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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분노, 공공의료를 지키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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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기(시민건강연구소 회원)

 

 

한국에서 공공의료의 가치는 무엇일까? 초유의 감염병 재난 상황에서 전체 의료기관의 5% 남짓한 공공병원이 코로나19 입원환자의 2/3 이상을 진료했다. 공공병원이 없었다면 위기 대응은 난망했을 터지만, 지금 정부는 되려 공공병원의 인력 감축을 압박하고 있다. 정부가 내놓은 공공기관 혁신 가이드라인에 따라 전국의 국립대병원이 인력 감축 계획을 제출한 것이다. 심지어 감축 인원 대부분은 코로나 대응에 투입된 간호인력이었다(관련기사: 국립대병원, 간호인력 정원 못채웠는데 인력 감축). 국립대병원 노동조합은 국가재난상황에서 사명감으로 고생한 병원 노동자들을 헌신짝 취급한다고 반발하며 공동 총파업을 예고했다.

 

코로나19 유행이 채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다음번 환자 급증에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나아가 또 다른 감염병 재난이 닥치면 누가 발 벗고 나설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공공병원은 이미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고, 혁신을 가장한 구조조정은 공공병원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조건을 더 나빠지게 만들 것이다. 그 결과 환자와 시민의 안전이 위협받으리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하다. 무엇을 위한 어떤 것인지도 모를 ‘효율성’을 강제하는 권력에 우리는 어떤 힘으로 대항할 수 있을까? 스페인의 공공의료를 지키려는 보건의료 활동가들을 관찰한 연구는 도덕과 가치에서 그 가능성을 찾는다(논문 바로가기 ☞ 스페인 긴축 상황의 보건의료 행동주의에서 나타난 보편적 공공의료의 도덕 경제).

 

스페인은 일반 조세로 재정을 조달하고 모든 사람이 이용 시점에 무료로 서비스를 이용하는 공영의료체계를 운영한다. 1970년대 후반 프랑코 독재 정권이 붕괴하고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건강권이 헌법에 명시되었고, 정부 당국은 사람들의 건강을 책임질 의무를 지게 됐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를 계기로 정부는 ‘재정적 지속가능성’을 위한 긴급조치를 단행했다. 공공 긴축과 민영화 정책의 결과로 많은 보건의료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고 노동 조건이 나빠졌다. 환자들은 더 많은 돈을 부담하게 되었으며 가난한 사람, 미등록 이주민, 실직자들은 의료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려워졌다. 이처럼 긴축과 민영화로 보편성과 평등이라는 도덕적 가치가 흔들리자 사람들은 보편적 공공의료를 수호하기 위한 사회 운동에 나섰다.

 

2012년부터 시작된 공공의료 운동은 스페인 사회 전반에서 긴축정책에 저항하는 ‘분노한 사람들’ 운동의 일환이었다. 논문의 저자는 잘 조직된 네트워크와 그렇지 않은 운동 모두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다양한 공공의료 운동을 ‘보건의료 행동주의(healthcare activism)’라고 불렀다. 저자는 마드리드 주의 활동가들과 1년 가까이 함께 지내며 관찰과 인터뷰, 비공식적 대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료를 모았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무엇을 옳다고 생각하는지, 무엇을 불의하다고 여기는지 분석하고 사람들의 정동이 저항과 실천의 조건이 된다는 점을 포착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시민의 저항 행동은 실제적인 어려움뿐 아니라 도덕적 규범과 가치를 훼손한 것에 대한 분노에서 촉발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도덕 경제(moral economy)’라는 개념을 분석의 틀로 삼았다. 스페인에서 보편적 공공의료의 도덕 경제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었을까? 사람들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고, 어떤 사회 변화에 분노했던 것일까?

 

첫째, 마드리드 종합병원의 노동조합 회의에서 노동자들은 예산 감축으로 인한 어려움을 증언했다. 한 간호사는 병상이 부족해 동료들과 언쟁해야 하고, 병상을 분리할 커튼조차 충분치 않으며, 저녁 식사를 운반할 트레이가 부족해 같은 일을 두 번씩 반복해야 하는데, 물자와 공간 부족으로 일상 업무가 훨씬 힘들다고 토로했다. “말도 안 된다,” “끔찍하다”는 표현에 노동자들의 분노가 묻어났다. 예산 삭감과 민영화는 노동 조건을 나쁘게 만들었고, 이는 다시 환자에게 잠재적 위험 요소가 되었다. “우리는 몇 달, 몇 년 동안 이 지경입니다. 철저한 방치예요. 이 정책의 목표는 공공 영역을 파괴하는 것이라고요. 일부러 나빠지게 만들고, 뒤이어 민간에 넘기는 정책에 맞서야 해요.” 노조 활동가는 전투적인 연설로 여러 모임과 대화를 요약했다.

 

둘째, 노조 활동가의 연설 끄트머리에 드러나듯이, 시민들은 거리 시위나 집회뿐 아니라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민간 기업이 긴축정책의 혜택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마드리드에서 경제위기는 민영화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이용되곤 했는데, 어떤 활동가는 “마피아”라는 표현으로 민간의 병원 관리 기업과 의료 분야 정치인의 유착 관계를 꼬집었다. ‘분노한 사람들’ 운동을 통해 정치화된 의사는 ‘민영화를 향한 열망’에 대해 말했다. “그들은 공적 자금의 공백을 넓혀서 누군가 이득을 취하게 만들어요. 우리(공공병원)가 30% 삭감되는 만큼 민간 기업은 20~40%의 돈을 더 버는 거죠.” 활동가들은 민영화 시도에 분노하며 이를 “파렴치하고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 표현했다. 이들의 도덕적 분노는 정부가 마땅한 의무를 저버리고 공공복리를 훼손한다는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셋째, 스페인의 공영의료체계는 독재 정권 이후의 민주적 복지 국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활동가들은 민주화 과정에서 획득한 의료서비스에 대한 권리를 마음 깊이 내면화했다. 이들에게 보편적 공공의료의 후퇴는 독재 사회의 기억을 소환하는 것이었고, 보건의료 영역을 넘어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지’에 관한 문제였다. 2013년 가을, 수천 명의 시민이 공공의료 운동 1주년을 기념하며 모였다. 스페인 공공의료를 향한 애정과 자부심이 이들을 결집하게 만든 기치였다. 한 해 동안 보건의료 노동자와 일반 시민이 함께 ‘신자유주의의 공격’에 맞선 결과, 마드리드 대법원은 주 정부의 민영화 계획을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다. 노조 활동가는 그들의 승리가 비단 법적인 의미에 국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 운동의 또 다른 성취가 있어요. 공공의료가 우리 사회의 기초적인 기둥이라는 사실을 일반 시민들이 받아들이게 된 거예요.”

 

스페인 공영의료체계와 달리 한국은 공동으로 돈을 모아 지출하는 건강보험제도를 운영하지만, 의료서비스 대부분은 민간의료기관이 제공한다. 지속된 저투자의 결과로 공공병원이 양과 질 모두에서 뒤처지게 된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막상 위기가 닥치자 한 줌의 공공병원이 우리 사회의 보루 역할을 수행한 것은 모두가 목격한 사실이다. 이를 계기로 공공의료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나, 정부는 거꾸로 감축을 이야기하고 있다. 스페인의 사례는 소중한 것이 망가지고 공동의 가치가 모욕을 당한다는 분노가 시민 저항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온존되고 있는가?

 

*서지 정보

Kehr, J. (2022). The moral economy of universal public healthcare. On healthcare activism in austerity Spain. Social Science & Medicine, 115363.


수많은 언론이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의학 기술이나 ‘잘 먹고 잘 사는 법’과 관계있는 연구 결과를 소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하루에 ○○ 두 잔 마시면 수명 ○년 늘어나” 같은 것들입니다. 반면 건강과 사회, 건강 불평등, 기존의 건강 담론에 도전하는 연구 결과는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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