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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치료에도 ‘동네 의사’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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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通’에서 격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프레시안 기사 바로가기)


 

암 치료에도 ‘동네 의사’가 중요하다

한국 사회의 수도권 집중 현상은 분야를 막론하고 관찰되지만, 그 중에서도 의료 서비스 집중은 유별난 편이다. 예컨대 2012년 국정 감사 보고서를 보면, 2011년 국민건강보험 지출의 21%가 대학 소속 또는 대학 연계 병원으로 향했고, 이 중 수도권의 소위 ‘Big 5’ 병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35%에 달했다. 이들 Big 5 대형 병원은 매년 전국에서 퇴원하는 전체 환자 수의 1% 이상을 점하고 있다.

메르스 유행 당시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이 그토록 문제가 되었던 것도 그 일면이다. 암 같은 위중한 병에 걸리면 ‘서울의 큰 병원’ 가는 것이 당연시된다. 최첨단 시설과 유명한 전문 의료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의료의 ‘질’은 분명히 환자의 건강 결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최근 <국제건강형평성학회지>에 발표된 논문은, 의료의 질이 반드시 최첨단 의료 기술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동네에서 1차 의료를 책임지는 의사, 바로 동네 의사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관련 자료 : Colon cancer care and survival: income and insurance are more predictive in the USA, community primary care physician supply more so in Canada)

캐나다 윈저 대학교의 케빈 고레이 교수 연구 팀은 캐나다 온타리오 주와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살고 있는 대장암 환자들의 10년 생존율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분석했다. 대장암은 북미 지역에서 암 사망의 두 번째로 흔한 원인이며, 특히 조기 진단과 치료에 의해 예후가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의료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판단하는 데 좋은 지표가 된다.

이 연구가 분석 대상으로 삼았던 시기는 미국의 오바마 의료 개혁이 시행되기 전이다. 따라서 사보험이 지배적인 가운데 무보험자의 숫자가 인구의 거의 15%를 차지하고 있던 반면, 이웃 캐나다는 1984년부터 ‘메디케어’라고 하는 전 국민 건강 보험 제도를 운영해오고 있었다. 1차 진료 의사의 숫자도 차이가 나는데, 온타리오의 경우, 전체 의사 중 1차 진료 의사 비율이 47%인 반면 캘리포니아는 27%에 불과했다. 연구진은 이러한 두 국가의 의료 체계상의 차이가 건강 결과에 대해서는 어떠한 차이를 낳고 있는지 분석하고자 하였다.

연구진은 1996년부터 2000년 사이에 온타리오와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대장암 진단을 받은 환자들 중 진단 당시 다른 장기로의 전이가 없었던 환자 2060명과 4574명 각각에 대해서 2010년까지의 생존 여부를 확인했다. 진단 당시 의료 보험 가입 상태, 진단 시점의 처치, 거주지의 빈곤 수준을 파악하고, 지역 내 1차 진료 의사, 소화기 내과 전문의, 암 전문의와 일반 외과 의사 등의 숫자도 조사했다.

그리고 이러한 요인들과 대장암 10년 생존율의 연관성을 분석한 결과, 미국에서는 빈곤 수준과 국민건강보험 가입이 대장암 생존과 관계있는 반면, 캐나다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즉 캘리포니아에서는 가난할수록, 그리고 건강 보험이 없거나 의료 급여 수급자일수록 대장암 생존율이 낮았지만, 모두가 건강 보험을 가지고 있는 캐나다에서는 소득 수준에 따른 유의미한 차이가 관찰되지 않은 것이다. 또 두 국가 내 비슷하게 가난한 동네를 서로 비교해 봐도, 온타리오 환자의 생존율이 캘리포니아보다 15%나 높았다.

반면 캐나다에서 대장암 생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변수는 지역의 1차 진료 의사, 즉 동네 의사의 밀도였다. 살고 있는 동네에 1차 진료 의사 수가 많을수록 대장암 환자들의 생존율은 높아졌다. 또 가장 가난한 지역을 비교해보면, 온타리오의 경우 캘리포니아에 비해 1차 진료 의사의 수가 주민 1만 명당 평균 2명 이상 더 많았다. 소화기 내과 전문의 숫자 또한 온타리오에서 더 영향이 큰 것으로 나타났지만, 소화기 내과 의사가 많은 지역은 1차 진료 의사의 숫자 또한 많았다. 여타 전문의 숫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1차 진료 의사와 핵심 전문의들의 조화로운 지역 분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적정한 동네 의사 숫자를 인구 1만 명당 7.5명 이상이라고 정의했을 때, 온타리오 대장암 환자들의 40%는 이런 동네에 살고 있는 반면, 캘리포니아 환자들은 10명 중 한 명만이 그러했다. 또한 온타리오의 경우, 1차 진료 의사의 이러한 긍정적 효과는 특히 사회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곳에서 두드러졌다.

이러한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연구진은 미국이 의료 보험 개혁을 통해 전 국민 의료 보장 체계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실질적 성과를 거두려면 1차 의료를 강화해야 한다고 결론내렸다. 또한 캐나다에서 사보험을 확대하는 조치는 미국과 같은 건강 불평등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도 경고했다.

이 연구의 결론은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한국의 환자들이 큰 병원을 선호하고, 방송에 출연하는 유명 의사를 찾아다니고, 비싼 건강 검진을 반복적으로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적절한 1차 의료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은 탓이 크다. 예전에 쿠바를 방문했을 때 가장 부러웠던 것 중 하나는, 동네 주치의가 오후에 진료소 문을 닫고 지역 병원에 입원한 자기 환자를 만나러 가는 모습이었다.

본인이 평소에 진료하던 환자를 큰 병원에 의뢰하고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병원에 직접 가서 전문의와 환자 상태를 함께 살펴보고 나중에 그 환자가 퇴원해서 돌아오면 다시 진료를 이어간다는 것이다. 환자 입장에서 보면 이만큼 든든한 것이 없다.

물론 주치의를 맡은 의사 입장에서 보자면 지속적 관계를 맺고 환자 상태 전반을 관리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이 따른다. 하지만 적절한 보완책만 마련된다면 훨씬 좋은 환자-의사 관계를 형성하고 신뢰받는 소신 진료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실제로 쿠바에서도 의사 혼자 주치의 업무를 맡는 것이 아니라, 간호사 등과 팀을 이루어 적정 수의 환자만을 돌보기 때문에 이런 모습이 가능한 것이다.

2014년 보건사회연구원 연구에 의하면 한국 노인 10명 중 6명이 세 가지 이상의 만성 질환을 앓고 있다고 한다. 대학병원의 전문과 서비스만큼이나 동네 의원에서의 종합적인 만성 질환 관리가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그동안 주치의 제도를 도입하려는 여러 차례의 시도들이 좌절되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동네 의사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제공하고 불필요한 부담을 줄일 수 있을지 논의하면서, 한국에서도 동네 의사의 역할을 강화하는 방안을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환자들을 위해서도, 의사들을 위해서도 말이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고 했으니, 이제 시민들이 염원을 모을 시점이다.

(☞관련 자료 : 건강 검진은 어떻게 ‘산업’이 되었나?)

(☞관련 기사 : 건강 검진은 어떻게 ‘산업’이 되었나?, 갑상선암 논란을 보는 시각, 암의 위협, 더 생각할 것들, 첨단 기술 맹신의 위험성)

김명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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