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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빵을 먹을 수 없다” – 공적 분노의 힘을 모아 산재 체제의 구조를 타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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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처벌법이 올해 1월 시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산업재해(산재)로 인한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다. 오늘 죽음을 애도하고 그 원인을 살펴볼 겨를도 없이 내일 또 다른 죽음의 소식이 들려온다. 일상처럼 반복되는 새로운 산재 사망 소식은 오히려 우리를 그 충격으로부터 둔감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지난 15일 SPC 그룹 계열사의 제빵 공장에서 한 노동자가 소스 배합기에 끼여 사망한 산재 소식은 체념과 무감각 속에 빠져 있던 우리를 다시금 흔들어 깨우고 있다. 단지 피해자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젊은 여성 노동자였다는 안타까운 사연 때문만이 아니다. “피 묻은 빵을 먹을 수 없다”며 해당 계열사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이유는 사람의 존엄성과 생명가치를 경멸하는 자본의 태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비상제동장치와 같은 안전보건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발생한 인재였다. 하지만 시민들을 크게 분노하게 만든 것은 사고 며칠 전 이와 비슷한 끼임 사고가 발생했음에도 별다른 안전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노동자들을 질책했다는 사실과 사고 다음날부터 동료 노동자들에게 사고 현장 바로 옆에서 일을 하도록 지시한 점, 그리고 장례식장에 찾아가 조문객 답례품으로 주라며 빵을 놓고 갔다는 사실들이었다.

 

 

부정적 여론과 함께 불매운동이 확산될 조짐이 보이자 SPC그룹 경영진은 사과 회견을 갖고 안전시스템에 대한 투자계획 등을 밝혔다. 하지만 우리는 위기의 순간을 적당히 넘기려고 내놓는 기업의 약속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이것이 일부 ‘비윤리적’인 개별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명백하다.

 

산재가 반복되고 있는 현실 이면에는 사람의 생명과 건강보다 기업의 이윤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산재 체제’의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지난 논평 바로가기). 그래서 모든 산재는 정치적 문제이고 권력관계 문제이다. 오늘날 기업과 정부, 보수 학계와 언론 등 기득권 세력이 똘똘 뭉쳐 이 구조를 견고하게 형성하고 있다.

 

이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이에 맞서는 대항권력, 즉 시민사회의 권력을 강화해야 한다. 지금의 불매운동과 같이 공적 분노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우리의 작은 연대의 실천들이 결집되고 축적될 때 사회권력의 힘이 커질 수 있다. 이것이 지난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더 크게, 더 오래 분노해야 할 이유이다.

 

그러니 우리가 느끼는 이 분노의 감정을 상담치료를 받아야 할 병리적 증상으로 폄하하지 말자. 다만 이 분노가 불의한 사회구조를 바꿔 나가는 윤리적 감정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단지 특정 기업을 혼내기 위한 불매운동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우선 산재 문제를 개별화하고 탈구조화하려는 산재 체제의 공모자들이 짜놓은 프레임과 작전을 드러내고 해체하자.

 

지금 이 순간에도 이미 실효성을 많이 상실한 중대재해처벌법을 무력화하려는 시도가 집요하게 진행되고 있다(☞ 관련 기사 바로가기). 한편에서는 ‘중대재해감축로드맵TF’를 운영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중대재해처벌법을 비롯해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각종 규제를 없애려고 하는 정부의 ‘이중플레이’와 정책 기조를 향해 우리의 분노를 집중해야 한다.

 

동료 시민의 부당한 죽음을 접하는 일이 더 이상 일상이 되지 않을 때까지 우리가 가진 공적 분노의 힘을 모아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보다 자본가의 이익을 더 중요시하는 산재 체제의 구조를 타파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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