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현행 낙태죄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헌법불합치’가 결론이라고 하지만 ‘위헌’과 같은 뜻이라 생각한다). 2020년까지 낙태와 관계된 법을 개정해야 하니 약 일 년 반이 남았다. 애초에 법에서 출발한 일, 이제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낙태죄 폐지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논점이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헌법재판소 판결을 전후해 이미 여러 단체와 언론이 짚은 내용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좋으나 싫으나 우리 사회가, 아니 국가(정부와 다르다!)가 많은 문제를 결정해야 할 터, 우리 관점과 주장을 밝히는 기회로 삼는다.
미리 분명히 해둘 것은 낙태죄 위헌결정 이후 우리가 결정해야 할 많은 사항이 정치·경제·사회적 자장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어떤 논의에서도 사회적인 것, 즉 ‘누구를 위해’와 ‘왜’를 반드시 물어야 하는 이유다. 몸과 과학(또는 보건의료) 기술과 사회가 한꺼번에 만나는 이 문제를 어느 한쪽으로만 재단하면 반드시 틀리고 또 위험하다.
첫째, ‘낙태죄’를 없애야 한다.
낙태를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옹호하거나 비난하거나, 임신 초기는 어떻고 중기 이후는 어떤지, 논쟁하고 판단할 수 있다. 문제는 낙태를 처벌하는 것, 그것도 임신을 중지한 당사자를 벌하는 문제다. 우리는 어떤 낙태라도 그것을 죄로 만들어 형법으로 처벌하는 것, ‘낙태의 범죄화’를 반대한다.
위헌은 헌법이 가치에 어긋난다는 뜻이다. 헌법은 현실에 존재하는 국민국가(‘대한민국‘)가 존립하는 근거이자 그 구성원을 규율하는 원리가 아닌가. 낙태에 왜 헌법, 즉 국가권력이 직접 개입하고 처벌하려 하는가? 언제부터? 무엇을 위해? 낙태를 허용(!)하는 시기를 뒤로 좀 미룬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처벌하면 음성적인 낙태가 더 늘어난다는, 실무적 이유로 처벌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개인을 규율하거나 통제하는 핵심수단이 범죄화이고 처벌이다. 모든 것을 양보해도, 낙태를 죄로 처벌하는 것은 그 구성원인 임신한 여성 당사자를 위한 복리가 아니라, 여성과 임신과 낙태를 다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바꾸는 일이다.
죄를 없애면 사회적 혼란을 어떻게 하느냐고? 이것이 우리에게 공기처럼 익숙한 바로 그 국가주의적 관점, 그것도 가부장적 시각에서 나오는 걱정이자 질문이다. 그 국가나 사회가 어떤 국가와 사회를 말하는지, 그리고 어떤 혼란을 걱정하는지는 지극히 편파적이다.
둘째, 임신한 당사자의 고민, 고통, 자기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아니, 존중을 넘어 인정하고 사회적 결정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기본이다.
낙태와 낙태죄에 대한 수많은 논의와 반대와 ‘훈계’에는 권력의 불평등이 숨어 있다. 혼란을 걱정하고 임신을 중지하는 당사자를 처벌하겠다는 것부터 그렇다. 임신한 여성이 국가에 피해를 주거나 사회를 혼란하게 하는 잠재적 범죄자인가?
여성의 도덕과 윤리? 지식과 판단능력? 자기결정과 자율? 여성은 열등하거나, 반사회적이거나, 반국가적인가? 도대체 무엇을 왜 걱정하는가? 여성은 처벌하면 순응하고, 처벌하지 않으면 방종하거나 무분별하게 행동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피할 수 없어서 낙태를 선택하는 당사자야말로 가장 큰 고통과 번민 가운데 결단한다. 나와 가치관이 다르다고, 내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규범이나 실정법에 어긋난다고, 그 결정을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다.
셋째, 낙태는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의료 ‘서비스’가 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낙태의 ‘의료화’에는 반대한다. 먼저, 의료 서비스로서의 조건에 대해서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의 주장을 참고하기 바란다(바로가기).
의료화(medicalization)란 모든 현상과 문제를 의료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해결하려는 시도와 경향을 말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의학과 의료를 해석과 결정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 것이다. 22주라는 의학적 지식(얼마나 불확실한가!)을 기준으로 죄와 처벌을 정하면, 하루 이틀이 모자라거나 넘는 임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적극적으로 아기를 가지려 하거나 피하거나, 임신을 유지하거나 중단하거나, 단지 생물학적 현상을 넘는다. 보건의료의 역할은 핵심적이지만 한 부분일 뿐이며, 임신과 낙태를 둘러싼 모든 관계는 사회·정치·경제·문화의 총합이다. 여성건강만 하더라도, 유산유도약이 만능이 아니며 모든 이가 그 혜택을 볼 수도 없다.
곧 논란의 중심에 진입할 ‘모자보건법’은 임신과 낙태의 보건의료뿐 아니라 ‘사회적 결정요인’을 담아야 한다. 이는 또한 모자보건법과 법률을 넘어 여러 사회체계와 제도에 닿을 수밖에 없다. 가난하거나 장애가 있는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좀 더 근본적으로는 저 완고한 젠더 불평등을 그대로 두고는 나아져도 아주 조금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낙태와 처벌을 넘어 당사자의 권리, 즉 ‘재생산권’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재생산(reproduction)’이 적절한 용어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가장 널리 쓰이는 말이니 그대로 따른다). 재생산권을 가장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재생산에 대한 모든 영역과 측면에서 보장되어야 하는 개인적·집단적·사회적 권리라 할 수 있다. 좁게 봐도 피임, 임신, 임신중단, 출산, 양육과 보육에 대한 보편적 권리를 모두 포함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재생산권은 그 이상이다.
성(젠더)을 가리지 않으며(남성이나 성소수자도 누려야 할 권리), 개인의 권리인 동시에 집단적 권리이기도 하다. 반드시 임신과 낙태, 건강과 보건의료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재생산에는 예외 없이 불평등과 차별이 따르고 경제와 문화가 깊이 개입하니, 권리 또한 그곳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특히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따른 심각한 차별과 불평등을 잊지 말 일이다.
우리는 권리의 내용뿐 아니라, 권리인지 아닌지, 어떤 권리인지, 누가 권리를 보장받고 누가 책임을 지는지, 논의하고 결정하는 과정과 그 구조에 대한 권리까지 재생산권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리의 내용을 구성하는 과정과 방법도 민주적이고 평등하며 공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재생산권이야말로 극심한 젠더 불평등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교차되는 지점에 있으니, 어떻게 보면 ‘권리를 가질 권리(the right to have rights)’에 앞서 ‘권리를 요구할 권리’ 또는 ‘권리를 주장할 권리’에서 출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혼란스럽고 복잡한, 때로 격렬한 논쟁이 있겠지만, 우리는 낙관한다. 낙태죄 폐지는 성, 젠더, 재생산, 불평등, 좀 더 나은 사회를 논의할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가 아닌가. 이제 새로운 시작이니, 앞으로도 방향을 벼리고 힘을 내자는, 응원과 연대의 다짐을 함께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