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헌재는 공공의료를 심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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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까지 “기부를 강요하는 사회”를 논평 주제로 생각했다. 연말연시라는 때가 때인지라, 허술한 복지를 온정과 자선이란 이름으로 메꾸는 현상을 생각해 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헌법재판소의 정당 해산 판결이 끼어들었다. 언뜻 보기에 우리(시민건강증진연구소)가 하는 일과 직접 관련은 없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직접’이란 무엇이고 ‘관련’이란 무엇일까.

무엇이라 말하든 이 시대를 사는 시민이면 누구라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연구소가 가지는 관심, 하는 일, 해야 할 과제도 벌써부터 걱정이 많다. 이 논평부터 벌써 ‘자기 검열’에서 자유롭지 않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헌재 판결의 논리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수도 이전을 둘러싸고 ‘관습헌법’의 논리를 동원했던 전과만으로 충분하다. 다만 한 가지, 몇몇 재판관이 판결문에 썼다는 다음 표현은 (기억을 위해서라도) 기록해 두어야 하겠다.

“소위 대역(大逆)행위로서 이에 대해서는 불사(不赦)의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히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와 본질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겨레 2014년 12월 20일, 바로가기)

근대도, 논리도, 법률도 아니다. 조선 왕조나 일제가 되살아난 줄 알았다. 아니 기시감이 있긴 하다. 40여년 전 유신과 긴급조치, 그리고 정말(!) 약간의 몸부림을 여지없이 ‘단죄’하던 재판들이 재현되는 것을 봤다. 이번에는 그 수준과 내면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번 일에 논점은 크게 두 가지로 모아진다. 실무적이고 기술적인 것은 빼고, 그리고 냉소하지 않는 한에서 그렇다. 하나는 다른 생각과 이념에 대한 제도적 폭력(국가가 물리적 힘을 합법적으로 독점한다는 막스 베버의 말은 점잖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헌법재판소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점이다.

특히 첫 번째 논점이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건강과 보건의료 역시 정치, 사회적 맥락 안에 있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이나 영리의료, 공공의료 강화 같은 논쟁적인 사안들이 잘 나타내는 그대로다.

 

잠깐만 따져보자.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은 본래 자유주의의 토대가 아니던가. ‘대한민국 헌법’의 이념적 기초가 자유 민주주의라고 하는 사람들, ‘다름’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고 나서야 하지 않을까. 사회 발전을 위해 도움이 된다는 실용성뿐 아니라, 그것이 자유주의의 본질적 가치라고 생각해야 앞뒤가 맞다.

그런데 이런 다름과 다양함을 토론과 경쟁이 아니라 제도가 처벌한다? 그것도 자의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정당의 해산은 다르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정당은 다양한 이념과 지향을 현실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갈등과 싸움을 제도화함으로써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장치가 곧 근대의 정당이다. 우리는 이미 정말 이상하고 희한한 정당조차도 또 다른 의미의 ‘시장’과 경쟁에 맡겨 놓는 국가들을 잘 안다. 그들은 국가로서의 존립 근거(존재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또 다르게는, 그 중에서도 이번 판결의 대상은 ‘특수’하다고 우길 것이다. 그러나 그 특수의 기준은 누가 정하나. 이것이야말로 정치 제도와 과정의 본질적 기능이자 임무다. 스스로 자부해마지 않는 자유주의적 해결 방식을 배신하고 합법의 이름으로 제도적 폭력을 동원했다.

게다가 법률 논리의 엉성함조차 이미 여러 사람들이 지적한 것과 같다. 짐작과 인상과 선입관으로 구성한 논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현실의 국가와 분단 상황을 백번 참작하더라도 마찬가지다. 헌법 가치가 아니라 (긴급조치와 다를 바 없는) 공안의 논리만 보인다.

 

허술한 법률 논리와 사법 정치가 합해지면서 제도가 더욱 억압적이고 폭력적이 되리라는 것이 중요하다. 건강과 보건의료에서 ‘무상의료’는 물론이고, 공공의료, 비시장적 대안, 영리의료 반대, 건강권 주장이 이제 무엇이 되겠는가. 위헌 심판이 줄을 잇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미 건강보험 조차도 “사회주의 의료”라는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었다. 무상의료, 공공의료까지 가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유럽의 많은 자본주의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멀쩡하게 잘 운영하는, 그리고 국민의 지지를 받는 제도가 앵무새처럼 (성의 없이) 종북, 좌빨 소리를 듣는다.

 

헌법재판소가 이런 제도의 중핵 노릇을 하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두 번째 논점이다. 정치를 사법에 의존한다는 지적은 되풀이하지 않는다. 한국 정치의 실력이 그 정도니 무슨 말을 더할까.

사법의 정치화도 따지지 않기로 한다(이 정치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누가 추천했는지,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과거에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들이 판박이처럼 같은데 개인이 무슨 소용인가. 이미 단단한 하나의 구조다.

 

다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들은 시민의 생각과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못한다. 흔히 말하듯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기 때문이다. 갈등과 논쟁의 대상이 어떤 것인지 법률적으로 검토하고 사회적 심의의 자료를 제시하는 것은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 아니라 대의 민주주의가 맡을 일이다.

(혹시 이런 일이 있다면) 영리병원이 바람직한지 억제되어야 하는지 왜 헌법재판관 개인이 판단해야 하는가. 공공의료를 버릴 것인지 강화할 것인지는 시민이 토론하고 결정해야 할, 정치의 대상이다. 최악의 조건이라도 시민의 심의와 ‘공론’을 반영해야 한다.

이 제도가 해야 할 일, 해서는 안 되는 역할을 다시 논의해야 할 것으로 본다. 1987년 체제가 어떠니 세계적 경향이 어떠니 하는 이야기는 참고 자료일 뿐이다. 이런 제도가 시민의 삶에 어떤 좋은 영향을 미쳤는가? 이들이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가? 이것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려고 하는 이 때, 한국 사회와 우리 삶은 더할 수 없이 착잡하고 추레하다. 그것이 무엇이든 더 좋은 쪽으로 나아지고 있는지 의심이 더 커진다. 그러나 냉소와 조롱에 빠질 수는 없는 일, 이것도 또한 전진하는 길 가운데 곡절이고 역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더 나은 삶 그리고 더 좋은 사회로 가기 위해 얼마든지 이야기하고 논쟁할 수 있어야 한다. 두려움 없이 대안과 희망을 말하고, 자유롭게 제안하고 반대하는 것도 포기할 수 없다. 어떻게든 그 조건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개방과 민주, 이 열린 과정을 제도적으로 그리고 폭력으로 억압하는 것을 감수할 수는 없다. 스스로 억압을 내면화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더 상상하고 더 시도하는 ‘뒤집음’의 계기를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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