 수 없다.
기본 원칙은 명확하다. 국가를 그대로 둔 채로 국가화할 일도 아니고, 극단적인 사익 추구만 남아 있는 시장을 새로운 상전으로 맞이할 것도 아니다. 공공부문 개혁은 여전히(또는 새롭게) 어떤 사회적 통제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달려 있다.
우선 그 말썽 많은 공무원 연금부터 보자. 우리도 공무원 연금을 근본부터 바꾸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한다. 한 해에만 2조원이 넘는 적자를 세금으로 메꾸어야 하는 사태를 그냥 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행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개혁에는 찬동하기 어렵다. 겉으로 보기에 그 안은 건조하고 기술적이며 전문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냥 두면 몇 년 뒤 얼마나 적자가 나고 국가 재정 부담이 얼마나 큰지가 논리의 뼈대다.
그러나 진짜 노림수는 딴 데서 보인다. 공무원만 이토록 많이 받는다고 다른 사람들을 자극하는 것이 핵심이다. 불안정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든 임박한 노인 빈곤에 대한 공포든 다를 바 없다. 가장 직접적이고 감정적일 수밖에 없는 불평등에 기대는 전략. 게다가 공공이나 국가에 대한 혐오가 사태를 더 나쁘게 만든다.
냉정해지자. 하향 평준화가 답은 아니다. 모든 노인의 빈곤화가 국정목표가 아니라면, 오히려 국민연금의 보장성을 올리는 쪽이라야 한다. 결국 이 문제는 공적 소득보장을 확충한다는 큰 틀 없이는 같이 망하는 길 밖에 없다.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을 같이 말하는, 즉 상향 평준화를 통한 공적 소득보장 확충이 논의되어야 한다.
그래도 현실에서 조정을 해 나갈 수밖에 없다면, 과정의 공공성이 더욱 중요하다. 당사자인 공무원들이 논의에 참여하는 것으로도 충분치 않다. 공적 소득보장 전체를 두고 제각각 당사자들이 모두 참여하는 민주적 과정이 필요하다.
시간이 급하다느니 골든타임이 있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 마시라. 수십년 쌓여온 ‘적폐’라면 두세 해 사회적 논의를 하는 것이 왜 의미가 없겠는가. 때로 지루하고 비용이 조금 더 들어도 같이 의논하고 공감하며 합의해야 한다.
두 번째 다룰 것은 공기업 개혁 문제다. 말은 많지만 여전히 무엇을 왜 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목표와 가치 추구가 확실하지 않거나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방만 경영이니 심각한 적자니 하는 어설픈 선동은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정부가 추진의 동력을 얻고 여론의 지지를 받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본다. 잊을 만하면 ‘임금 펑펑’ ‘도덕적 해이’ ‘적자에도 성과급’ 식의 자극적 언사가 언론을 장식한다. 공공부문을 공격하는(일종의 자해 행위처럼 보인다) 단골 메뉴가 된지 오래지 않은가.
한 가지 예만 들자. 4대강 사업으로 수자원공사가 진 빚이 8조인데 성과급은 667억 원이었다고 한다. 이걸 두고 방만 경영과 적자 성과급을 그토록 강조하는 의도가 도대체 무엇인가? 게다가 이 성과급이란 것도 교묘한 왜곡이다. 처음에는 봉급을 일부 떼었다가 경영평가 후 차등 방식으로 돌려준다고 생긴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말만 성과급이지 봉급에 가깝다. 그렇게 왜곡할 것이면 내놓고 봉급을 깎자고 하라.
오해하지 마시길. 공기업이나 공공기관이 다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고쳐야 하고 좋게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 한두 가지일까. 공공성과 공익을 위해서라면 민간부문보다 더 잘하고 갖추어야 할 일이 많다.
그러나 이런 식의 개혁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개혁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공기업을 공격함으로써 공공성 자체를 ‘오명(스티그마)’으로 만드는 것이 핵심 목표인 정상화라니. 인천공항공사의 개혁은 (낙하산 인사는 말이 없는 채) 곧장 민영화로 이어지고, 철도공사의 개혁은 (‘철피아’의 부패는 놔두고) 노동조합의 무력화와 노동조건의 악화를 뜻한다.
마지막으로 공공기관과 공기업의 경영평가를 문제 삼으려 한다. 차원이 다른 미시적 문제지만, 국립대학병원을 새롭게 경영평가 대상으로 한다는 계획이 못내 걸려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개혁은 국립대학병원의 공공성이 훼손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이 뻔하다.
기획재정부가 전횡하는 경영평가의 ‘철학’과 원리는 다시 거론할 필요도 없다. 국립대학병원을 평가하는 데도 그것이 어디 가랴. 수익성, 성과급 제도를 얼마나 강력하게 시행하는 지, 여러 가지 기업형 경영 방식을 적용하는지 같은 것이 좋은 점수를 받는 기준으로 쓰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현재의 경영평가는 공공부문 전체를 신공공관리와 신자유주의 방식으로 구속하는 핵심 장치다. 어떤 미사여구를 쓰든 공공성과는 거리가 멀다. 기준을 바꾸고 배점을 조정해도 가망성이 없다. 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뿌리부터 완전히 새롭게 설계해야 한다.
그렇다면 세 가지 ‘정상화’를 넘어 제대로 된 개혁은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개혁의 대상부터 다시 규정해야 한다. 공공기관과 공기업이 아니라, 개혁의 주인과 사공 노릇을 하는 국가와 정부를 손대는 것이 먼저다. 공공부문 정책에 대해 더 많은 감시, 참여, 요구가 필요하다. 공공성을 규정하는 민주주의는 더 근본적이어야 하고 더 많은 것을 희망해야 한다.
백보를 양보하더라도 지금의 공공부문 개혁은 가치 있는 목표를 찾을 수 없다. 개혁과 정상화는 본질은 누구도 모른 채 그 자체로 절대화, 물신화되어 있다. 이런 바탕 위에 있으니 정략과 선동을 빼고는 어떤 전략과 방법인지도 알 길이 없다.
그런 국가와 정부가 행동하며 개입하는 것이 현실의 고민이다. 그러니 각자의 자리에서 반대와 요구를 조직하는 것도 멈추어서는 안 된다. 기술과 실용 수준에서 목적과 목표를 끈질기게 물어야 한다. 조직과 기관(국립대학병원이나 공사), 그리고 정책이나 사업(경영평가, 재정 지원)의 존재 이유가 핵심이다.
공공부문이 달성해야 할 공적 가치를 명확하게 규정할 것. 그리고 이를 잘 달성할 방도가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제기할 것. 무엇보다 국가와 정부가 이를 명확하게 할 것을 요구하고 압박할 것.
어려운 가운데서도 작은 희망은 있다. 국가가 국가인 한, 공적 가치와 공공성을 통째로 버리지는 못한다. 가라타니 고진의 개념을 빌리자면, 근대 국가라면 ‘네이션’으로서의 주체성을 버릴 수 없다. 아무리 형편없어도 상징과 문화, 정치적 동원으로라도 공공을 내세워야 한다. ‘국가 되찾기’가 필요한 이유, 그리고 그 진입 지점이다 (서리풀 논평, 프레시안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