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언덕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흔히 한국사회에는 ‘전국민 건강보험’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졌을 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한국의 의료보장 체계는 건강보험과 의료급여로 이원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료급여는 건강보험료와 의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부족한 저소득층의 의료이용을 보장하는 제도로, 2017년 기준으로 약 148만 명(전체 인구 2.9%)이 급여 혜택을 받고 있다. 비록 소수지만 이들도 엄연히 국민인 만큼 ‘전국민 건강보험’이라는 말은 분명 어폐가 있다.
따라서 현재 정부가 중점을 두고 있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대책'(소위 ‘문재인 케어’)과 ‘의료급여 보장성 강화대책’은 (밀접하지만) 서로 다른 이슈로 봐야 한다. 물론 법적으로는 건강보험의 비급여 항목이 급여가 되면 이와 연동해서 의료급여 역시 급여를 적용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최근 상급병실이 급여화되면서 의료급여 환자의 본인부담금을 건강보험 가입자와 동일하게 부과한 것에서 알 수 있듯(☞바로 가기),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가 반드시 의료급여 보장성 강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의료이용시 의료급여 환자의 본인부담이 적다고 해서 보장성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비급여 진료와 차별적 의료 수가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이처럼 정부가 의료급여 보장성 강화에 상대적으로 소홀한 것은 의료급여 재정을 절감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 2006년 의료급여 보장성 확대 이후 재정지출의 폭증을 경험한 이래 정권의 성격과 상관없이 일관되게 지속되어 온 정책기조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기조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논거는 일부 의료급여 수급자의 무절제한 의료이용 때문에 소중한 세금이 낭비된다는 것이다. 실제 2016년 의료급여 지출은 약 6.6조 원으로 건강보험 총지출 70조원의 약 10%에 해당할 만큼 크다. 정부는 이들의 ‘도덕적 해이’를 바로잡고 불필요한 비용지출을 줄이기 위해 본인부담금 부과, 사례관리 사업과 같은 여러 정책들을 도입했다. 또 최근에는 비용증가의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는 장기입원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적극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바로 가기).
이러한 정부의 정책 방향에 상응하듯 학계에서도 이러한 정책도입이 의료급여 수급자의 의료이용(횟수와 비용)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연구들이 주를 이뤄왔다. 즉, 해당정책이 비용절감이라는 정부의 목표달성에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판별하는데 초점을 두었던 것이다. 반면에 그러한 정책이 수급자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물론 분석에 필요한 자료를 확보하기 어려운 탓도 있겠지만, 이러한 연구경향의 이면에는 수급자의 부적절한 의료이용 억제가 더 중요하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경제적 효율성 측면만 강조하다 보니 의료급여는 세금을 축내는 천덕꾸러기로 비춰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의료급여제도는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해주면서 사회전체의 질서와 연대를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컨대 오늘 소개할 미국 하버드대학 연구진의 연구결과는 우리에게 좋은 사례를 제시한다.
이 논문은 한국의 의료급여와 유사한 저소득층 의료보장제도인 미국 메디케이드(Medicaid)의 효과를 분석한 것으로 지난 2012년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게재되었다.(☞논문 바로 가기 : 메디케이드 확대 이후 사망률과 의료접근성 변화)
메디케이드는 원래 저소득층 어린이와 그 부모, 임산부, 장애인만이 가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2000년대 초반 몇몇 주들에서 부양자녀가 없는 저소득층 성인까지도 메디케이드에 가입할 수 있도록 자격조건을 완화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러한 변화에 주목한 연구팀은 이들 주와 비슷한 인구학적 특성을 가지면서 해당 정책을 시행하지 않은 인근 주들과의 비교를 통해 메디케이드 자격조건 완화가 각 주의 사망률과 건강수준 등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구체적인 연구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연구팀은 2001년과 2002년에 메디케이드 자격조건을 완화한 세 개 주(애리조나, 뉴욕, 메인)와 이에 대조되는 주(네바다와 뉴멕시코, 펜실베니아, 뉴햄프셔)를 각각 선정한 다음, 정책변화 전후 5년을 분석기간으로 설정하여 유사실험설계의 이중차이 분석을 수행했다. 한국의 시군구에 해당하는 카운티 단위의 총 사망률(20~64세), 주관적 건강수준, 경제적 이유로 인한 의료이용 미충족 등을 결과변수로 사용했다.
분석 결과, 메디케이드 가입조건의 완화는 총 사망률 감소와 유의한 관련성이 있었다(그림).
<그림> 메디케이드 자격조건 완화 전후 기간의 조사망률(A)과 메디케이드 가입율(B) 추이.
연령 보정 사망률의 경우, 메디케이드 자격조건이 완화되면서 사망자 숫자가 십만 명당 19.6명(6.1%) 줄어들었고, 특히 유색인종, 고연령층, 빈곤율이 높은 카운티의 거주자일수록 사망률 감소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표1).
<표 1> 메디케이드 자격조건이 완화된 주에서 성인(20~64세)의 총 사망률 변화
또한 자격조건의 완화는 메디케이드 가입률 증가(25%), 보험 미가입율 감소(15%), 비용 관련한 치료지연율 감소(21%), 주관적 건강수준 향상(3%) 등과 유의한 연관성을 보여주었다(표2) 물론 이러한 변화가 앞서 언급한 사망률 감소를 얼마나 설명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표 2> 메디케이드 자격 조건을 완화한 주에서 성인(19~64세)의 의료 접근성과 주관적 건강 수준의 변화
이 연구의 제한점은 이들 주에서 얻은 분석결과를 다른 주로 일반화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또한 사망률 비교 과정에서 인종, 성별, 연령을 제외한 다른 개인수준의 특성들도 고려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무작위 실험설계가 아닌 탓에 인과성 여부를 판단하기에는 불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디케이드 자격조건의 완화, 즉 저소득층 의료보장성 강화가 사망률 감소에 기여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새로운 근거를 제시했다는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 연구에서 주목할 또 다른 지점은 메디케이드와 직접 관련이 없는 고소득층과 65세 이상 노인층에서도 보험 보장성과 의료접근율이 함께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적은 비율이지만 노인층의 사망률 역시 감소했다. 연구팀은 메디케이드 가입자의 증가로 의료기관, 특히 안전망 기능을 하는 병의원들의 재정상황이 개선되면서 긍정적 파급효과(spillover effects)가 발생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했다.
한국의 의료급여는 주별로 운영되는 미국과 달리 전국적인 단일 제도이기 때문에 이러한 연구 설계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또한 전반적 의료시스템이 미국과 달라서 이 결과를 그대로 적용하는데 무리가 따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연구를 통해 수급조건 완화라는 의료급여 보장성 확대가 수급자를 포함한 우리사회 전체의 건강향상에 기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한국사회에도 엄격한 수급조건에 막혀 의료급여 자격을 얻지 못한 비수급 빈곤층이 존재한다. 최근 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소득과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인해 수급을 받지 못하는 빈곤층 숫자가 약 144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바로 가기)
이러한 의료급여 사각지대 문제를 해결하고 저소득층 의료보장제도를 강화해 나가기 위해서라도 그동안 소홀히 다뤄져 왔던 의료급여제도의 긍정적 효과를 규명하기 위한 보다 많은 연구들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통通’에서 매주 금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