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당선인은 후보 시절, 정권교체를 통해 ‘새 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했다. ‘어떤’ 새 시대인지 아직 짐작조차 되지 않지만, 우리는 이 약속이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다짐이 될 것을 희망한다.
우리는 이미 몇 번의 논평에 걸쳐 이번 선거가 사람들의 고통에 무디다고 평가했다. 시대정신과 역사적 과제에 대한 전망과 구상이 없다는 걱정도 여러 번 보탰다. 당선 인사를 들어도 이 평가와 걱정은 그대로다.
한발 양보해서 ‘정권’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면, 그 목적을 달성한 지금에라도 전망과 구상을 밝혀야 한다. 흔히 하는 말처럼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이 가장 빠른 때다. 더 나은 공동체를 기대하며 출범을 준비 중인 다음 대통령과 정부에 다음과 같이 당부하려 한다.
첫째. 지금까지 외면한 현실의 고통에서 출발해야 한다.
현실을 진단하고 이를 사회적 의제로 만들어내는 과정은 객관적이지 않으며, 불평등한 권력의 위계를 그대로 반영한다. 멀리 갈 것 없이 지금의 공중보건 위기가 어느새 ‘경제’위기라 불리는 것만 봐도 그렇다. 진단은 공약과 당선 인사로 그대로 이어져 고통은 저성장으로 정의되고 고통의 당사자도 마치 경제권력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의 복리와 안녕을 중심에 두면 고통은 다시 정의되고 구성되며, 그 범위는 (모든 수준의) 경제를 넘어 삶의 전 영역에 걸친다. 사람들이 경험하는 고통의 형태가 천편일률이지 않다는 점을 염두에 두는 것도 중요하다.
고통의 (불공정이 아닌) 불평등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단순히 양극화를 말하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고통은 가진 힘이 약할수록 커지며, 서로 다른 취약성이 교차할 때 증폭된다. ‘누구’의 고통인지 집요하게 물어야 하는 이유이다.
다양하고 복잡한 고통을 사람 중심으로 정의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적응된’ 고통과 불평등이 있다면 그것을 드러내는 것, 그리고 늘 주변부에 머물렀던 이들의 고통을 ‘필요’와 ‘요구’로 전환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정치의 역할이 아닌가.
둘째. 다가올 현실의 문제를 진단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내놓을 것.
고통과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이것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그 원인을 제대로 진단해야 한다. 고통과 불평등의 책임을 온전히 개인으로 돌리고 각자도생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것은 명백하게 거짓이다. ‘개별적 불공정’조차 구조적이지 않은 예는 없다.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대가를 받으면서 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금액이 마땅하거나 충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자본의 눈치를 보느라, 국가조차 그 사람의 삶을 존중하지 않는 상황에서, ‘최저 기준’일지언정 삶을 살아낼 길은 그뿐이기 때문이다.
젠더 불평등이 젠더 갈등을 조장하는 행정부처의 존재에서 비롯하는 것도 아니다. 권력의 위계 때문에 생긴 차별과 불평등을 같은 위치에 선 두 집단의 갈등으로 (의도적으로) 축소하는 한,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대안은 결국 사람들의 삶과 안전을 사회적으로 보장하는 길이어야 한다. 새로 집권한 세력은 지금 해결해야 하는 한국 사회 문제와 이를 초래한 원인, 그 대안에 대해 얼마나 논의했는가? 답을 가지고 있는가? 바로 이 기반이 허술하면 집권 기간 내내 우왕좌왕할 공산이 크다.
국민연금을 ‘개혁’하면 노인 빈곤을 줄일 수 있는가? 그렇게 – 노동시간을 늘리고 최저임금을 억제하며 중대재해 처벌을 줄여 – 경제가 ‘성장’하면(우리는 성장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빈곤은 줄고 이미 극심한 불평등은 나아지는가? 의료 산업을 더 적극적으로 육성하면 사람들은 더 건강하고 안전해지는가? 거듭 강조하느니,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시대와 체제의 문제를 진단하고 정치공동체 전체를 아우르는 논의를 시작하라.
덧붙인다. 정권과 공약은 수단일 뿐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목적은 사람들의 더 나은 삶이다. 특히 어떤 공약으로 인해 누군가의 안전과 건강이 위협을 받는다면, 그래서 고통이 더해진다면, 그 어떤 공약이라도 멈추고 바꾸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 또한 다가올 문제를 진단하며 대안을 논의하는 책임을 분담할 것이다. 다만, 이를 시작하고 촉진하는 것은 정치구조로서의 ‘예비 대통령’임을 잊지 말자.
경제든 사회든, 지금의 정책과 정치 구조로는 다른 누구도 이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먼저 나서야 할 곳은 개인이 아닌 정치 구조로서의 ‘대통령’이다. 사실상 정권과도 동의어인 이 ‘제도’야말로 장기적인 국가 의제를 내고 토론을 유도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다(논평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