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연 (시민건강연구소 회원)
코로나19 대유행은 보건의료 인력과 병상, 의료자원의 수급과 분포의 지역간, 부문간 심각한 불균형을 드러내면서 우리 사회에 보건의료의 공공성에 대한 다양한 논의에 불을 지폈다. 지금 당장은 코로나19의 지역사회 전파를 막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지만 이런 문제들은 지역보건의료나 공공의료체계 구축같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정책 속에서(관련자료: 믿고 이용할 수 있는 지역의료강화대책), 더 나아가 코로나19 이후의 전면적인 보건의료체계 공공성 강화 논의 속에 더욱 심도깊게 다루어져야 한다.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이 약하다는 대표적인 근거로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사회경제적 수준이 비슷한 다른 국가들보다 낮다는 사실이 언급된다. 전체 의료비에서 공공재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8년 기준 63.8%로 OECD 국가 평균에 비해 현저히 낮고, 환자의 본인부담 비중이 36.2%로 OECD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공적 건강보험의 낮은 보장성은 민간 의료보험 시장을 크게 확대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미국 뉴욕대 와그너행정대학원의 고한수 박사는 이처럼 규모가 커진 한국의 보충형 민간의료보험(이하 실손보험) 제도가 가입자들의 의료이용 양상과 공적 건강보험의 재정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논문을 국제학술지 <사회과학과 의학>에 발표했다 (☞논문 바로가기: 한국 보충형 민간의료보험의 도덕적 해이 효과).
2008~2014년의 한국의료패널 자료를 분석한 결과, 실손보험 가입은 의료서비스 이용의 빈도와 강도를 증가시켰다. 실손보험의 도덕적 해이 효과는 의료서비스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실손보험에 가입하면 동네 의원에서 치료 가능한 질환도 병원을 방문할 확률이 높아졌다. 실손보험 가입자의 병원 입원 빈도도 증가했는데, 수술 목적의 병원 입원은 16.3%, 건강검진과 같이 수술 외 목적의 입원도 28.8% 증가했다. 입원일수와 (공적 건강보험이 보장하지 않는) 6병상 이하의 입원실 사용도 함께 증가했다. 이러한 결과는 실손보험이 비급여 서비스에 대한 가격부담을 크게 낮춤으로써 불필요한 의료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높인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나아가 저자는 실손보험이 유인하는 과다치료, 과잉진료 및 비급여 이용의 증가가 공적 건강보험에 추가적인 비용을 발생시키고, 전체 보건의료체계의 효율적인 작동을 위한 정부의 여러 정책들을 무효화시킨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정부가 상급종합병원의 불필요한 이용을 막는 일종의 문지기 역할로 ‘요양기관 종별 외래 본인부담 차등정책’을 실시하지만, 실손보험 가입으로 본인부담비가 줄어들면 문지기 기능은 유명무실해 질 수밖에 없다.
보험에서 ‘도덕적 해이’는 개인이 보험에 가입한 후 불필요한 의료이용이 증가하는 경향을 일컫는데, 이 연구는 도덕적 해이를 피보험자의 부도덕한 행위로 설명하기 보다는 실손보험이 발생시키는 효과라고 평가했다.
왜냐하면 실손보험이라는 상품을 구매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보험료를 냈는데 최대한 이용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비합리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건강보험의 저수가에 불만을 품은 의료기관도 비급여서비스 처방을 늘리면서 손실을 보전하고 이윤을 남긴다. 어쩌면 지금까지 정부는 실손보험을 공적 건강보험의 낮은 보장성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과 저수가에 대한 의료기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손쉬운 해결책으로 활용해왔는지도 모른다. 정부의 이런 계산(혹은 방치)로 가입자는 계속 증가하여 2018년 기준 실손보험 가입자 수는 3,421만 명에 달한다.
모든 시민들이 실손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연령이 낮을수록, 동반질환이 적을수록 실손보험에 더 많이 가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필요가 큰 사람일수록 실손보험에 가입할 가능성이 낮은 것이다. 오히려 위험 회피 성향과 같은 개인의 특성이 실손보험 가입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동했다.
연구에서는 공적 건강보험의 보장률이 낮은 한국에서 실손보험이 노인과 저소득 가구에게 가장 큰 후생 효과를 발생시킨다는 실증적 근거도 제시한다. 질병이 발생했을 때 가장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들은 건강한 사람들을 선택적으로 가입시키는 민간 의료보험사의 차별적 정책 때문에 가입단계부터 배제되고 있다. 한국의 실손보험을 ‘제2의 건강보험’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다. 저자는 정부가 건강보험 보장성을 급진적으로 강화시킴과 동시에 실손보험의 위험선택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마련해야한다고 강조한다. 비급여항목의 급여화 이후에도 여전히 소수의 비급여항목은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험업계에서는 실손보험의 손해율이 해마다 불어나는 것에 대한 우려가 크다. 문제의 원인으로 항상 지목되는 것이 환자의 도덕적 해이와 의료기관의 과잉진료다. 이에 대한 해결책도 ‘선의의 가입자’를 보호하기 위해 ‘보험을 악용하는 소수의 가입자’를 막고 의료기관을 규제하는 미봉책에 그치고 있다 (☞관련 기사: 선의의 가입자 울리는 실손보험). 민간 의료보험을 관리·감독하는 금융위원회는 지난 달 ‘실손의료보험 상품구조 개편’ 추진 계획을 발표하며 “공·사 의료보험을 함께 발전”시키겠다고 밝혔다 (관련 자료: 건강보험 비급여에 대한 관리 강화 및 실손의료보험의 상품구조 개편추진). 실손보험이 의료이용을 왜곡하고 전체 보건의료체계의 효율성을 저해하며 불평등을 조장하는 기형적인 상품이라는 사실에 또다시 눈을 감은 것이다. 국민들을 ‘의료소비자’로 일컫는 데서 금융위원회의 관점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한국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 강화는 민간 의료보험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없이 불가능하다.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와 공공보건의료 강화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민간 의료보험의 활성화와 보건의료서비스의 상품화가 개혁의 방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개혁에는 전 국민의 건강증진과 질병예방을 책임지는 보건복지부도 주체로 나서야 한다.
*서지사항
Hansoo Ko (2020), Moral hazard effects of supplemental private health insurance in Korea, Social Science & Medicine. Volume 265, November 2020, https://doi.org/10.1016/j.socscimed.2020.113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