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방정환 등이 결성한 색동회가 ‘어린이날’을 제정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당시 당선인 신분이었던 윤석열 대통령도 어린이날을 축하하며, 동네 어린이들과 밝게 웃으며 사진도 찍고, 자신의 SNS에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지닌 아이들의 세계를 지켜줄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아이들이 마음껏 꿈꾸고, 뛰어놀 수 있는 건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라고 남겼다(관련 기사 바로보기).
유엔아동권리협약은 2021년 1월 현재 전 세계 196개 국가가 비준한 국제협약으로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비준한 인권조약으로 평가받고 있다. 각 국가들의 실질적인 아동권리보장 상황을 일일이 가늠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아동의 권리에 대해서는 어떤 국가도 관조적으로만 바라보지는 않는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모든 아동은 조건에 관계없이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하고(비차별), 아동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을 결정할 때는 아동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아동 최선의 이익). 아동은 생존과 발달을 위하여 특별하고도 다양한 보호와 지원을 받아야 하며(생존과 발달의 권리), 이들은 자신들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적절한 사회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갖고 자신의 생활에 영향을 주는 일에 대해서 의견을 말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의견을 존중받아야 한다(아동 의견에 대한 존중). 적어도 유엔아동권리협약을 비준한 국가들은 이런 원칙들을 정책과 제도에 반영하고 실질적인 구현을 위해서 노력하여야 한다.
이에 대한 우리나라 아동들의 평가는 어떠할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아 초등학교 4, 5, 6학년생 1,841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했다(관련 기사 바로보기). 전체 응답자중 가장 많은 수가 ‘대통령이 된다면 차별 없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응답했다. 유엔 아동권리협약의 핵심 기본 원칙인 비차별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어린이들은 그리 좋은 평가를 하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많은 어린이들이 ‘나와 친구들’이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금을 살고,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는 현재보다는 더 ‘차별 없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어린이들의 의견을 존중했기 때문일까. 새 정부 국정과제에서는 ‘국가교육책임제 강화로 교육격차를 해소’하겠다고 명시하고 있다. 적어도 어린이·청소년들에 대한 비차별 원칙을 적용한 과제는 이 과제가 유일한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를 들여다보면 밀려오는 배신감을 어쩔 수 없다.
이 과제의 목표는 ‘교육에 대한 국가책임 강화’, ‘소외 없는 맞춤형 교육’으로 요약할 수 있으나 ‘초등전일제 교육’을 제외하고는 무엇을 통해서 국가의 책임을 강화하겠다는 것인지, 어떤 경로로 소외 없는 맞춤형 교육을 하겠다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교육 부문 과제에서 특히 격차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디지털 교육격차인데 초등단계부터 디지털 튜터를 배치하고 AI에 기반하여 기초학력을 제고하겠다는 것, AI 학습시스템과 메타버스 활용 맞춤형 학습으로 사교육 경감을 추진하고 학습 결손을 해소하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공교육 정상화 및 강화를 통한 격차 해소, 지역별 교육 격차 해소, 어린이·청소년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결정하는 다양한 요인들의 격차 해소와 같은 보다 근본적이고 책임성 있는 정책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다. 가히 ‘기승전 AI’ 교육 정책이라 할 만하다.
국가의 교육에 대한 책임성 강화는 AI의 책임성 강화로 대치되었다. AI의 책임성 강화는 관련 산업의 활성화와 이와 연관된 자본 축적 전략 변화와 동일한 의미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코로나19 위기 극복과 디지털·그린 경제로의 전환을 위하여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과 ‘한국판 뉴딜 2.0’에서는 디지털 뉴딜의 핵심 과제로 ‘교육 인프라 디지털 전환’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이는 ‘비대면 산업 육성’, ‘메타버스 등 초연결 신산업 육성’의 일환으로 진행한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이 내용은 윤석열 정부의 교육 분야 국정과제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우리는 지난 논평에서 정치권력의 성격과 관계없이 건강과 보건의료를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키고자 하는 ‘체제적 경향성’의 존재를 확인한 바 있으나 이는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체제적 경향성’은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에서 완벽하게 수렴된다. 이 법은 한 마디로 국가가 어린이·청소년을 포함한 사회구성원들의 의료, 교육, 공공서비스 등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시장 원리를 강화하겠다는 법이다. 하지만 2011년 제 18대 국회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노동시민사회의 반대로 지금까지 법안 통과가 저지된 상황이다. 더불어민주당 역시 이 법안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반대해 왔으나 21대 국회에서는 일부 조항을 수정하여 법안을 발의함으로써 보수정당과 한 배를 탄 셈이다.
어린이날 바로 전 날인 5월 4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퇴임을 앞 둔 마지막 기자간담회에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을 제정하지 못한 것을 가장 아쉬운 점 중의 하나라고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의 110대 국정과제 중 26번 과제인 ‘신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서비스 경제 전환 촉진’에서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제정 추진이 버젓이 들어 있다. 진보정권이라고 했던 이전 정부의 숙원을 보수정권이라고 평가받는 윤석열 정권이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권력이 교육, 의료, 공공서비스 등에 대하여 가지는 태도는 명확하다. ‘산업화를 통한 영리화’, ‘국가의 책임 축소’를 통하여 교육, 의료, 공공서비스를 자본과 시장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버젓이 ‘국가교육책임제 강화로 교육격차’를 해소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교육 분야는 이미 심각한 시장화로 그 격차가 심화되어 있고 코로나19로 인한 원격수업이 사회계층 간 교육 격차를 더욱 확대했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윤석열 정부는 공교육을 정상화하고 국가의 책임을 강화하여 어린이·청소년들이 바라는 ‘차별 없는 나라’를 만드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나마 있는 공교육마저 AI를 빌미로 자본들의 각축장으로 만들려고 한다. 교육을 포함한 어린이·청소년이 성장, 발달하는 데 필수적인 모든 서비스는 이들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차별 없이 권리로서 보장해야 한다. 그것이 국가가 할 일이고 그 방향은 공공성 강화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정부에 촉구한다. ‘아이들이 마음껏 꿈꾸고, 뛰어놀 수 있는 건강한 나라’를 만들고 싶다면 아이들의 권리에 대한 정부의 책무성을 강화하라! 그리고 이제는 당선인이 아닌 윤석열 대통령에게 상기시킨다. 100주년 어린이날에 당선인 신분으로서 SNS에 남긴 다짐을 대통령으로서 확실히 실행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