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의 책 제목처럼,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고 1년 동안 한국 사회는 줄곧 ‘공화국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 중 하나는 그가 민주공화국을 대표하는 최고 권력자로 선출되었다면 마땅히 견지해야 하는 책무성, 즉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좋은 국가 또는 정의로운 사회에서 좋은 시민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체제를 만드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는 그 자신이 관심 있는 어떤 이들에게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조선소 도크 속 철 구조물에 자신을 가둔 노동자에게, 빗물이 들어찬 반지하 집에서 죽어간 일가족에게, 인파더미에 묻혀 길 위에서 스러져간 젊은이들에게 그가 보였던, 수치심은커녕 잠깐의 연민조차 없던 마른 얼굴을 기억한다. 대신 그는, 이제 몇 분 남지 않은 고령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사죄와 배상을 거부하는 일본 정부를 향해서는 호의 가득한 얼굴을 보이고 있다. 12년 만이라는 백악관 국빈 방문(4월)이나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G7 정상회의 초청(5월)에 대한 기대일까? 아니면 피해 당사자들이 동의하지 못하는 배상안이 어떻게 한일 양국의 공동이익과 세계의 평화 번영에 기여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 다 계획이 있기 때문일까?
“백기투항, 망국적 외교참사” (시민단체·더불어민주당·정의당 시국선언)
“무슨 국익이 있나” (강창일 전 주일대사)
“윤대통령이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무토 마사토시 전 재한국 특명전권대사)
“피해자가 원하는 내용이 아무 것도 반영되지 않았다” (일본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야노 히데키 사무국장)
지난 6일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안’을 발표한 직후 한일 정치권과 시민사회뿐만 아니라 주변국들의 양분된 평가가 쏟아졌다. 비판과 지지의 면면을 보면, 윤대통령과 외교당국의 현실 인식은 정말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를’ 정도로 우리 역사적 맥락과 국민들의 정서로부터 동떨어져 있다.
한국 정부는 1950년대 국교정상화 교섭 이래 지금까지 일본으로부터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받고 정당한 사죄와 배상을 받으려고 해왔다. 이 때문에 일본 역시 1965년 한일기본조약과 한일 청구권협정 이후에도 1993년 고노 담화, 1995년 무라야마 담화, 2010년 간 나오토 담화 등을 통해 식민지배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 입장을 밝혀왔다. 또한 갈등과 협력의 부침 속에서도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나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등 주요 현안에 대한 외교적 합의도 이어져 왔다. 그러나 이번 한국 정부의 배상안 발표에 대해서는 나흘 만에 확인된 것처럼 일본 정부는 ‘나머지 반의 물잔을 채울’ 뜻이 일절 없다. 정부 간 합의가 아닌, 외교적 전례가 없는 우리 정부의 일방적인 강제배상 ‘선언’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우려를 자아낸다.
첫째, 군사적 긴장. 미국은 1960년대 자국 중심의 반공진영 구축에서부터 중국, 러시아, 북한을 견제하는 현재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세계패권전략에 한국과 일본을 편입시키고 한국과 일본의 경제적·군사적 우호관계를 지원해 왔다. 특히 바이든 정부는 한국과 일본이 군사협력을 심화할 것을 요구하는데, 이런 압력은 기시다 총리가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서 교전권을 갖도록 평화헌법을 개헌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거나, 방어력 증강을 근거로 헌법9조에 따라 일본에서 보유 자체가 용인되지 않는 미국산 토마호크 미사일 구입을 포함한 비정상적인 군사비를 2023년도 예산안에 반영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윤석열 정부도 ‘담대한 구상’이 북한으로부터 공개 거부당한 이후, 호혜적 파트너로서 북한을 상대하기보다 북한의 핵위협과 도발에 대응하는 조치로서 한미일 3각 동맹공조에 무게를 두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정치적·군사적으로 대결하면서 아시아 지역의 긴장이 높아지는 가운데, 개전 시 전장이 될 수 있는 한국이나 일본이 외교적인 긴장 완화노력보다 오히려 전쟁을 준비하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20세기 제국주의 전쟁의 피해자들의 고통과 상처를 원칙도, 합의도 없이 돈으로 덮으려는 이유가 21세기 미중 대결의 전선이 되기 위해서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는가?
둘째, 민주적 절차. 정치권력이 피해 당사자들이나 시민과 분리되어 정권의 단기 목표를 위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제거하거나 왜곡할 때, 시민들은 정부당국의 결정이나 합의를 인정할 수 없다. 이것은 한일조약 반대운동을 계엄령 선포로 차단하면서까지 국교정상화를 실현시킨 비민주적 체제하에서 이루어진 합의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적 체제하에서 이루어진 결정도 마찬가지이다. 비민주적이고 불평등한 절차와 원칙 속에서 만들어진 어떤 합의도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결’(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이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2015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합의 TF보고서)이 결코 될 수 없으며, 그 합의가 목적하는 진정한 정치적·법적 권력효과도 낼 수 없다.
셋째, 역사에 대한 신중함. 개인의 삶은 유한하고 일시적일 수 있지만, 동시에 정치공동체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 시간을 점유하기도 한다. 그 시간은 권력자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특정 사건의 당사자나 동시대 관찰자의 시간이기도 하고, 종결된 사건의 영향을 받는 셀 수 없이 많은 후대들이 살아가는 장구한 시간이다. 이처럼 역사의 무게가 무겁다면, ‘과거와의 전쟁을 넘어서는’ 것은 단지 5년을 책임질 뿐인 정권이나, 개인의 호기로운 결단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리고 그 과거와의 전쟁을 넘어서는 것이 새로운 전장에 미래 세대를 끌어들이는 일이라면 당장 멈춰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정부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안은 ‘굴욕외교’의 차원을 넘어서서 평화, 민주주의, 인권, 공공성과 같이 민주공화국이 지키고 강화해야 할 이념과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나간 역사가 야기한 문제를 민주적이고 정의롭게 해결할 가능성을 차단하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미래까지 빼앗으려는 정부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선언’은 즉각 철회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한일관계사> 기미야 다다시 지음/이원덕 옮김. AK.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