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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국가는 무능해보였을까? -인공혈관 사태의 씁쓸한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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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인공혈관이 바닥나 선천성 심장병 환자들이 수술을 못 받는, 비극적이면서도 황당한 사태가 벌어졌다. 해당 재료를 독점 생산하던 외국 회사가 30개의 인공혈관을 긴급하게 제공하기로 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지만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그 와중에 이 사태가 정부 탓인지 기업 탓인지를 따지는 싸움이 벌어졌다. 의대생을 대표하는 단체가 ‘이윤보다 생명’이라는 표현을 쓰며 기업을 책임을 묻는 성명서를 냈다가 의료계의 손가락질을 받고 성명을 철회하는 사건도 있었다. (☞관련 기사: 고어소아용 인공혈관 공급 중단 사태에 우려 표하는 의대생들, 의대협이 인공혈관 공급 중단 비판 성명 철회한 이유). 가장 어이없는 것은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할 수 있었던 일이 해당 회사의 본사로 쫓아가 읍소하고 가격을 높여주는 것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정부는 이번 사태에서 왜 무력한 모습을 보여야 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의 실무자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하지만 지난 2018년 호주 국립대학과 캐나다 오타와 대학에 소속된 다섯 명의 연구자가 <세계 정책 Global Policy>에 발표한 논문 “공공정책 수립 과정에서 국제투자협정의 내면화 된서리 효과의 개념적 틀 만들기”는 하나의 유용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 논문에서 ‘된서리 효과(regulatory chill)’ 란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에 포함된 투자자-국가 소송제(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 때문에 제소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공공정책 도입을 꺼리는 것을 말한다. 연구진은 국제투자협정의 내용이 된서리 효과를 유발할 수 있는지 확인한 연구, 이런 효과가 실제로 발생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정책 결정자들을 면담한 연구, 된서리 효과가 발생한 것으로 짐작되는 사례를 검토한 연구들을 모아 그 내용을 종합했다.

 

연구진이 제시한 틀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국제투자협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위협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으며, 정책결정자들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이를 고려하게 된다. 첫째, 특정 정책으로 인해 손해를 봤거나 손해를 볼 것이라고 예상하는 기업이 국가를 대상으로 소송을 내겠다고 직접 위협하는 방식이다. 인도네시아가 노천 채광을 금지하려고 하자 여러 외국 회사들이 정부를 제소하겠다고 위협했던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노천채광은 지표를 깍아서 채굴하는 방식으로 침식, 미세먼지, 수질 오염 등의 환경 파괴가 심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출처: Pixabay https://pixabay.com/photos/quarry-open-pit-mining-removal-2279602/

둘째, 비슷한 정책을 도입했던 다른 국가가 기업에 소송을 당한 전례가 있는 경우이다. 예컨대 2012년 호주 정부가 민무늬 담뱃갑을 도입했다가 필립 모리스로부터 소송을 당했던 사례는 다른 나라의 정책결정자들에게 된서리효과를 미친다 (참고자료: 호주의 민무늬 담배갑은 어떻게 승리했나?).

 

민무늬 담뱃갑은 담배 포장에 담배의 맛, 향, 회사 이름(로고 제외)만 기재할 수 있으며, 흡연의 폐해를 알리는 경고 그림과 문구를 강조하는 포장 규정을 의미한다. (사진출처: 세계보건기구 http://www.who.int/features/2013/australia_tobacco_packaging/en/)

 

셋째, 정책결정자들이 국제투자협정의 규정을 살펴보면서 특정 정책을 시행했다가는 소송을 당할 수도 있겠다고 우려하는 경우이다.

 

물론 정책결정자들이 위협을 느낀다고 해서 모두 된서리효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정치적, 경제적 요인의 영향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국가가 도입하려는 정책이 힘이 센 기업의 이익을 침해하는 일이라면 된서리 효과로 이어지기 쉽다. 반대로 정책결정자들의 정책 도입 의지가 강하고, 이것이 시민들의 탄탄한 지지를 받고 있다면 설령 소송을 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라도 된서리 효과는 일어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다시 인공혈관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번 사태가 일어나고 잠잠해진 과정에서 실제로 된서리 효과가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국가가 ‘규제 샌드박스’처럼 시장과 기업을 돕는 일에는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시민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관리와 규제에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2019년 3월 현재, 한국이 맺은 자유무역협정(FTA)은 16개나 된다. 이중 이미 발효된 것이 15개이고 한 개가 타결되었으며, 협상 중인 것도 6개나 된다. 2001년에 글리벡, 2018년 리피오돌, 2019년에 인조혈관이 비슷한 문제를 일으킨 것에서 알 수 있듯 한국이 세계무역시장에 더 강하게 결합할수록 이런 문제는 더 빈번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처럼 포장된 자유무역협정의 복잡한 세계 안에도 여전히 국가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이 논문의 필진들이 말하듯 건강과 관련된 공공정책에 일어나는 된서리 효과를 막기 위한 정책 결정자의 정치적 의지, 그리고 이에 대한 시민들의 정치적 지지 모두가 간절한 시점이다. (☞관련 글: 생명을 시장에 맡기자는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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