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풀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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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동계올림픽 활용법

[서리풀논평] 평창 동계올림픽 활용법   평창 겨울 올림픽 행사가 시작되었다. 뒤늦게 기간을 확인해보니 무려 17일간, 2월 25일이 되어야 끝난다. 지상파 3사가 같은 중계를 매일 하고 있는 데다(이렇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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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화재와 성추행, 그리고 불평등한 권력관계

[서리풀논평] 병원 화재와 성추행, 그리고 불평등한 권력관계     밀양에 있는 중소병원에 이어 서울의 대학병원에서도 불이 났다. 빨리 불길이 잡혔다니 다행이고, 무엇보다 사람이 상하지 않았다니 고맙다. 이번에는 그래도 스프링클러가 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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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장성, 제천, 밀양,…참사를 막을 ‘제3의 길’이 있나?

[서리풀논평] 포항, 장성, 제천, 밀양,…참사를 막을 ‘제3의 길’이 있나?   제천 화재 참사를 논평한 것이 딱 한 달 전이다(논평 바로가기). 아직 기억이 생생한데, 이번에는 밀양에 있는 한 병원에서 사달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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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 사람과 삶을 위한 기술로

[서리풀논평] 블록체인, 사람과 삶을 위한 기술로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이 일상용어가 되었다. 비트코인은 투자와 투기의 ‘광풍’에 휘말렸고, 정부가 이를 규제하겠다고 나서자 급기야 세대 문제로 비화했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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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미래? ‘착취’를 멈추자

[서리풀논평]  청년이 미래? ‘착취’를 멈추자     한국인은 아직 ‘퇴보’에 익숙하지 않다. 1960년대부터 거의 모든 것은 커지고 많아졌으며 좋아졌다. 굶지 않게 된 데서 출발했지만, 삶을 지탱하는 물질은 상전벽해로 바뀌었다.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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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풀 논평] 누구를 위한 어떤 ‘일차의료 강화’인가?

  보건과 의료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새해 벽두 관심을 기울이는 한 가지 주제가 ‘일차의료’다. 국회에서 양승조 의원이 ‘일차의료발전특별법’을 제안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대한의사협회, 가정의학회, 일차보건의료학회, 지역사회간호학회 등이 이 법안을 ‘환영’한다는 성명을 냈다고 하니, 그동안 잘 볼 수 없던 풍경이 아닌가 싶다. 먼저 우리 의견부터. 우리는 원칙적으로 일차의료를 키우고 강화하는 모든 시도와 노력을 환영하고 지지한다. 법률, 시범사업, 행정조치, 예산, 건강보험 개편, 그 무엇이라도 좋다.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주장과 요구, 연구, 성명서도 마찬가지다. 일차의료가 사회의 관심사가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별법’이라니, 이번에는 일차의료가 주목을 받고 뭔가 변화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이번에도(!) 사태를 낙관할 수 없다고 본다. 냉소나 회의 때문이 아니라 과학과 합리성에 기초한 객관적 전망이다. 4년 전 <서리풀 논평>에서 지적한 상황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서리풀 논평 동네 의원이 ‘빅5’를 대신할 수 있을까 참고로, 이 논평은 ‘2부작’이니 연결해서 읽어야 완성된다). 이 법안이 입법에 실패하거나 변질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본래 뜻대로 법안이 통과해도 바뀌고 나아지는 것은 그저 시작일 뿐, 많은 과제가 그대로 남을 것이 틀림없다. 작은 발걸음은 그것대로 의의가 있을 것이나, 비현실적 기대 지나친 희망은 오히려 해롭다.     전망을 밝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현재를 규정하는 허약한 ‘일차의료의 정치’ 때문이다. 정치가 약하다니? 유력 국회의원이 그것도 보건복지위원장이 직접 입법에 나섰는데,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맞다. 국회와 이 법안만 보면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정치가 작동한다고 할 수도 있다. 유무가 아니라 어떤 정치인지가 문제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차의료의 정치는 입법과 국회를 넘어 일반 대중에 이르는, 민주주의의 일반 과제에 이른다. 둘은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고 또한 연속적이다. 국회와 입법이라는 현실 정치는 좀 더 너른 정치를 부분적으로 반영하고 실현한다. 어떤 정치가 얼마나 강한가? 정치는 ‘가치’를 둘러싼 경쟁과 각축을 다룬다고 할 때, 유감스럽게도 한국 사회에서 일차의료는 그런 가치가 될 만한 ‘권력’을 가지지 못했다. 일차의료가 전혀 정치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일차의료를 둘러싼 직접적인 이해관계만 봐도 금방 드러난다. 정치에(또한 정책에) 참여하고 영향을 미치는 행위자 대부분에게 ‘일차의료 강화’는 그리 절실하지 않다. 아쉽거나 절실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일부는 그런 것이 있다는 것 무엇 때문에 그런다는 것도 아예 모른다. 의료인과 의료기관은 그나마 말이라도 알만한 처지지만, 대부분이 무심하다. 대학병원과 병원? 그 안에서 일하는 수많은 의사와 의료 전문직들? 무심함이 대부분이지만 잘 알더라도 일차의료의 정치는 순방향으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상황이 같이 변하지 않는 한, 일차의료 강화는 오히려 그들의 이해관계를 거스르는 대안이 될 공산이 크다. 이때 일차의료라는 의제는 억압되거나 배제된다. 동네 의원은 병원과 완전히 다르지만, 현재가 결정적으로 고통스럽지 않으면 이들에게도 일차의료 강화의 동력은 약하다. 동네 의원의 상황이 나빠져 무언가 변화가 절실해도 여럿의 이해관계는 같지 않다. ‘강화론’이 말하는 그 일차의료가 무엇인지에 따라 일차의료의 정치 또한 크게 달라질 것이다. 안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같은 ‘특수’ ‘단과’ 의원과 내과, 소아청소년과, 가정의학과 같은 곳이 같을 수 없다. 정치인은 어떤가? 정치인에게는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도 이해관계지만, 현실의 정치적 이익은 그런 가치 실현의 동기를 압도한다. 건강, 보건, 의료 과제는 더 어려워, 한국에서는 일부를 제외하면 건강 정치의 현실적 이익은 거의 없다. 특별법을 발의한 양승조 위원장만 보더라도 셈법은 간단하다. 법안을 성공적으로 입법한다고 해서 국회의원 재선이나 자신의 정치적 성장에 무슨 도움이 될까? 장애물이 나타날 때 좌절하지 않고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할 동기가 있을까? 행정부와 공무원도 정치적 이해를 따져봐야 한다. 그들의 이해관계가 효율적인 ‘통치’에 달려있다고 할 때, 모든 개혁과 변혁은 이해관계를 거스르기 쉽다. 통치를 위협할 만한 문제 상황이 생기지 않는 한, 변화는 곧 위험이고 손실이 아닌가. ‘보건의료체계’와 ‘의료전달체계’, ‘일차의료 강화’는 지식과 규범의 수준에 머무르고, 실제 행동으로 바뀌기 어렵다. 가장 중요한 정치 행위자가 남았으니, 바로 대중, 시민, 인민이다. 이들에게 일차의료는 무엇일까? 장담하건대, 무엇이 문제인지는커녕 대부분 용어도 잘 모를 것이다. 건강과 보건의료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만족한다는 뜻이 아니다. 생활과 문제는 정의되지 않고, 따라서 프레임으로서의 ‘약한 일차의료’라는 개념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날 것인 경험과 그에 기초한 지식은 일차의료 강화에 적대적일 가능성마저 있다. 첨단 의료와 명의, 대학병원을 찾아야 하는 마당에 ‘일차’와 ‘동네’에 묶어둔다면 누가 좋다고 할 것인가? 이 상태로는 일차의료를 지지하는 어떤 정치적 행위도 일어나기 힘들다. 이상의 셈을 합하면 일차의료를 밀고 갈만한 이해관계의 방향은 명백하게 (-)다. 영향을 미치거나 의견을 가질 만한 그 누구에게도 변화는 절실하지 않고 현상 유지가 더 편하다. 일부에게는 이익이 있더라도, 그것은 아주 작고 추상적이며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로서 이해관계의 정치가 힘을 발휘할 가능성은 미미하다. 장황할 정도로 이해관계의 정치를 말했지만, 모든 정치를 비관하기는 아직 이르다. 정치는 이해관계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그 결과물로서의 정책도 마찬가지다. 문제가 ‘실재’하는 한, 대안의 정치에는 여전히 기회가 있다. 언제 어떻게 기회가 올지 모르지만, 인구 노령화, 비용, 의료에 대한 불만 그 무엇이라도 일차의료가 가장 유력한 대안임은 틀림없다. 문제와 대안이 정치적 기회로 만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지식’ 기반이 튼튼해야 한다. 이 지식은 의학이나 보건, 질병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사회질서, 사회제도의 합당한 배치에 대한 일정한 지식”을 가리킨다(셸던 월린.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후마니타스 펴냄, 142쪽). 보통의 용법으로는 지식이라기보다 ‘될 법한’ 미래나 상상에 가깝다. 특히 그것은 전문가나 체계가 아니라 ‘사람 중심’의 관점에 기초한 것이다. 다음은 앞에서 언급한 <서리풀 논평>의 일부다. “형식이 된 제도와 체계와 정책을 중심에 놓으면, 본질은 놓치고 관료적 목표만 남기 쉽다. 또한 의사와 병원, 의료인과 전문가끼리 뜻을 모아봐야 한계를 넘지 못한다.,..(중략)…평범한 시민과 환자의 시각에서, 그들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무엇보다 시민이 참여하는 가운데에, 일차의료의 가치와 방법을 새롭게 가다듬는 것이 급하다.”     둘째, 능동적 정치에는 기획과 기획자가 필요하다. 기획자는 문제와 이를 해결하는 대안을 드러내는 데 헌신하는 행위자(집단, 세력)이다. 이들은 “중요한 정치/정책 참여자가 문제와 대안에 관심을 기울이게 할 뿐 아니라, 문제와 대안을 결합하고 이를 정치로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관련 링크 바로 가기, p. 20). 이 두 가지 조건은 아직 ‘필요하다’는 수동형으로 되어 있다. 누가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주체가 될 것인가? 정해진 답은 없다. 시민사회, 활동가, 연구자, 전문가, 이해당사자, 또는 그 ‘연합’, 가능성은 다 열려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 경로를 개척해야 하지만, 지금은 정치적 가시물인 바로 그 ‘법안’이 실천의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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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케어, 누구의 관점으로 어떤 범위에서?

  의사들이 찬바람을 맞으면서 ‘문재인 케어’ 반대 집회를 열었다. 여론은 싸늘했지만, 보건복지부가 협의체를 만들자고 나설 정도면 아주 실패한 결과는 아닌 모양이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대통령도 의사들이 염려하는 것을 이해한다니, 오히려 성공했다고 해야 하나. 성공이면 어떻고 실패면 또 어떤가. 솔직하게 말하면, 의사들의 행동과 정부의 반응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어디 의사뿐이겠는가, 그동안 배운 바로는 의료전문직, 아니 대부분 집단이 비슷하다. 이해관계가 걸린 일마다 집단의 힘을 보이고 의사결정권자를 압박하는 것이 표준 절차처럼 굳어졌다. 이 또한 놀랍거나 크게 문제 삼을 일은 아니라고 본다. 어떤 사회 어떤 사람이든 자기 이해를 지키려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만 있으면 힘을 키워 더 큰 가치를 차지하려는 것도 비판하기 어렵다. 모두가 ‘다양성’을 말하고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마당에, 지도층이니 직업윤리니 하는 책망은 과녁이 빗나갔다. 그게 아니라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다원성의 게임을 하겠다는 것이 문제다. 보건복지부가 의사들의 말을 듣기 위해 협의회를 한다는 것부터 그렇다. 정부는 그저 정치적 제스처라고 말할지 모르나, 집회의 압력으로 새로운 협의를 하는 것만으로 문재인 케어의 ‘민주성’은 크게 후퇴했다.     형식부터 문제다. 직접 이해관계만 생각해도 문재인 케어의 당사자는 의사에 한정되지 않는다. 다른 직종은 물론이지만, 보험료를 부담하는 가입자와 납세자, 환자와 그 가족, 또는 제3자는 어디에 있는가? 언론과 여론으로 충분하다고 보는지 모르지만, 착각이다. 흩어지고 산발적인 의견은 아무 힘이 없다. 그 기울어진 운동장이 평평해져야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보장할 수 있다. 이대로 가면 앞으로가 더 큰 문제다. 미흡한 민주주의와 정치력, 강고한 관료주의가 어우러져 문재인 케어를 ‘침식’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역사적 교훈으로 보건대, 지금 추스르지 않으면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말할 것이 많으나 크게 두 가지 원칙만 다시 확인하려고 한다.   첫째, ‘사람 중심’의 원칙을 다시 세우고 지켜야 한다. 문재인 케어가 달성하려는 목표는 (정책 의도와 무관하게) 큰 이견이 없다고 믿는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큰 비용 걱정 없이 필수 보건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닌가? 비급여를 몽땅 없애거나 무슨 체계를 가지런하게 정리하는 것, 누구의 수입을 보장하는 것은 그 목표를 이루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OECD 평균치와 비교하여 보장성이 떨어지느니 보장률을 얼마로 올리느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동의하겠으나, 옆에서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잊기도 쉽다. 정책을 추진하는 쪽과 그 정책이 내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쪽이 모두 마찬가지다. 추상적이고 사회적인 가치가 내 생활과 이해관계보다 앞서기 어렵다. 사람 중심의 원칙을 다시 세우자는 이유다. 건강과 보건, 그리고 그 정책을 관통하는 ‘사람 중심성(people-centeredness)’은 최근의 세계적 화두이자 경향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제안한 내용을 보면 (통합적인) 사람 중심의 보건의료는 “질병이 아니라 사람과 지역사회를 보건체계의 중심에 두고, 사람들을 서비스 수혜자의 수동적 위치가 아니라 스스로 건강을 책임지는 역할을 하도록 역량을 강화하는” 것을 가리킨다(관련 링크 바로 가기). 문재인 케어에서 사람 중심의 ‘체계’를 논하는 것은 역부족이니, 먼저 “사람과 지역사회를 보건체계의 중심”에 두는 것으로 인식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그 첫째 과제는, 다른 어떤 것보다,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사람들의 고통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건강보험의 보장성 한 가지만 생각해도 이 필요는 다르지 않다. 정부에 묻는다. 그 흔한 여론조사라도 한번 했는가? 평범한 회사원, 늘 병원에 다니는 농촌의 독거노인, 애를 키우는 젊은 부부, 비정규 노동자, 청년 실업자, 그들은 무엇을 간절하게 원하는가? 사람 중심의 문재인 케어는 지금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고통에서 출발해야 한다.   둘째, 문재인 케어는 단지 ‘비급여’를 줄이고 ‘급여’를 늘리는 차원이 아니어야 한다. 당국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현실의 이해관계와 이를 둘러싼 정치는 점점 한 가지 문제로 수렴한다. 비급여의 포획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다. 문재인 케어는 ‘보편적 건강보장’이라는 세계적 목표와 일맥상통한다. 참고로 이 말은 영어로는 ‘universal health coverage’, 약자로는 ‘UHC’라 부른다. 굳이 영어에 약자까지 소개하는 이유는 적어도 2030년까지 세계 모든 나라가 이를 달성하도록 압력을 받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세계적인 유행(?)이라 할 정도니, 그 정신과 목표를 우리만 모른 척하기 어렵다. 짐작하겠지만, 보편적 건강보장을 위한 (공식적) 국제운동을 지휘하는 것은 세계보건기구(WHO)다. 이 국제기구는 보편적 건강보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이 조직의 새로운 수장인 에티오피아 출신 테드로스 사무총장이 며칠 전 내놓은 메시지는 이렇다(관련 링크 바로 가기). “보편적 건강보장은 단지 건강보험이나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차원을 넘는다. 이는 건강한 생활습관을 촉진하고 질병을 예방함으로써 건강을 보호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빈곤의 한 가지 이유를 없애는 방법이며, 건강과 보건 분야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길이기도 하다. 건강과 노동 능력을 유지하여 포용적 경제성장으로 갈 수 있으며, 성 평등에도 기여한다. 이를 통해 감염병 유행을 예방하고 조기에 발견하며 유행을 억제하는 것도 가능하다.” 단지 세계보건기구의 허황한 소리라 할 수 없다. 이에 연결하여 다시 문재인 케어의 ‘본질’을 확인하자. 보편적 건강보장은 건강증진, 예방, 치료, 재활을 망라한다. 서비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체계도 종합적이다. 의사들이 반발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단지 건강보험 급여와 수가만 어떻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보건의료체계 전반을 같이 손봐야 하는 과제다(관련 링크 바로 가기). 시스템 전체가 움직이지 않으면 문재인 케어가 목표로 하는 ‘작은’ 목표도 달성하기 힘들다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정부에 묻는다. 문재인 케어는 이 정부 전체의 건강체제와 정책, 제도의 목표와 정렬되고 통합되어 있는가?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을 수립했는가? 일차의료와 공중보건체계, 공공보건의료와는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역할을 어떻게 분담했는가? 이 두 가지 원칙은 말 그대로 원칙일 뿐, 실제 정책으로 바꾸는 데는 정치와 정치적 리더십이 작동해야 한다. 안타깝지만 지금까지는 그것이 그리 미덥지 못하고, 체계도 제대로 갖춘 것 같지 않다. 의사 시위를 계기로 심기일전, 원칙을 가다듬고 체계도 정비하기 바란다. 다시 강조하지만, 민주주의와 시민의 역량을 믿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미 존재하는 역량은 작동할 수 있도록, 잠재한 역량은 모양을 갖추고 커질 수 있도록, 민주주의의 담대한 정치적 공간(들)을 창출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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