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기고문

[셰어 10월 이슈페이퍼]임신중지는 생각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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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건강연구소 김새롬

 

3년 전인 2017년, 형법상 낙태죄 폐지와 안전한 임신중지에 대한 국민청원이 한 달 만에 23만 명이 넘는 사람의 동의를 얻고,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검은 시위가 열렸다. 같은 해 정부는 전국민 건강보험제도 도입 40주년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행사로 분주했다. 보건복지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 산하 기구는 한국 건강보험이 “인류의 사회보장사에서 보편적 사회의료보험제도를 최단기간에 이루어 냈다”라며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 건강보장 4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심포지엄에서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은 “개인의 능력, 재산,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인권인 건강할 권리를 보장하는 건강보험제도가 급변하는 고령화·저출산 시대에도 잘 작동하기 위해서 예상되는 도전과제에 적극적으로 대비하는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1].

 

나는 궁금하다. 여기서 한국 건강보험의 우수함에 박수를 보내고, 더 나은 제도로의 개선을 약속했던 관료, 정치인, 전문가들은 임신중지가 흔하고 필수적인 의료서비스라는 걸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게 된 여성들이 어떤 곤경과 위험을 무릅쓰게 되는지, 한국의 청소년 출산율은 왜 전세계에서 가장 낮은지 생각해봤을까? 오래전부터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성과 재생산 건강권 보장 없이 보편적 건강보장은 없다! (No universal health coverage without sexual and reproductive health right!)”고 외쳐 왔는데 보편적 건강보장을 달성했다며 자축하는 관료와 전문가들이 유달리 이 영역에 대해서는 듣지도 말하지도 않는 모습은 어떨 때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임신중지 서비스는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 많은 국가의 여성들이 접하는 가장 흔한 수술이다. 2018년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7년 만 15세에서 44세 사이 여성 인구 1,000명당 4.8건의 임신중지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건수를 추정해보면 약 5만 건의 임신중지가 시술되었는데 100% 산부인과 전문의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산부인과 의사 한 명당 한 해 평균 9건의 임신중지 시술을 제공한 셈이다. 이 정도라면 명백히 다빈도 수술인데, 제왕절개와 자궁절제를 주요수술 목록에 포함하고 있는 건강보험공단의 주요수술통계연보는 임신중지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지 않다 [2].

 

임신중지가 여태껏 불법이고 비공식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보험청구를 토대로 집계되는 통계에서 빠지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냐고? 맞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당연함이 어째서인지, 그리고 언제까지 그대로 용인될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헌법재판소는 2021년부터 여성들이 합법적으로 안전한 임신중지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결정했지만 2020년을 두 달 남겨놓은 지금도 정부에는 이 사안을 제대로 다룰만한 부처조차 없다. 임신중지 이슈를 담당하고 있는 보건복지부 인구정책실 출산정책과는 임신·출산·자녀양육 지원에 대한 정책을 주요 내용으로 다루고, 저출생 대응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뿐 여성의 성 건강과 재생산권리라는 단어는 입에도 올리지 않는다.

 

10월 초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이 공개되는 과정에서 “임신중지를 말하고 싶지 않은” 정부의 태도는 더욱 또렷해졌다. 국무조정실에서는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후속 입법 과정에 “목소리를 하나로 통일”하고 “갈등 기간을 최소화”하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는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공개하기 직전 성평등자문위원회의 의견을 수렴했다고 둘러댔지만, 막상 회의에 참석했던 전문가들은 복지부가 법안을 공개하지 않은 채 원론적인 이야기만 반복해 회의를 의견수렴절차라고 부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3]. 여성의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해 임신중지를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하지 않냐는 질문에 민감한 문제라 논의하기 어렵다는 말 한 마디에 정부에서, 국회에서, 학계에서, 공론장이 열리지도 못한 광경을 수도 없이 볼 수 있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말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결정하지 않기의 정치(politics of non-decision making)”가 얼마나 강력한지. 누군가의 필요와 고통을 무시하거나 무마할 수 있는 “갈등”으로 치환하고 용기를 내어 상황을 바꿔보자고 말하는 이들에게 그래도 예전보다 나아지고 있지 않냐며, 기다려보라고 말하는 게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지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모두가 경험하고 있으니 말이다.

 

낙태죄 폐지를 기대했던 많은 이들이 속상하고 분노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요즈음이다. 하지만 낙태죄 폐지와 성과 재생산권리 보장에 대한 투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나는 시간이 우리의 편이라고 믿는다. 아무리 그들이 공론장을 틀어막고 침묵을 강요해도, 생각하고 말하며 연대하는 여성들을 막아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올해 한국 여성들의 임신중지 경험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면서, 여러 번 놀랄 일이 있었다. 우려와는 달리 별다른 어려움 없이 참여자를 모집할 수 있었던 것도 놀라웠는데, 인터뷰에 참여했던 여성들이 인터뷰를 마친 이후 기억을 정리해 추가로 정보를 보내주고, 비난과 괴롭힘을 걱정하던 연구진에게 응원을 보내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인터뷰에 참여했던 여성들은 자신처럼 힘들고 어렵게 임신중지 하는 여성들이 앞으로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연구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앞으로 원하지 않는 임신을 경험하는 여성들이 모멸감을 느끼며 산부인과를 전전하지 않아도 되고, 불결하고 불친절한 병원에서 시술을 무릅쓰지 않아도 되고, 시술 후에도 적절한 상담과 치료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정부에서 추정한 것처럼 연간 인공임신중절을 받은 여성이 최소 5만 명이라있다면, 한국에서 안전한 임신중지서비스가 보장되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다.

 

우리는 계속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한국에서 피임과 임신중지는 어째서 필수의료서비스가 아닌지, 임신중지가 여전히 낙인이 되는 사회에서 여성들이 임신중지 이후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떤 의료기관과 정책이 필요한지, 성과 재생산권리를 보장하는 사회를 향해 가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말이다.

 

[1] e의료정보(2017. 06.20) “40주년 맞은 건강보험, 앞으로 갈 길은?
http://www.kmedinfo.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024

[2] 국민건강보험공단(2019). “2018년 주요수술통계연보”.
https://www.nhis.or.kr/menu/boardRetriveMenuSet.xx?menuId=F3326

[3] 한겨레(2020.10.27.) “성평등자문위 의견수렴 말뿐… 복지부도 낙태죄 입법 일방통행”. http://www.hani.co.kr/arti/society/health/967344.html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기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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