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새롬 (시민건강연구소 연구원)
10월의 마지막 금요일,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는 수만 명의 시민이 모여 거의 모든 임신중지를 불법화하기로 결정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폴란드의 임신중지 판결이 여성집회로 이어지다”). 폴란드는 OECD 국가 중 합법적인 임신중지의 범위를 가장 좁게 유지해왔다. 폴란드의 집권여당인 법과정의당(PiS)은 민족주의 우파 포퓰리스트 정권으로 분류되는데, 다수당이 된 2015년 이후 전통적 가톨릭 가치관을 지지하며 임신중지서비스 접근을 어렵게 하는 정책을 추진해왔다. 폴란드에서는 연간 평균 약 8만~12만 건의 임신중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 중 ‘합법적’ 낙태는 약 1,100건에 불과하다. 이번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이러한 합법적 낙태 사유의 98%를 차지하는 심각한 태아 기형을 이유로 하는 임신중지를 불법으로 만드는 것이다. 폴란드 여성들은 ‘여성의 필요’가 아니라 ‘종교의 교리’에 따라 법률을 결정하는 정부를 향해 분노를 표했다.
그러나 국가가 임신중지를 불법으로 규정한다고 해서 인공임신중절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임신중절 서비스에 접근하기 위한 여성의 고통만 늘어날 뿐이다.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임신중지를 거부당한 여성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까?
오늘 소개하는 미국의 턴어웨이 연구(Turnaway study)는 임신을 중단하기 위해 의료기관을 찾았지만 주수 제한을 이유로 임신중절 서비스를 거절당한 여성들이 이후 5년 동안 겪은 일을 추적했다. 재생산 건강에 새로운 표준을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뭉친 칼리포니아대학의 다학제 연구팀(Advancing New Standards in Reproductive Health, ANSIRH)은 2008년부터 2010년 사이 미국 전역의 30개 임신중지서비스 제공 기관에서 임신중지 상담을 받은 참여자들을 만났다. 연구진은 연구 참여자를 세 집단으로 구분했다. 첫째, 주수 제한 시기를 3주 이상 넘겨 임신중지서비스를 받을 수 없었던 ‘거절당한 집단(turnaway group)’, 둘째, 주수 제한이 2주 미만으로 남아 아슬아슬하게 임신중지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던 ‘제한임박 집단(near limit group)’, 마지막으로 임신 1분기에 임신중지를 할 수 있었던 집단(first trimester group)이 그들이다. 이들 세 집단의 의료기관 방문 당시 임신주 수는 각각 평균 22.4주, 19.9주, 그리고 7.8주였다.
연구자들은 참여자의 동의를 받아 5년 동안 6개월에 한 번씩 전화로 면담을 진행했다. 첫 번째 면담은 병원 방문 일주일 후에 시작했다. 총 1,132명의 참여자를 모집했고 이들 중 85%인 956명이 첫 번째 면담에 응했고, 이들 중 58%가 5년 동안 이루어진 면담에 빠짐없이 참여했다(관련 연구☞ “턴어웨이 연구의 결과에 대한 검토: 임신중지 거절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지나?”).
여성들이 임신 중단을 결정하게 되었던 가장 많은 이유는 현재 경제적으로 아이를 키울 준비가 되지 않아서(40%)였다. 이어서 시기가 적절하지 않아서(36%), 파트너와의 관계가 이상적이지 않아서(31%), 다른 아이를 키우는 데에 집중해야 해서(29%), 아이를 키울 만한 감정적·정신적 상황이 아니어서(19%) 등이 사유로 나타났다(관련연구 ☞ “미국에서 여성들이 임신중지를 하게되는 이유 이해하기”). 의료기관을 늦게 방문한 이유를 물었을 때 제한임박 집단의 67%, 거절당한 집단의 58%가 임신중절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고 답했다. 이렇게 대답한 여성들은 법적으로 허용되는 이른 시기에 임신중절을 할 수 있었던 이들에 비해 나이가 어리고, 교육수준이 낮고, 가구소득도 적었다. 의료기관 방문이 늦어진 두 번째 이유는 임신 사실을 늦게 알게 된 것과 관련있었다. 제한임박 집단의 43%, 거절당한 집단의 48%가 자신의 임신여부를 늦게 파악하는 바람에 대처가 늦어졌다고 답했다. 예상할 수 있듯, 임신중지서비스를 거절당한 집단에서 임신인지 시점이 가장 늦었다(관련연구 ☞ “미국에서 임신중지 주수제한으로 인한 임신중지 거절”).
가족 구성이나 빈곤, 복지 서비스 이용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임신중지를 거절당한 이후,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된 76%의 여성은 두 번째 면담 진행 시점(출산 후 평균 1.6개월 후)에 배우자와 새로운 가정을 꾸리기보다는 자신의 원래 가족과 살고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거절당한 집단과 제한임박 집단 사이의 가족구성 차이는 줄어들었지만, 임신중지 거절 이후 아이를 낳은 여성들은 대부분 면담이 끝나는 시점에 남자 파트너 없이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또한 임신중지를 거절당한 후 아이를 낳아 기르는 집단은 주수제한에 임박해 임신중지를 하는 데 성공한 집단과 비교해 공공부조를 받을 확률이 높았고, 출산 후 4년 동안 전일제 고용상태일 확률은 더 낮았다(관련연구☞ “미국에서 임신중지를 할 수 있었던 여성과 하지 못한 여성 사이의 사회경제적 결과”). 건강 결과 역시 차이가 있었다. 임신중지를 거절당한 여성들은 나머지 두 집단과 비교했을 때 주관적 건강수준이 더 나빴고, 만성 두통이나 관절통, 비만을 경험할 가능성이 더 컸다(관련연구☞ “임신중지 요청 후 임신을 중단한 여성과 중단하지 못한 여성의 자가보고 신체건강”).
‘턴어웨이 연구’의 책임자인 다이아나 포스터 교수는 2020년, 임신중지와 관련하여 수많은 논문을 출판한 이 연구의 결과를 집대성한 책을 출판했다. 홈페이지를 통해 연구 결과를 요약하여 소개할 뿐 아니라 임신중지와 여성의 재생산 건강에 대한 온라인 강의도 공개하고 있다(관련자료☞ 턴어웨이 연구 홈페이지). 임신중지를 거절당한 여성의 삶을 오랫동안 추적 관찰한 최초의 연구인 턴어웨이 연구는 현재 칠레, 네팔, 튀니지,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다른 나라에서도 진행 중이다. 나라는 다르지만 도출된 결론은 비슷하다. 임신중지의 합법화가 접근성 보장을 위한 전제조건이며, 법적 보장이 실질적 서비스 보장으로 이어지도록 적절한 법·제도가 필요하고, 양질의 서비스 제공을 위한 의료인력 훈련과 지원이 핵심이라는 것이다(관련자료☞ 임신중지서비스 전달과 의료의 질 개선: 임신중지서비스를 거절당한 여성의 경험에 기반한 권고).
한국에서 충분히 논의된 적 없는 것이 이상할 만큼 임신중지는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정치적 의제이자, 건강권의 문제다. 임신중지가 대표하는 여성의 재생산권 투쟁은 전 세계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임신중지에 대한 공론장이 열리는 것이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물론이고 여성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우리의 몸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없다”는 말로 턴어웨이 연구를 소개한 적이 있다.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요구는 면피의 정치로 막아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낙태죄 폐지와 재생산권에 대한 요청을 민주주의의 문제로 보아야 하는 이유다. (끝)
* 참고문헌
Biggs, M. A., Gould, H., & Foster, D. G. (2013). Understanding why women seek abortions in the US. BMC women’s health, 13(1), 29.
Foster, D. G., Biggs, M. A., Ralph, L., Gerdts, C., Roberts, S., & Glymour, M. M. (2018). Socioeconomic outcomes of women who receive and women who are denied wanted abortions in the United States. American journal of public health, 108(3), 407-413.
Miller, S., Wherry, L. R., & Foster, D. G. (2020, May). What Happens after an Abortion Denial? A Review of Results from the Turnaway Study. In AEA Papers and Proceedings (Vol. 110, pp. 226-30).
Raifman, S., Gerdts, C., Grossman, D., DePineres, T., Hajri, S., Harries, J., … & Foster, D. G. (2018). Improving abortion service delivery and quality of care: Recommendations based on experiences of women turned away from abortion care.
Ralph, L. J., Schwarz, E. B., Grossman, D., & Foster, D. G. (2019). Self-reported physical health of women who did and did not terminate pregnancy after seeking abortion services: a cohort study. Annals of internal medicine, 171(4), 238-247.
Upadhyay, U. D., Weitz, T. A., Jones, R. K., Barar, R. E., & Foster, D. G. (2014). Denial of abortion because of provider gestational age limits in the United States. American journal of public health, 104(9), 1687-1694.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프레시안>과 시민건강연구소는 ‘서리풀 연구통通’에서 매주 목요일, 건강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이나 새로운 지향을 보여주는 연구 또 논쟁적 주제를 다룬 연구를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건강 이슈를 사회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건강의 사회적 담론들을 확산하는데 기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