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에게 더 가혹한 재난, 처방은?
[서리풀 연구통通] 재난 이후 ‘연대’가 노인 인지능력 저하 막는다
지난 15일 포항에서 발생한 지진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노력이 한창이다. 정부는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하여 지원을 시작했고(☞관련 기사 : 포항 ‘특별재난지역’ 금주 선포…수능시험장 시설상 문제는 없어), 민간 부문에서도 피해 복구에 여념이 없다. 그렇지만 피해 지역 주민들이 재난 이전의 일상을 회복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이번 지진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례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지진, 태풍 같은 자연재해의 건강 영향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장기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를테면 자연재해 피해자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 장기적으로 물질 남용 장애에 빠지거나, 노인의 경우 인지기능이 저하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알려져 있다. 재난으로 인한 주거지 파손과 재물 손상 등 물질적 피해는 물론,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틀어진 삶의 계획은 어떤 식으로든 건강에 장기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이 모든 피해자에게 평등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 사례로,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때문에 사망한 이들 중 89%가 65세 이상 노인이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즉각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저하되어 있었고, 일상의 파괴에 적응할 수 있는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자연재해의 건강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최근 발행된 국제 학술지 <랜싯: 지구 건강 Lancet Planetary Health>에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전후로 발생한 노인들의 인지 능력 저하 문제를 다룬 연구 논문이 실렸다. 하버드 대학의 히키치 교수팀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로 직접 피해를 입었던 지역에서 재난 전후 사회자본의 변화와 인지기능 저하 사이의 관계를 분석했다. 이러한 연구는 재난 발생 이전에 피해 지역에서 노인의 인지기능과 사회자본을 미리 측정해 둔 자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2010년 8월에 시행된 ‘일본 노년기 평가 연구(Japan Gerontological Evaluation Study)’에서는 이와누마 지역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약 59%에 해당하는 5000여 명을 대상으로, 훈련받은 간호사가 직접 가정을 방문하여 인지기능을 평가했다. 이는 일본의 노인장기요양서비스 제공 기준 중 하나로 사용되는 방법이었다. 평가자는 노인의 일상생활능력과 단기 기억력, 지남력(orientation), 의사소통 등 인지 기능, 그리고 정신과 행동의 장애 여부를 평가하고 이를 종합하여 노인들을 인지기능을 총 8단계로 구분했다.
이 조사가 완료되고 7개월 후인 2011년 3월, 진도 9.0이라는 일본 국내 관측 사상 최고 규모의 지진이 발생한다. 이와누마 시는 진앙지로부터 약 80km 떨어진 서쪽 연안에 위치해 있으며, 쓰나미 피해를 입었다. 이와누마 시에서만 5542채의 가옥이 무너지고, 18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그림.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의 진원지와 이와누마 지역.
▲ 붉은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주요 거주지역, 푸른색으로 표시된 지역은 쓰나미로 인해 침수된 지역이다.
사회 자본은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남에 의해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래,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 보건학 등 여러 분야에서 활용되는 개념이다. 이는 “사회적 행위자들이 서로 협력하도록 함으로써 공동의 목적을 보다 효율적으로 성취할 수 있게 하는 신뢰, 규범, 네트워크 같은 사회 조직의 특질”을 지칭한다. 이 논문에서는 지역사회에서 타인에 대한 신뢰와 상호 부조, 지역사회에 대한 애착을 ‘인지적 사회자본’으로, 응답자가 실제로 지역사회에서 만나는 친구의 수와 만남 빈도, 스포츠와 취미 등의 동아리 활동 정도를 ‘구조적 사회자본’으로 정의하고 측정했다.
분석 결과, 이와누마 지역에서 2차 조사에 응답한 노인 3566명 중 약 37%가 재난으로 인해 친구 또는 친척을 잃었고, 약 57%가 재산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 조사에서는 인지적 측면에서 완전히 독립적 생활이 가능하다고 평가된 사람이 11%였던 것에 비해 2013년에 다시 조사했을 때에는 그 비율이 4%로 줄어들었다. 뇌졸중 유병률도 2%에서 5%로 늘어났다. 사회적 응집력이나 사회활동 참여는 전반적으로 감소하는 양상을 보였다.
소득이나 가구형태, 뇌졸중과 당뇨 여부, 우울감, 흡연, 음주 등의 건강 행태를 모두 고려한 분석에서 재난 경험, 특히 주거지 손상은 인지기능 저하와 연관이 있었다. 그러나 인지적 사회자본과 구조적 사회자본 모두 이러한 인지기능 저하를 완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에 사회자본이 낮았던 집단과 높았던 집단을 구분하여 분석한 결과, 사회활동 참여와 친인척 및 이웃 접촉이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거나 증가하는 경우에는 주거지 손상으로 인한 인지기능 저하 정도가 작았다. 반면 사회활동 참여와 사회적 접촉이 줄어든 집단에서는 주거지 손상의 부정적 영향이 더 크게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구진은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재난 상황으로 야기된 자연실험을 통해, 재난 경험이 노인의 인지기능을 저하시킬 수 있지만, 튼튼한 사회자본은 이러한 부정적 효과를 완화할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실제로 이와누마 시에서는 주민들이 거주지가 파괴된 노인들을 도와 임시거주지를 꾸렸고, 임시 거주지가 만들어진 후에도 다양한 활동을 통해 약자들을 보살폈다. 이런 근거를 토대로 연구팀은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지역사회가 활성화되고, 그 결과 취약한 노인들의 인지기능 저하가 더 작게 나타났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오늘 소개한 연구에서 확인한 사회자본의 보호 효과를 좀 더 폭넓게 해석하자면, 재난 현장에서 자라나는 상호부조와 연대의 공동체가 건강보호 효과를 발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레베카 솔닛이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생생하게 그려낸 것처럼, 우리는 갑작스럽게 재난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필요한 것을 제공하면서 재난 공동체를 형성해나간 사례들을 알고 있다(☞관련 글 바로 가기). 지금 포항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 작년 경주 지진의 피해자들, 조용히 서로를 돌보고 있는 지역의 평범한 시민들의 모습은 솔닛이 목격했던 재난 공동체가 마냥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님을 보여준다.
자연재해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발생하지 않으며 그로 인한 일상의 훼손과 건강 피해 역시 불평등하다. 보다 취약한 이들을 돌보기 위한 장기적이고 섬세한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이 논문은 노인의 인지기능 저하 사례를 다루고 있지만,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을 끌어안는 연대와 상호 부조는 단지 이 문제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재난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낼 수 있는 것은 호혜성과 연대로 이어진 ‘우리’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서지 정보
Aldrich DP. Building resilience: Social capital in post-disaster recover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2 Aug 22.
Hikichi H, Aida J, Kondo K, Tsuboya T, Matsuyama Y, Subramanian SV, Kawachi I. Increased risk of dementia in the aftermath of the 2011 Great East Japan Earthquake and Tsunami.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2016 Oct 24:201607793.
Hikichi H, Tsuboya T, Aida J, Matsuyama Y, Kondo K, Subramanian S V, et al. Social capital and cognitive decline in the aftermath of a natural disaster: a natural experiment from the 2011 Great East Japan Earthquake and Tsunami. Lancet Planet Heal 2017;1:e105–13. doi:10.1016/S2542-5196(17)30041-4.
레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 정해영 옮김. 펜타그램; 2012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서리풀 연구통通’에서 매주 금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