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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건강보장이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되려면: 동성 배우자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인정 판결을 환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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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1일, 서울고등법원이 동성결합 관계의 배우자를 건강보험 가입자의 피부양자로 인정하는 첫 판결이 이루어졌다(관련 기사 보러가기).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 평등한 곳에서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사회를 전망하는 이 판결은 환영 받아 마땅하다.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정치가 세를 불리는 와중에도 이렇게 우리는 나아간다.

 

“국민건강보험의 이러한 피부양자 제도 운영은 경제적 능력이 없어 직장가입자에게 생계를 의지하는 사람에게도 건강보험을 적용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사회보장 차원에서 보호의 대상이 되어야 할 생활공동체 개념이 기존의 가족제도와 달라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수긍할 수 있다.”

“사회보장으로 기능하는 건강보험 제도의 취지에 비추어 볼 때, 법률적 의미의 가족과 부양의무는 피부양자 제도의 출발점일지언정 한계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처럼 이번 판결은 결혼과 혈연을 중심으로 한 지금과는 사뭇 다른, 서로 ‘돌봄’을 매개로 관계 맺는 가족의 형태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진보적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사회보장체계는 혈연 가족, 이성애 중심의 가족 단위에 성원권을 부여해 왔다. 건강보험제도에서도 다르지 않다. ‘전 국민’ 건강보험제도에서 누구든지 보험료를 낼 수 있으면 가입자가 된다. 그렇지 못한 경우 피부양자 자격 획득을 통해 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 문제는 이 피부양이 가능한 가입 자격의 조건이 이성애 정상가족에게만 주어진다는 점에 있다. 다양한 돌봄 공동체를 인정하는 이 판결은 따라서 전통적 혈연 및 이성애 중심주의를 내장한 분배 원리에 반대하며 이어 온 인정투쟁의 연장선이다.

 

 

차별과 배제 없이 보편의 시민 건강을 형평하게 보호한다는 보편적 건강보장은 건강보험제도가 지향하는 바다. 보편적 건강보장의 실현은 누구든지 건강을 증진하고, 예방하고, 치료하고, 재활하고, 또 완화하는데 필요한 서비스를 경제적 어려움 없이 시의적절한 때와 장소에서 이용할 수 있을 때에 가능하다.

 

이 지점에서 국민건강보험공단은 판결에 불복하여 상고할 것이 아니라, 사회보장체계에서 건강보험 제도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그에 따른 공단의 책무를 훨씬 진지하고 또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건강보험제도가 한국 사회에서 사실상 ‘시민권’을 인정하는 동시에 인증하기도 하는 준거가 된다는 점에서 인정을 넘어 실천의 차원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의미다.

 

제도에 한정해 한국 사회의 작동 원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더라도 건강보험 제도에서 나의 위치는 보건의료를 넘어 고용, 주거, 교육, 사회보장 등 생활 전반에서 어떤 자격을 인증하는 기준이 된다. 취업이나 이직할 때와 같이 나의 고용 관계 이력이나, 대출 받을 때와 같이 내가 경제적으로 안정된 독립적 개인임을 ‘가입자’로 증명할 때, 국가장학금을 신청할 때처럼 경제적으로 독립적이지 않음을 ‘피부양자’로 증명하거나, 생계 관련 정부 지원금 및 제도를 신청하기 위해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가구임을 ‘건강보험료’로 증명하게 되는 경우가 그렇다. 단편적이지만 이 사례는 건강과 보건의료가 단순히 삶의 결과일 뿐 아니라 핵심 조건이자 해결과제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위치를 적극적으로 떠안을 때 건강보험제도는 비로소 ‘보편적 건강보장’ 실현을 위한 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건강할 권리, 살아갈 권리, 죽지 않을 권리에는 조건이 없다. 성별과 젠더, 성적 지향이 어떻든, 가족이 있든 없든, 빈자든 부자든, 선주민이든 이주민이든, 장애가 있든 없든 지금 이 곳에서 살아가는 누구든지 건강하게,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돌보아져야 하며, 또 돌볼 수 있도록 충분한 자원을 요구하고 보장받아야 마땅하다.

 

필요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단지 부양자와 동성 관계라는 이유만으로 피부양자 자격을 박탈하고 처벌하는 국가가 보편적 건강보장 달성을 자랑해도 될까? (관련 기사 보러가기) 생계를 위해 제때 건강보험료를 납부하지 못한 체납자(관련 보고서 보러가기), ‘국내에 거주하는 국민’이 아니라서 보험료를 내고도 보험 가입자 자격을 상실한 이주민(관련 기사 보러가기)의 건강보장을 방치하고 외면하는 국가는?

 

이성애 정상가족에 기댄 건강보험의 피부양 제도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동성 배우자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한 이 결정을 계기로 다양한 가족 또는 돌봄 공동체의 삶을 돌보는 사회 안전망의 새로운 지형을 상상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이제는 사회보장의 기반이 이성 간 결합에 기초한 가족이 될 수 없으며, 평등한 개인을 단위로 삼아야 한다는 대전제를 공단이 구태여 차별적으로 적용할 필요 없다.

 

우리는 가족이 더 이상 사회보장의 기본 단위로 작동할 수 없음을 공단이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험료를 부과할 대상자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한 시장적 의미에서라도 공단이 피부양자 제도 폐지 및 개인 단위 건강보험료 부과를 기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공단은 더 너르고 형평한 젠더 관계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때에 당연히 시장원리가 아닌 사회적 배분을 함께 상상한다면 더욱 좋다.

 

가부장적 복지체제가 그러하듯, 가부장제에 기댄 보편적 건강보장은 모순이다.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생계 부양과 피부양의 권력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상정하는 불평등한 젠더레짐을 재생산하는데 공단이 이토록 적극적으로 복무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코로나19 시기 돌봄 위기 상황에서 목격한 삶과 죽음을 떠올린다. 가부장적 이성애 정상가족의 돌봄에 기댄 사회는 더 이상 지속불가능하며, 존엄한 삶의 대안이 될 수도 없다. 더욱 평등한 방향으로 젠더레짐을 바꾸어가는 것이야말로 대안이다.

 

모두의 건강을 위해 차별하지 않는 보편적 건강보장이 실현된 곳에서 우리는 삶의 지평을 더욱 너르게 펼칠 수 있다. 지금의 전 국민 건강보험제도는 사회적 연대의 응결체다. 우리는 이 연대의 범위가 더욱 넓고 깊어지길 희망한다. 건강과 돌봄, 그리고 평등이라는 공통의 이해는 우리를 해방으로 이끌 것이다. 지체하지 말고, 계속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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