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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사망률 줄여준 영국의 ‘기업살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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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14년 7월 2일자 <건강렌즈로 본 사회> (기사 바로가기)

 

높은 자살률과 노인 빈곤율, 낮은 출산율과 행복지수 등은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악성 지표다. 여기에 노동자 건강도 빠지지 않는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분석을 보면, 2006년 산업재해(산재)로 사망한 노동자는 10만명당 20.99명으로 오이시디 21개국 중 단연 1위다. 2위인 멕시코에 견줘 두배가 넘는다. 멕시코는 10만명당 10명, 미국은 4.01명, 영국은 0.7명 등이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산재로 사망한 노동자는 1929명이다. 업무상 질병은 산재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산재 사망자 수는 이보다 더 많을 수 있다.

 

심지어 대기업에서조차 터무니없는 안전사고가 반복해 생기는 것을 두고, 많은 노동단체와 연구자들은 솜방망이 처벌을 중요한 이유로 꼽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업주가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해 노동자가 숨져도, 대부분 집행유예 또는 약간의 벌금형에 그친다. 기업들로서는 안전보건에 투자하는 것보다 벌금을 내는 게 훨씬 경제적이다. 그래서 노동계 등이 내놓는 대안이 영국의 ‘기업살인법’이다.

 

영국은 2007년 ‘기업 과실치사 및 살인법’을 제정했다. 기업 등이 주의 의무를 위반해 노동자가 숨지면, 이를 범죄로 규정하고 상한이 없는 벌금을 부과할 수 있게 됐다. 기존에는 안전보건 담당자나 경영진의 부주의와 범죄 의도를 밝혀야 책임을 물었지만, 기업살인법에서는 기업 등의 부주의가 밝혀지기만 해도 처벌이 가능하다. 결국 상당한 정도의 경제적 압박과 사회적 낙인을 통해 기업이 안전 의무를 강화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이 법이 시행된 2008년 이후 영국의 산재 사망률이 줄고 있다.

 

우리로서는 이 법만도 부러운데, 영국에서는 이마저도 충분하지 않다는 논문이 나왔다. 베리코 영국 웨일스대학 교수팀이 <국제법과 경영>에 발표한 연구를 보면, 기업살인법으로 기소된 기업에 부과된 벌금은 양형 기준인 최소 50만파운드(약 8억원)에 못 미치고 있었다. 글로벌 경제위기 상황을 고려한다며 벌금의 분할 납부를 허용한 판례도 있었다. 이에 견줘 2010~2011년 영국에서 가격 담합으로 기소된 기업들에 대한 벌금은 1000만파운드(약 180억원)가 넘었다. 노동자의 목숨 값을 따질 수는 없겠지만, 불특정 소비자들의 경제적 손실보다 노동자의 목숨이 낮게 평가된 셈이다.

 

우리나라의 산재 사망률은 영국의 30배에 이르는데도 이런 법률마저 없으니 영국을 나무랄 처지는 아니다. 지난 한해 끼임, 추락, 가스 노출 등으로 10명 이상이 숨진 한 대기업 제철회사에서는 고용노동부 장관의 경고와 회장의 기습 방문 뒤 안전 관련 인력과 예산이 늘어나 재해 발생이 줄었다고 한다. 이렇게 예방할 수 있는 죽음이었다니 더 허망하다.

대부분의 산재는 예방 가능하고 그 책임은 기업주한테 있다. 어떤 노동자도 잘 살려 일을 하지, 죽으려

고 일을 하지 않는다. 한국 최초의 사회보험인 산재보험이 이달 50돌을 맞는다. 정부는 포상이나 공모전 등 여러 행사를 준비중이다.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정부가 기념행사에서 기업살인법을 제정해 노동자의 건강을 보호하지 않는 기업에 철퇴를 가하겠노라 깜짝 선언을 하는 모습 말이다.

 

고한수 시민건강증진연구소(health.re.kr)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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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 소개된 논문의 서지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Paul Verrico, Philip Crosbie. Setting sanctions – a comparative paper considering corporate offences. International Journal of Law and Management 2013;55(5):361-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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