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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어떻게 폭력으로 이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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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풀 연구通] 주류세 인상에 관한 고찰

 

이오 (시민건강증진연구소 회원)

최장 10일간이나 이어졌던 추석 연휴가 끝났다. 지난 4년간 추석과 설 명절 연휴에는 일 평균 가정폭력 신고 건수가 평소보다 약 44% 증가했다고 한다(☞관련 기사: ‘가족의 정?’ 명절 연휴 가정폭력 신고 하루 1000건 육박).

다행스럽게도 올 추석 연휴에는 가정폭력 신고 건수가 작년에 비해 16.4%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9월 30일부터 10월 8일까지 신고 된 가정폭력 건수는 하루 평균 1031건, 전체 9276건이었다(☞관련 기사 : 올 추석 연휴 가정폭력 줄었나…신고 작년보다 16.4%↓).
신고 건수가 상대적으로 감소했다고 하지만, 하루에 천 건이라니 여전히 적은 숫자는 아니다. 게다가 가정 폭력 신고율 자체가 낮다는 점을 고려하면 문제는 상당히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어야 했을 기나긴 연휴가 적지 않은 이들에게는 끔찍한 고통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성 평등과 여성의 권리 신장은 가정폭력을 비롯한 젠더폭력을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심지어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페미니즘의 부상이 인류 역사에서 젠더 폭력 뿐 아니라 전체 폭력을 감소시키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근본적 개혁뿐 아니라 구체적 정책이나 프로그램도 폭력을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알코올과 관련한 규제정책이 그러하다.

과도한 음주가 가정폭력을 포함한 파트너 폭력의 주요 원인이라는 점은 지난 30년 동안 많은 연구 논문들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었다(☞관련 자료 바로 가기). 알코올 섭취는 공격성 증진을 통해 상해의 위험성을 높이는데, 특히 음주 후 6시간 이내에 폭력으로 인한 상해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관련 자료 바로 가기).  그렇다면 순서를 뒤집어서, 과도한 음주를 줄일 수 있는 정책을 시행하면 폭력이 줄어들게 되지 않을까?

올해 초 국제 학술지 <손상 예방>에 발표된 영국 카디프 대학교 니콜라스 페이지 교수 연구팀의 논문은 이 질문에 답을 찾고자 했다(☞관련 자료 바로 가기). 연구팀은 주류 섭취가 폭력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2단계로 설명했다. 주류 가격이 주류 섭취에 영향을 미치는 단계와 주류 섭취가 폭력 행위로 이어지는 두 번째 단계를 구분하고, 주류 가격 변동이 이 두 단계를 거쳐 폭력 행위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가정한 것이다.

연구팀은 2005년 1월부터 2012년 12월 동안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역에서 발생한 상해 관련 응급실 방문 기록, 주류 가격 자료는 물론, 빈곤과 소득 불평등, 청년 실업률 등 사회적 지표에 관한 자료들을 이용하여, 이들 사이의 연관성을 검토했다.

분석 결과, 식당, 주점, 호텔 등 ‘소비 매장’에서의 주류 가격과 슈퍼마켓, 면세점 등의 ‘소매 판매점’에서의 주류 가격이 오를수록 폭력 관련 응급실 내원 빈도가 낮아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지역의 빈곤 수준과 소득 불평등, 청년의 소비력, 계절 효과 등을 모두 고려한 결과였고, 예상할 수 있듯, 지역 빈곤율과 소득 불평등은 폭력 상해와 관련된 응급실 내원 빈도를 설명하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다.

이렇게 다른 혼란 효과들을 고려한 분석 모형에서, 소비 매장과 소매 판매점의 주류 가격이 인플레이션보다 1% 상향될 때마다, 지역에서 폭력 관련 응급실 내원 수가 연간 6000건 이상 감소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사실 1%면 체감 상 그리 큰 인상폭이 아니다. 연구팀은 이렇게 주류 가격을 소폭만 상향 조정해도 폭력 상해로 응급실에 내원하는 피해자의 수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역 빈곤이나 소득불평등처럼 폭력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비교적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정책 수단인 셈이다.

국내에서도 2014년 담뱃세 인상과 함께 주류세 인상이 거론되었다. 하지만 결국 주류세는 인상되지 않았다. 담배에 비해 술에 대한 규제는 시민들의 저항도 훨씬 큰 편이다. 그러나 주류 소비를 감소시키는 정책 중에서 가장 일관된 효과가 입증된 것이 바로 주류 가격 인상이다.

물론 건강과 안전만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는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술을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인간 행복의 중요한 측면이다. 하지만 과도한 음주가 폭력으로 이어져 타인의 건강을 훼손하고 때로 생명까지 앗아가는 것에는 분명히 사회적 대응이 필요하다. 결코 인기 있는 정책은 아니겠지만, 폭력으로부터 생명과 건강을 보호할 수 있는 접근을 언제까지 미룰 수는 없다.

 

* 서지정보

Page, N., Sivarajasingam, V., Matthews, K., Heravi, S., Morgan, P., & Shepherd, J. (2017). Preventing violence-related injuries in England and Wales: a panel study examining the impact of on-trade and off-trade alcohol prices. Injury prevention, 23(1), 33-39. Retrieved from http://injuryprevention.bmj.com/content/23/1/33

Leonard, K. E., & Quigley, B. M. (2017). Thirty years of research show alcohol to be a cause of intimate partner violence: future research needs to identify who to treat and how to treat them. Drug and alcohol review, 36(1), 7-9. Retrieved from http://onlinelibrary.wiley.com/doi/10.1111/dar.12434/full

Cherpitel C.J. (2002) Alcohol and Violence-Related Injuries in the Emergency Room. In: Galanter M. et al. (eds) Recent Developments in Alcoholism. Recent Development in Alcoholism, vol 13. Springer, Boston, MA. Retrieved from https://link.springer.com/chapter/10.1007/0-306-47141-8_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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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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