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사라지는 ‘고향’을 되살릴 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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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에 농촌형 고향을 다녀온 사람들이 나눴을 ‘정치적’ 대화는 대체로 이런 범위였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공과, 동계올림픽, 남북 관계, 6월 지방선거, 노인 문제, 그리고 지방의 쇠퇴. 지역에 따라 특별한 주제도 있었을 것이나 이 정도가 우리가 당면한 사회적 현실이 아닌가 싶다.

 

그중에서도 고령화와 지역 쇠퇴는 뾰족한 수도 없으니 마냥 답답한 주제였을 터, 무력감과 냉소가 분위기를 압도했을 수도 있다. 설 연휴에 경상북도 지사에 출마하는 한 후보자가 ‘저출산·고령화 컨트롤 타워’를 만들겠다고 이른 공약을 내놓은 것도 이런 바닥 정서를 의식한 행동인지도 모른다(기사 바로가기). 유감스럽지만 그가 내놓은 공약도 새로운 것이 많은 것 같지는 않다.

 

이 정도라도 고향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수도권 거주자, 특히 젊은 연령층은 이른바 ‘지방’ 문제에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읍내’까지 나가도 제대로 된 병원이나 극장 하나 없다는 불만은 머리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 내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돈벌이나 일자리, 학교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지방 문제가 지역과 계층, 연령을 아우르는 관심사가 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지방 자치라는 명목으로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처럼 굳어져 왔기 때문이다. 효율성과 경쟁력의 ‘각자도생’. 2014년 기준 1천 1백여 개에 이른다는 지역 축제하며, 심지어는 동계올림픽 유치에도 움츠러드는 지역의 몸부림이 어른거린다.

 

 

결과는 모든 것의 상품화다. 서울역을 비롯한 수도권의 철도역과 버스터미널의 광고판을 보라. 고속철도 영상 광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온통 지역 특산물 아니면 축제, 몇 군데는 산업단지 팔기에 바쁘다. 지방 대학의 광고까지 보태면 지역을 모두 내다 파는 바겐세일 장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각자도생의 노력은 눈물겹지만, 성공 사례는 드물다. 처음부터 이 문제는 지방만으로 풀 수 없는, 각 지역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국가적 과제가 아니었던가. 지역 축제와 산업공단, 경제자유구역의 가능성에 목을 매지만, 무슨 과학적 근거가 있다기보다는 단순한 희망 사항에 가깝다.

 

지역과 지방 문제의 핵심에 돈(재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있다면, 이는 처음부터 전국의 문제, 국가적 과제를 벗어날 수 없다. 거창하게 분권형 지방재정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사회 전체 재정을 어떻게 배분해야 할 것인지를 다루는 것이면, 그것을 뭐라 말해도 우리 모두의 문제다.

 

꼭 설 연휴를 지내서가 아니라 지방 쇠퇴 또는 소멸 문제는 올해 몇 가지 정치적 기회를 맞았다. 모두 저출산·고령화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는 데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 개헌 국면에서 주목받는 지방분권형 개헌도 가벼운 주제는 아니다. 문제이자 과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하는,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면 ‘패러다임’이다.

 

통계로 나타나는 전국적인 지역 소멸 현상은 놀랍지 않다. 10여 년 전부터 예상한 결과가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니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래도 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의 가능성은 심각하다. “오는 2040년 전남 297개 읍면동의 33%인 98개가, 2040년 이후에는 47%인 140개가 지방소멸 가능성이 있다”(기사 바로가기).

 

문제는 이에 대한 대응. 백가쟁명의 해결 방법 가운데, 이른바 ‘압축형’ 도시 정책이 최근 주목을 받는 접근법(또는 패러다임)이다. 이는 “무분별하게 외곽으로 팽창하는 도시에서, 주거 및 상업 등의 도시 기능들을 혼합하고 높은 밀도로 이용하게 하는 실천방안”이라고 한다(마강래. <지방도시 살생부>. 개마고원 펴냄. 189쪽).

 

농촌의 압축형 도시는 “도시공간 구조를 집약화하고 공공시설을 재배치하듯…농촌 중심지 활성화 사업을 활용해 거점지구를 형성하고 인근 배후마을들과 연계된 생활권을 형성하는” 방법을 가리킨다(기사 바로가기).

 

이렇게 주장할 때의 문제의식은 알겠다. 궁여지책으로 보이는 이런 방법이 통하는 곳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대응이 몇 군데서나 효과가 있을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거점지구를 형성하고 도시기능을 복합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이 말처럼 쉬운가. 각 지역에 맞는 일자리 육성이 가장 중요하다는데, 여기에 이르면 현실 가능성은 더 멀어 보인다. 역시 ‘어떻게?’가 문제다.

우리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에 관심이 크다. 먼저 “모든 지자체가 왜 소멸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묻고 싶다. 압축형 도시 정책에서는 (대놓고 말하지 않아도) 일부 읍·면·동은 소멸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도 질문은 남는다. 왜 모든 시·군·구가 ‘살아남아야’ 하는가? 20년 뒤 전남과 경북의 어떤 군이 없어지는 것이 누구에게 왜 문제인가?

 

현재의 지방소멸론에는 행정과 권력의 시각이 두드러질 뿐 ‘사람’이 빠져 있다. 어느 장관이나 도지사, 시장·군수가 걱정할 것 같은 내용뿐이다. 결국은 그게 그것, 같은 것이라 말하지 말라. 누구의 시각에서 어떤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어느 길을 갈지 달라진다.

 

무슨 군의 인구가 유지되어야 하고 지자체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질 높은 삶이 보장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간단한 이 원리는 압축형 도시에도 지방분권론에도 그리 강조되지 않는다.

 

사람 중심의 관점에서 보면 압축형 도시조차 모든 지역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물신화된 신조처럼 보인다. 도시공간 구조를 집약하고 거점지구를 형성하자는 논리를 확장하면, 전국 규모에서 수도권에 집중하자는 주장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경제 규모와 효율성만 따지면 당연히 그런 결론에 이른다. 비수도권이 쇠퇴하는 것은 그냥 두거나 기껏해야 압축하는 정도로 충분할 것이다.

 

사람, 지금 그곳에 사는 주민의 질 높은 삶에 초점을 두면 ‘지방 살리기’가 아니라 ‘사람 살리기’가 된다. 우리 시·군·구는 없어질 수도 있지만, 주민 모두가 예외 없이 행복하고 높은 삶의 질을 누리도록 노력하는 것.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행정조직이 아니라 사람에 초점을 두면, 정책도 바뀐다. 압축도시나 지역형 일자리 같은 정책이 아니라, 쇠퇴하는 지역에 대응하는 병의원, 학교, 교통, 복지, 주거 정책을 고민하는 것이 앞선다. 얼마 전의 불행한 사건인 밀양의 화재 참사에 대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시각이 필요하다. 사람 중심의 삶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기존의 지자체 구분과 행정 시스템을 넘어야 한다. 패러다임을 이렇게 바꾸는 데에 중앙 정부와 광역 정부의 역할이 있다. 각자도생하는 시·군·구가 혼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주도하는 것, 이에 바탕을 두고 시·군·구의 경계를 넘는 접근을 해야 삶의 어려움을 줄이고 사람을 살릴 수 있다.

 

두 개 군을 합해서 인구가 7만이 되고 주민들에게 더 좋은 의료와 복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를 누가 할 것인가? 중앙정부나 광역 정부가 몇 개 시군에 걸쳐(경제성이 없는) 공공의료기관을 운영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까? 농촌 지역 거주자(또는 농민)에 대한 기본소득은 어떤가?

 

한 가지 더, 사람 중심의 접근이 오히려 시·군·구 소멸을 늦출 수도 있다. 본래 인구감소와 지역 쇠퇴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가 아닌가? 지역의 양극화는 1960년대 이후 지속해 온 수도권 집중과 농촌 이탈 정책이 불러온 필연적 결과다.

 

인과관계가 이럴진대, 삶의 질이 나빠지고 정주 조건이 악화하는 가운데 인구가 유지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먼저 삶의 질을 개선하고(원인), 다음으로 사람들이 살기 원하는 지역을 기대해야 한다(결과). 일자리 만들기가 이와 무관할까?

 

설날, 우리가 보고 걱정한 것은 인구가 적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나빠진 삶과 그 조건이다. 그것이 현실이고 구체성이 아닌가. 주체가 불분명한 지방 소멸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지금 그곳에 사는 주민의 삶이 어떻게 나아질지 고민하는 것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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