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참패했다. 한 마디로 지난 2년간 지속된 대통령의 실정을 심판한 선거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그동안 대통령이 보여준 불통과 독선의 반민주주의적 태도와 경제·사회복지·외교·안보 분야 등의 정책 무능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거센 정권 심판론으로 표출된 결과다.
우리는 무엇보다 친기업·친기득권적 정책 기조로 불평등을 심화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삶을 더욱 곤경으로 몰아넣은 실정에 대한 심판으로 해석하려 한다. 또한, 이태원 참사나 오송 지하차도 참사 등 사회적 재난의 반복과 그에 대한 부실하고 무책임한 대응의 연속 역시 심판을 초래한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하다.
재난참사피해자연대 등이 총선 논평에서 밝혔듯이, “윤석열 정부 지난 2년은 세월호 참사 이후 생명과 안전을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의제로 삼아야 한다고 했던 사회적 합의를 거스르는 시간”이었다고 규정될 수 있다(☞관련 자료: 바로가기). 이태원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된 게 그 상징적 사건이라 할 것이다.
마침 내일은 세월호 참사가 있은지 꼭 10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 10년의 역사는 참사 원인을 규명하고 이러한 사회적 비극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피해자 유가족과 생존자, 그리고 이들과 연대하는 시민들의 지난한 투쟁의 과정이었다. 그 노력의 결실로 우리 사회가 법과 제도, 문화와 규범 등에 있어서 조금이나마 더 안전 지향 사회가 될 수 있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먼 것 또한 사실이다. 크고 작은 참사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국가의 재난 안전 체계는 여전히 예방보다는 사후 대응과 복구에, 그리고 구조보다는 현상, 사회보다는 개인 차원의 대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또 매뉴얼을 무력하게 만드는 재난관리의 취약한 리더십 문제 또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이것이 바로 참사 10주기를 맞이한 지금까지도 세월호를 떠나보낼 수 없는 까닭이다. 반복되는 사회적 재난을 막을 수 있는 철저한 예방·대비 시스템 구축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안전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이끌어낼 때까지 참사의 아픔과 교훈을 잊지 않으려는 기억 투쟁을 이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망각에 맞서는 투쟁은 구체적 실천을 동반해야 한다. 우선 안전 사회로의 이행을 견인하는 법·제도적 차원의 시도로서 생명안전기본법 제정 문제에 관심을 갖고 힘을 보탤 필요가 있겠다. 2020년에 발의돼 아직 국회 계류 중인 이 법안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받을 권리(안전권)가 있으며 그 책무가 국가에 있음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관련자료: 바로가기).
물론 국회 전문위원 검토보고서에 담긴 견해처럼 시민의 기본권으로서 안전권 보장은 헌법 차원에서 규정되는 게 더 적절하고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헌법 개정의 현실적 어려움을 고려한다면 일단 법률 차원에서라도 안전권을 명시함으로써 재난안전관리에 대한 국가 책무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 우리는 이러한 법제화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 또한 유념해야 한다. 재난안전체계와 재난 대응 거버넌스는 외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거의 모든 사회 영역과 긴밀히 연결돼 있고, 더 넓은 체제와 구조로부터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안전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결국 생명보다 이윤을 더 중시하는 지금 사회의 지배 원리와 가치체계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그동안 발생한 수많은 사회적 재난의 기저에 자리잡고 있던 공통된 원인, 그것은 바로 맹목적인 이윤 추구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생명과 안전의 가치는 경제적 이윤과 효율성 극대화라고 하는 절대적 원칙에 밀려 늘 평가 절하될 수밖에 없었다.
흔히 모든 생명은 동일한 가치를 지니며, 생명에는 가격을 매길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 현실은 어떠한가? 자본주의 체제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통계적 생명가치’를 부여받고 ‘생명가격표’의 한 등급에 배치되어 있다. 낮은 생명가격표가 붙은 사회적 약자들일수록 더 위험한 환경과 조건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데, “안전은 그것에 합당한 비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매일 매순간 곳곳에 흩뿌려진 사회적 재난의 형태로 산재 사망 사고가 발생하고 있지만, 안전을 위한 규제 강화는 매번 큰 저항에 부딪힌다. 친자본·친기업의 입장에 선 주류 세력은 규제는 비용보다 편익이 클 때만 도입해야 한다면서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는 ‘과도’한 규제를 폐지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노동자의 목숨값을 후려쳐 생명 보호의 편익을 최소화시키기에 가능한 논리일 뿐이다.
지난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공중보건 재난 상황에서도 불공정·불평등하게 책정된 생명가격으로 인해 누군가는 더 큰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 재난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보자면, 지역의료 위기 역시 동일한 구조적 원인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의료자원이 부족한 비수도권 지역 주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공공병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비용-편익 분석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면, 하지만 생명에 가격을 매기는 것이 여러 이유로 불가피하다면,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는 원칙에 입각한 공정하고 정의로운 가격을 매겨야 한다. 그래서 기업과 정부가 취약한 이들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자 하는 강한 동기를 가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그에 따른 대가로 우리 사회가 금과옥조처럼 여겨왔던 경제성장에 대한 집착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계층에서 지금보다 더 많은 비용을 부담해야 할 수도 있다.
때문에 누군가는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중대재해처벌법 등을 반대할지 모른다. 하지만 경제성장과 나의 이해관계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만 생명과 안전의 가치를 부여한다면, 과연 또 다른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나보다 낮은 생명가격표가 붙은 이들에게도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게 곧 나의 안전을 담보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인식과 담론이 주류화될 수 있도록 각자 자리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하는 것. 추모의 정치를 실천하는 또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