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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법 개정을 넘어, 지역주민이 참여하는 진짜 정치개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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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4월 총선을 1년여 앞두고 대통령이 국회의원 선거구제 개편의 운을 떼었다. 대통령의 정치적 셈법에 대한 각종 해석이 등장하고, 야당은 물론 여당조차 대통령의 속내를 가늠하거나 제 이해득실을 따져보며 눈치 싸움 중이다. 여당도 야당도 선거구제 개편에 대한 ‘당론’이 없는 상황에서 과연 4월 전까지 선거구 획정이 가능할지, 획정기한을 넘기고라도 정치적 진전이 있을지 의심스럽다.

 

선거구제 개편을 둘러싼 현재 상황은 6년 전인 2017년, 이듬해 6월 지선을 1년여 앞둔 당시 개헌 논의를 떠올리게 한다. 탄핵 정국이던 2016년 말 국회 개헌특위가 출범했으나 1년 이상 개헌안을 내놓지 못하던 상황에서 대통령이 직접 개헌안을 발의했고, 국회 차원에서 개헌안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당시 야당은 대통령에게 개헌안 철회를 요구했다. 결국 대통령 개헌안은 국회 본회의에서 정족수 미달로 표결조차 무산됐다. 이후 국회 개헌특위는 정개특위로 이어져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등 선거법 개정을 논의했고 더 이상의 개헌 논의는 실종됐다.

 

당시 대통령 개헌안의 여러 내용 중에서도 지방분권과 자치, 주민참여에 대한 지향은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내용에 더해, “대한민국은 지방분권국가를 지향한다”는 조항을 신설한 점, 기존의 ‘지방자치단체’라는 명칭을 ‘지방정부’로 변경하고, “지방정부의 자치권은 주민으로부터 나온다. 주민은 지방정부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데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는 내용을 추가한 점은 상징적이었다. 개헌 논의가 선거법 개정 논의로 쪼그라들면서 지방분권이라는 ‘헌법적 가치’에 관한 사회적 논의는 설 자리를 잃었다.

 

 

개헌이 ‘헌법 개정’을 넘어서 사람들의 삶에 전 방위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대 개혁인 것처럼, 선거구제 개편 역시 정치인의 당락이나 정당구조 개편을 넘어서 사람들의 삶에 속속들이 영향을 미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선거구제 개편이 지방소멸, 지역 간 불평등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지역 대표성 강화의 계기가 될 지도 모른다는 데 희망을 거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희망을 공유하면서, 지난 개헌 논의와 이어진 선거법 개정 논의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정치의 실패를 경계한다.

 

선거구제 개편이 ‘선거법 개정’을 넘어서 ‘정치개혁’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방소멸, 지역 간 불평등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지역 중심 개혁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주민의 관점, 지역주민의 참여를 통한 논의 과정이 핵심적이다. 정치인들만의 논의는 2020년 총선 당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둘러싼 위성정당 꼼수, 2018년 지선을 앞두고 벌어진 개헌안 표결 무산과 같은 현실정치의 무능·무책임, 그에 대한 대중의 환멸을 재연할 가능성이 높다. 반복되는 정치의 실패는 사람들의 정치적 효능감 상실, 낮은 참여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반동적 정치가 등장하는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문제는 종국에 선거법 개정으로 귀결되는 선거구제 개편 논의가 기술적으로 복잡하고, 정치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모든 쟁점과 정치인들의 공학적 셈법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모든 제도라는 게 그렇지만, 선거구제 역시 단순히 소선거구제는 나쁘고, 중대선거구제는 좋다는 식으로 말하기 어렵다. 하물며 지선과 총선에서 논의의 지형이 다르고, 정당과 정치인들의 입장 역시 그 때와 지금이 다르다면? 시민들, 주민들이 모든 논의를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 어쩌면 정치인들이 바라는 것이 바로 이것인지도 모른다.

 

지역 간 불평등의 핵심에 정치가 있다는 점은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역 간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삶의 불평등을 설명하는 ‘원인의 원인’이라면, 정치적 불평등은 바로 그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결정하는, 지역 간 삶의 불평등의 ‘원인의 원인의 원인’이다. 언뜻 ‘자연적’ 현상처럼 들리는 지방소멸, 지역 간 불평등은 ‘수도권에 의한 비수도권 착취’, ‘도시에 의한 농산어촌 착취’라고 제대로 불러야 한다. 지역균형발전이라는 공염불만 외는 대신에, 소멸해 가는 지역, 더 열악한 삶의 조건을 가진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를 더 많이, 더 힘 있게 들어야 한다.

 

두루뭉술하게 ‘정치’를 당위적으로 말하는 대신 ‘건강정치’의 구체적 사례를 대입해 보는 것에 장점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미 널리 알려진 의료 불평등 문제. 의료 ‘공백’이나 ‘사각지대’ 같은 ‘자연적’ 호명을 머릿속에서 지우자. 자원의 배분이야말로 정치의 본령이 아니던가. 왜, 어떻게 수도권과 도시에는 계속해서 더 많은 자원을, 비수도권과 농산어촌에는 더 적은 자원을 배분하는지 물어야 한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농촌과 지방을 살리는 길은 국가와 공공, 비시장적 방식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논평 바로가기), 이 정부는 또다시 민간과 산업, 시장적 방식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중이다.

 

작년 말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건강보험 지속가능성 제고 및 필수의료 지원 대책(안)」에서 ‘공공’이라는 표현은 단 두 곳에서 등장한다. 하나는 ‘공공정책수가’를 통해 적정 보상을 지급한다는 내용, 다른 하나는 ‘어린이 공공전문진료센터’를 운영하는 병원에 대한 사후보상을 도입하는 내용이다. 어린이 공공전문진료센터는 전국에 10곳이 있는데, 이 중 4곳이 수도권에 있다. 비수도권의 센터 운영 병원이 모두 국공립병원인 데 반해, 수도권에서는 4곳 중 3곳이 민간병원이고 2곳은 대기업 병원이다. ‘필수의료’를 지원한다고 하면서 결국 수도권, 민간, 대기업을 지원한다. 시장적 방식에 의존하니 벌어지는 일이다.

 

올해 복지부 업무계획에서는 ‘공공’이라는 표현이 추가로 두 곳 더 등장한다. 하나는 디지털 헬스케어를 통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공공·민간병원’의 스마트병원 전환을 지원한다는 내용, 다른 하나는 필수의료 인프라 차원에서 ‘국가 필수·공공의료 총괄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국립중앙의료원의 이전·신축 및 중앙감염병병원 건립을 추진한다는 내용이다. 이마저도 최근 기재부가 국립중앙의료원 신축·이전 축소 방침을 발표해 논란을 사고 있다. 혹 서울, 수도권에 위치한 ‘국립중앙’ 의료원이 지역의 건강문제나 의료문제와 무슨 관계냐 물을 사람이 있다면,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국립중앙의료원이 수행한 지역 간 자원 배분과 조정 역할을 찾아보기를 권한다. 지역 간 불평등을 조정하는 국가와 중앙의 역할은 지역분권의 핵심이다.

 

2017년 개헌 논의에서 ‘2015년 메르스’를 이야기했듯(논평 바로가기), 2023년 선거구제 개편 논의에서 ‘코로나19’를 기억한다.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지방정부는 물론, 지역주민으로서 우리도 공중보건 역시 지방자치와 분권이 작동할 수 있고, 작동해야 함을 깨닫지 않았던가. 주민참여의 공간은 상대적으로 작았지만, 시민사회는 중앙뿐만 아니라 지역에서도 국가와 시장을 감시, 견제, 보완하면서 사회적 불평등 문제에 대응해 나갔다.

 

책임 있는 지방정치는 책임 있는 중앙정치가 만들지만, 반대로 책임 있는 중앙정치도 책임 있는 지방정치를 통해 만들 수 있다. 정치인들만의 쇼를 넘어, 지역주민으로서 모두가 참여하는 선거구제 개편 논의를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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