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정치판’ 국회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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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국회가 개원했다는데, 모두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도무지 화제에도 오르질 않으니, 작은 기대라도 가진 사람을 보기 어렵다. 선거 때는 그래도 가끔 희망을 말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마저 사라지고 없는 것 같다. 
 
달라진 것 없는 정당정치의 구조나 새 사람이긴 하나 새로워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 원인일 것이다. 진보정치가 겪는 어려움이 보태졌지만, 그나마 기대를 접어야 하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개원하는 국회에 새로운 기대를 걸고 싶다. 의원들이 대오 각성하는 것을 바라거나, 정치구조가 천지개벽을 할 것 같아서가 아니다. 단숨에 무슨 기막힌 해결책을 내놓으리라는 희망을 가지지도 않는다. 
 
아마도 어떤 것은 조금 좋아질 뿐이고 어떤 것은 오히려 나빠질지도 모른다. 정치권력의 성격과 구조가 바뀐 것이 없다면, 벌어질 일도 크게 예상을 벗어나지 않으리라. 그러나, 조금도 달라질 것이 없더라도, 기대를 버릴 수 없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 국회는 권력을 갖지 못한 자들의 목소리가 나올 수 있는 유일한 “제도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이론을 동원할 것도 없이 정치, 경제, 행정, 사법, 언론, 학술, 문화, 그 모든 영역에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대표되지 못한다.
 
의심스러우면 당장 쌍용자동차의 해고 노동자나 한미 FTA로 피해를 받는 농민이 어떻게 대표되는지 찾아보라. 그야말로 한 줌도 안 되는 사람들이 내는 쉰 목소리나 보잘것없는 성명서가 전부다. 때로 불법도 감수해야 듣는 사람에게 닿는다.  
 
건강과 보건의료도 다를 바 없다. 영리병원과 외국인 투자, 의료관광은 어떤 공론의 장에서도 ‘과잉’ 대표된다. 의사와 약사, 병원, 제약회사는 튼튼한 조직과 압도적 자원, 강력한 네트워크를 가졌다. 진료비 인상, 약가 인하, 의약품 슈퍼판매, 어떤 문제라도 이들이 가진 권력과 무관하게 결정되기 어렵다. 
 
그에 비해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건강과 보건은 어떤 통로로도 대표되지 못한다. 단지 몇 가지 사례지만, 심각한 건강 불평등이 그렇고, 엉성하지만 그나마 안전망인 의료급여가 그렇다. 
 
서울시의 잘 사는 자치구와 못사는 자치구 사이에 사망수준 차이가 10년 만에 1.4배로 더 벌어졌다고 한다 (5월 29일 서울시 발표). 그러나 어느 구가 제일 나으니 하는 ‘관음증’적 시각만 무성하고 관심과 논의는 억압된다. 기획재정부가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의료급여의 환자부담금을 올리겠다고 해도(6월 1일 기획재정부 발표), 주류 언론은 공짜 복지를 없애는 잘 하는 정책이란다. 마땅히 대상자를 늘리고 혜택을 넓혀야 한다는 주장은 찾아볼 수 없다. 
 
무엇으로도 대표되지 않는 낮고 약한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국회가 할 일이다. 주먹질과 밤샘 농성을 욕하지만, 그들의 표로 당선된 의원들이 표를 배반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기다. 끝내 말할 곳을 찾지 못한 이들이 호소할 수 있는 방법이 뻔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 지난 5월 19일에 열린 쌍용차 희생자 추모 범국민대회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
 
그래도 국회에 기대를 거는 두 번째 이유는 국가 수준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핵심 제도이기 때문이다. 대의 민주주의 체제를 전제한다면, 국회는 여론을 반영하고 정치교육의 통로가 되며, 대표 기능을 통하여 정책과 법률의 토대를 만든다. 
 
한국에서 대중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과 법률이 얼마나 비민주적인지는 지적하는 것은 새삼스럽다. 건강과 보건은 전문성이 높다는 이유로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대중의 무지와 무관심을 탓하지만, 제도와 환경이 더 중요하다. 그 중에서도 국회가 제 역할을 못한 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조류 인플루엔자의 확산을 막는다는 이유로 일상생활을 심각하게 제약하려면(예: 휴교) 과학적, 의학적 근거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일반 대중이 위험의 정도를 인식하고 조치의 편익과 비용을 판단하는 민주적 참여와 토론과정이 필요하다. 국회를 빼고는 대안이 될 만한 참여와 토론의 공간을 생각하기 힘들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어서 한국과 평면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호주 뉴사우스웨일즈 주 의회가 흡연정책을 토론해 온 과정은 흥미롭다. 담배정책은 대표적인 공중보건정책인 동시에 가치의 갈등이 나타나는 전형적인 정책이다. 
 
금연 정책을 두고는 흔히 개인의 자유와 공중보건을 위한 규제의 필요성이 충돌한다. 담배세 인상이나 광고정책에서도 서로 다른 관점에 따라 찬반이 나뉘고 같은 방향 안에서도 강도가 달라진다. 어떤 결정보다 참여와 토론, 합의가 더 중요한 정책에 속한다. 
 
뉴사우스웨일즈 주 의회는 1980년부터 담배정책을 논의하기 시작하여 1986년 처음으로 담뱃갑에 경고 문구를 넣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광고금지, 의회 건물 안에서의 금연, 청소년 담배판매, 자동차 안에서의 흡연, 작업장 내 흡연, 청소년 흡연 등의 문제를 토론하고 법으로 만들었다. 
 
사회적으로 끊임없이 논쟁이 벌어졌고, 한 가지 정책이 법으로 만들어지는 데에 2-3년이 걸렸다. 의회는 이 과정에서 사회적 토론을 받아 논의를 심화시키고 결론을 내는 역할을 했다. 
 
참여를 촉진하고 민주적인 토론을 하기 위해 의회는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의원들에게 10분씩 시간을 주고 어떤 주제든 이야기할 수 있는 포럼을 조직했다. 당연한 결과지만, 참여자가 늘고 다양한 관점이 제시되었으며, 토론의 범위도 넓어졌다. 의회의 논의는 사회로 되돌아가 다시 토론을 확대하고 진전시키는 역할도 했다. 
 
담배 정책을 두고 과거 한국의 국회가 민주적 참여와 토론의 장이 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다른 건강정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이런 상태에 머물 수는 없다. 앞으로 건강과 보건정책을 결정하는 데에는 더욱 다양한 가치가 충돌하고 더욱 넓게 이해관계가 갈릴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불평등한 대표성의 문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국회는 어떤 제도를 통해서도 대표되지 못하는 정치적, 사회경제적 약자를 대표해야 한다. 또한, 참여와 토론을 통하여 가치와 이해관계를 배분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정치의 중심이 되어야 마땅하다. 19대 국회의 진정한 ‘정치화’를 기대한다. 
                            
     
※ 참고 자료
– Hooker C. and Chapman S. 2006. Deliberately personal: Tobacco control debates and deliberative democracy in New South Wales. Critical Public Health, Vol. 16, No. 1, pp. 3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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