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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병원의 가치는 누가 판단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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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경(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시민건강연구소에서는 매년 한 해의 보건의료와 건강권 이슈를 정리하여 시민건강실록을 발간한다. 올해 초 발간된 『2019 시민건강실록』은 지역 의료 불평등을 한 꼭지로 다루었다. 지방의 의료시장이 붕괴되면서 공공의료의 역할이 더욱 절실해진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지역 주민의 요구, 지역 정치의 반응, 중앙정부의 계획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개선 성과는 변변치 못했다. 지역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공공병원을 설립하고자 할 때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는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는 것이다(관련기사: 공공의료는 경제성이란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예비타당성 조사는 일정 규모 이상의 재정이 투입되는 사업에 대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조사를 통해 예산 낭비를 방지하고 재정 운영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절차이다. 여러 측면을 평가하지만, ‘객관적이고 중립적’ 조사의 핵심은 모름지기 경제성 분석이다. 단순화하면 사업에 투입된 비용에 대비하여 이익이 더 커야 타당성을 인정받게 된다. 공공병원 설립의 비용-편익 분석에서 ‘비용’에는 병원을 짓는데 드는 총 사업비와 이후의 유지관리비가 포함된다. ‘편익’에는 병원 이용을 통해 얻게 되는 인구집단의 직간접적인 경제적 비용 절감과 건강개선 효과 등이 포함된다. 수익이 우선 목적이 아닌 공공병원으로서는 이러한 비용-편익 분석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비용-편익의 산출에서 어떤 계산식을 적용할 것이냐보다 중요한 것은 계산에 포함되는 항목들을 누가 어떻게 정하는가이다. 산술 자체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일지 모르지만, 특정한 항목들을 선별하는 과정은 가치와 철학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중요한 비용으로, 혹은 편익으로 간주해야 하는가는 사회적 숙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제주영리병원 허용 여부나 서부경남지역 공공병원 설립 이슈에서처럼, 공론화 방법을 적용한 의사결정과정의 숙의민주주의는 이제 우리사회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그러나 경제학 모델링 같은 ‘전문 영역’에 일반 시민이 관여한 사례는 잘 찾아보기 어렵다. 오늘 소개할 캐나다 연구팀의 논문은 최근 국제학술지 <사회과학과 의학 Social Science & Medicine>에 실린 것으로, 보건경제학 모델링에서 사회·윤리적 가치판단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논문 바로가기).

 

연구팀은 보건경제학 모델링에 환자와 시민을 참여시키는 명시적인 지침이 없는 것은 가치 판단이 어디에서 어떻게 비롯되는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 연구는 캐나다 브리티시콜롬비아 주의 대학, 병원, 연구소 등 다양한 조직에서 활동하는 보건경제학자 22명을 인터뷰하고, 질적 분석을 수행했다. 인터뷰 질문은 과학연구에서 발생하는 윤리와 가치판단에 관한 네 가지 이슈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보건경제학자들로 구성된 인터뷰 참여자들은 보건경제 모델링 과정에서 시민의 관점과 사회적 가치판단이 일어날 수 있는 지점, 그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이 글에서는 사회적 가치판단이 개입되는 세 가지 지점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우선, 어떤 가정에 기초해서 모델을 만들 것인가 하는 단계부터 가치판단이 시작된다. 보건경제학에서의 경제성 평가는 어떤 치료나 사업이 사회에 도움이 될 것이라 가정하고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핵심 가정에 따라 편익이 더 잘 드러나도록 평가요소를 설정할 수 있고, 무엇을 편익으로 포함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간접적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평가의 주기, 편익의 범위, 수요를 반영하는 인구집단의 연령기준에 따라서도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둘째. 모델에 포함되는 항목의 범주를 구분하는 과정에도 사회적 가치가 개입했다. 많은 연구자들이 성별과 젠더를 범주로 포함하는 데 어려움을 토로했다. 자료 자체가 남/여로만 구분하여 수집된 경우가 대부분이라 생물학적 성별이 아닌 사회적 개념으로서 젠더를 적용하기 충분치 않다는 점도 문제였지만, 반대로 일부 다양한 젠더를 고려하여 수집된 자료라 하더라도 표본 크기가 충분치 않아서 문제가 되었다. 이런 자료는 포함하기도, 버리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이주민 같은 소수자 범주의 적용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문제다. 수요뿐 아니라 편익을 측정하기 위한 항목의 범주도 어떤 관점과 가치를 적용하는지에 따라 평가에 유리하거나 불리할 수 있었다.

셋째, 모델의 초기 가정과 범주 단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회적 가치는 분석 결과와 그 다음 단계들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그 크기는 점점 더 커진다는 것이다. 이를 폭포효과라고 한다. 많은 연구 참여자들은 모델 설계 단계의 선택과 결정이 단계가 진행되면서 가치 효과가 누적되고, 예를 들면 특정 집단을 차별하거나 명백히 존재하는 차별을 가리는 등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는 급하게 만든 초기 모델이 검토 없이 다음 단계 분석의 기초 모델로 적용되는 것에 우려를 표한 사례도 있었다.

 

가치판단이 이루어지는 지점을 알아야 그것을 공개할지 말지, 어떻게 공개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경제성 평가에서 사회적 가치 판단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판단이 작동하는 지점들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더 나은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공병원 설립의 타당성을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평가가 과학적이고 중립적인 것처럼 포장하기보다는, 어떤 관점에서, 어떤 가치에 의해 영향을 받는지에 대해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바람직한 가치 판단을 위해서는 사회 전반의 우선순위와 더불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입원할 병상이 없어서 집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애가 탔던 코로나19 환자와 그 가족들, 불안에 떨었던 사람들, 함께 어려움을 겪어낸 지역사회 말이다.

 

코로나19와 함께 생활한지도 꼬박 세 달이 넘어간다. 병원에서는 의료진들이 지쳐가고, 긴급한 경제적 지원이 필요한 곳은 점차 늘어나고 있다. 한편으로는 확진자가 줄어들면서 공공병상 부족에 대한 문제의식이 약화되는 것은 우려스럽다. 2015년 메르스 유행을 겪고 나서 공공의료의 취약함이 문제로 지적되었지만, 이후 실제 확충된 수준은 미미했고, 그런 상황에서 코로나19를 맞이했다. 이번에는 좀 달라야 할 것이다. 공공의료 확충을 가로막는 걸림돌을 확인하고, 의사결정 과정에서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반영해야 하는지,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 서지정보: Harvard, S., Werker, G., & Silva, D. (2020). Social, ethical, and other value judgments in health economics modelling. Social Science & Medicine, 112975.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통通’에서 매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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