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각 정부 부처들은 주요 업무 추진계획을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정권교체 이후 맞이하는 첫 신년 업무보고인 만큼 새 정부의 ‘야심찬’ 계획들이 포함되었다. 보건복지부도 ‘1.촘촘하고 두터운 약자복지 확대, 2.생명·건강 지키는 필수의료 강화, 3.지속가능한 복지개혁 추진, 4.보다 나은 미래 준비’를 핵심 추진과제로 하는 한 해 계획을 밝혔다(☞바로가기).
과제 제목만 놓고 보면 다 교과서적인 이야기 같지만, 표현 하나하나 윤석열 정부의 정책 철학과 이념에 따라 치밀하게 선택된 정치적 용어들로 봐야 한다. 예컨대, ‘약자’복지를 내세운 것은 취약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선별 복지에 힘을 쏟겠다는 의미인 것으로, 그만큼 사회 구성원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 복지에는 덜 집중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필수의료’도 마찬가지다. 필수의료와 ‘비(非)’필수의료라는 경계를 긋고 필수의료에 해당하는 영역에 대해서만 적극적인 역할과 책임을 맡겠다는 노선을 밝힌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과연 의료를 필수와 비필수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는지부터 따져볼 문제지만 일단 여기서는 논외로 하자. 대신에 우리는 새 정부가 말하는 ‘필수의료’의 정치적 용법과 더불어 ‘필수의료 강화론’이 노리는 정치적 효과가 무엇인지에 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필수의료 강화는 윤석열 정부의 핵심 보건의료 정책기조다. 대통령 후보 시절 “필수의료 국가책임제”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110대 국정과제에도 “필수의료 기반 강화”가 포함되었다. 또 이 달 안에 복지부는 「필수의료지원대책」을 확정·발표할 예정이다.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수단으로서 필수의료를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 책무라는 점에서 필수의료 강화는 그 자체로 바람직한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필수의료가 가진 개념적 모호성 때문이다. 용어의 익숙함과 달리 필수의료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포괄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관점과 맥락, 목적에 따라 필수의료 영역이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정부가 필수의료를 최대한 좁게 규정하고 필수의료 강화를 추진할 경우 오히려 퇴행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새 정부의 정책기조에서 이런 우려가 엿보인다. 신년 업무보고에서 복지부는 “생명에 직결되거나 수요감소·기피과목 등”의 필수의료 분야를 강화하겠다고 밝히면서 “중증·응급, 분만, 소아 진료”체계의 강화를 언급하였다. 실제 정책적 개입 여부의 측면에서 미뤄 볼 때, 이는 곧 이러한 조건에 해당하는 의료행위만 필수의료로 인정하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문재인 정부에서 제시된 필수의료 개념에 비해 상당히 축소된 것이다. 2021년 발표된 「2차 공공보건의료 기본계획」에서는 필수의료를 지역·계층·분야에 관계없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보편적 의료’로 규정하면서 “1.응급·외상·심뇌혈관·암 등 중증의료, 2.산모·신생아·어린이 의료, 3.재활, 4.지역사회 건강관리(만성질환, 정신, 장애인 등), 5.감염 및 환자 안전 등”을 예시로 들었다.
생명과 ‘직결’되지 않아서인지 모르겠으나 윤석열표 필수의료 강화계획에는 재활, 지역사회 건강관리, 환자안전 분야가 빠져 있다. 그만큼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 영역이 줄어든 셈이다. 물론 대신에 그만큼 응급의료나 중증질환 치료 분야에 더 집중하려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작년 말에 공개된 「건강보험 지속가능성 제고 및 필수의료 지원 대책(안)」(12/8)을 살펴보면 그런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다.
“중증‧응급 환자에 대한 대응체계 미흡”, “필수의료분야 인력 부족” 등의 현황 진단은 문재인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관한 방법론에서 뚜렷한 차이가 나타난다. 문재인 정부는 ‘공공보건의료 강화’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문재인케어)’를 통해 필수의료 보장을 강화하고자 했다.
반면 윤석열 정부는 이러한 전임 정부의 정책노선을 부정하면서 전혀 다른 전략을 꺼내 놨다. 문재인케어 때문에 늘어난 과다의료이용과 비급여 진료비 지출을 줄여서 재원을 확보하고 이를 공공정책수가로 활용하여 필수의료를 강화하겠다는 계획이다. ‘건강보험 지속가능성 제고방안’과 ‘필수의료 지원대책안’을 함께 묶어서 발표한 것이나 문재인케어 전담부서였던 ‘의료보장심의관’을 ‘필수의료지원관’으로 개편한 것도 이런 의도에서일 것이다.
비급여 관리 강화를 통해 필수의료 강화를 이끌겠다는 발상은 참신하긴 하지만 바람직하지 못하다. 필수의료 보장은 정부가 책임져야 할 과제로서 필요하다면 건강보험 재원이 아니라 정부 재정을 투입하는 것까지 고려해야 한다. 수가 보상 정책이 보완적 차원에서 병행될 수 있겠지만 이것이 핵심 수단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즉, 건강보험 지출 개혁을 통하여 건강보험 재정만으로 필수의료를 보장하겠다는 접근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또한 문제는 2~3배 높은 수가 보상을 한다고 해서 필수의료 인력 양성과 의료취약지의 인력 수급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것인지 하는 것이다. 현재도 비수도권 지역에서는 수도권보다 훨씬 많은 연봉을 제시하고 있지만 자녀교육, 거주여건, 경력발전 등의 이유로 구인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정부는 진료 수가와 가산율을 얼마나 인상해야 경제적 인센티브 구조가 작동할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재원이 추가로 투입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과학적 근거와 정확한 추계를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 “아마 이정도 올려주면 되겠지?”라는 믿음과 추측만 가지고 수가보상 정책에 ‘올인’하는 것은 책임 있는 정부의 자세가 아니다.
물론 ‘필수의료 지원대책안’에는 수가보상 외에도 여러 다양한 세부 정책들이 제시되어 있다. 살펴보면 ‘한국의 의사상’ 도입과 같은 새로운 내용도 일부 눈에 띄긴 하지만, 질적으로 새로운 계획은 찾아보기 어렵다. ‘자발적 네트워크를 통한 협력 체계 구축’과 같은 과제들이 많은데, 그중 대부분은 이미 「공공보건의료발전 종합대책」(2018)과 「지역의료 강화대책」(2019), 「공공의료체계 강화방안」(2020), 「제2차 공공보건의료 기본계획」(2021)에 포함되었던 계획과 대동소이한 것들이다.
이미 추진되고 있는 정책과제를 계승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그동안의 성과에 대한 객관적 평가결과를 함께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처음 시도하는 것처럼 의견수렴 절차를 시작한다거나 담당 기관과 사업의 명칭을 변경하는 식으로 살짝 윤색했을 뿐, 협력체계 구축이 계획대로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한 진단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서 공공병원 신설과 같이 상당한 예산이 투입되어야 하는 과제는 제외되었다.
현재까지 발표된 계획만 놓고 볼 때 우리는 윤석열 정부의 필수의료 강화론에 큰 기대를 걸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필수의료 영역을 축소한 상태에서 정부 재정 투입을 최소화하는 정책수단만 활용하여 필수의료를 강화하겠다는 것은 한 마디로 어불성설이다. 사실 필수의료 강화를 제외하고 보면, “보건복지부는 사회서비스산업부로 봐야 한다”는 대통령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정부의 정책적 관심은 보건의료의 산업화에 집중되어 있다.
정부는 비대면 진료의 제도화를 추진 중에 있고,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통과를 핵심 정책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또 ‘비의료 건강관리서비스 시범사업’을 통해 필수의료 영역의 바깥으로 밀어낸 건강관리를 산업화하려고 있다. 개인 건강정보와 보건의료 데이터에 민간보험회사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있다. 디지털 헬스케어와 바이오헬스 산업 육성을 위해 신의료기술평가제도를 무력화하는 등 각종 규제 폐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윤석열 정부의 필수의료 강화론은 진정성이 있는 정책기조로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이를 (정치적 정당성 확보를 위해) 정부가 책임질 영역을 설정하고 그 경계선 밖은 적극적으로 산업화하겠다는 의미가 담긴 정치적 프레임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한다.
“‘필수’ 개념은 규범적 힘이 있어 국가의 책임과 직접 연결되어 있고, 필수를 명시적으로 정하려는 시도는 이윤 창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영역만 떼어내어 공공으로 밀어내려는 시장의 힘에 포섭되기 쉽다.”
– 김진환 & 김창엽. 2022. 보건의료에서 필수의 의미: 한국에서의 비판적 분석. 비판사회정책. 76, 155-187.
따라서 우리는 정부가 내놓는 이런저런 계획들이 실제 문제 해결에 충분치 않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보건의료 산업화를 이롭게 하는 정치적 효과를 노린다는 점에서 윤석열표 필수의료 강화론의 실체는 결국 보건의료의 공적 가치를 훼손하고 건강권 보장을 위한 국가 책임을 약화하는 통치 전략일 수밖에 없음을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윤석열 정부가 폐기해버린 ‘공공보건의료 강화론’을 다시 꺼내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