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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풀 논평

개헌, 과정이 더 중요하다

대통령이 내년 지방 선거 때 개헌을 하자고 제안한 후 개헌 논의가 확산하는 분위기다. 무엇보다 국회 개헌특위가 내년 2월까지 개정안을 만든다고 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국회는  분과별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시민토론회까지 개최하는 중이다(관련 기사 바로 가기). 누구든 첫째 관심은 새로운 헌법에 무슨 내용이 담길 것인가 하는 것. 우리는 이미 2014년 10월에 사회권적 기본권을 강화하고, 그런 맥락에서 ‘건강권’을 적극적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기본 방향을 주장했다(서리플 논평 ‘새로운 헌법의 조건’ 바로 가기). “우리는 개헌 논의를 통해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다시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건강권은 상세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국가의 의무도 당연히 따라간다….(중략)… 소득, 교육, 고용, 노동조건, 환경, 주거…기본권마다 더 자세한 권리의 목록을 포함해야 하고, 국가의 책임을 분명히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조건과 환경이 바뀌었으니, 권리의 ‘최저’ ‘기본’ 또는 ‘적정’의 수준도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이 의견은 지금도 유효하다. 마침 국가인권위원회가 비슷한 취지에서 ‘기본권 보장 강화를 위한 헌법개정안’을 만들고 며칠 전 토론에 붙였다(국가인권위원 보도자료 바로 가기). 일단 방향을 이렇게 잡은 것을 환영하고 더 활발한 논의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기본권 강화가 개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논의는 또 있다. 지난주 6월 29일부터 7월 1일까지 제주에서 열린 ‘제주인권회의’에서도 ‘개헌과 인권’이 핵심 주제의 하나로 다루어졌다(한국인권재단 공지사항 바로 가기, ‘한국 사회 인권을 말한다…제주인권회의 열려’ 기사 바로 가기). 인권과 기본권을 강화하는 헌법 개정이라야 시민의 삶이 실질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공통된 인식이 논의 배경이 되었으리라. 헌법 개정안은 지금도 ‘구성’되는 중인만큼 결과를 속단할 수 없다. 다만, 현재 논의 정도와 수준을 고려할 때 기본권이 얼마나 강화될 수 있을지, 솔직히 걱정이 앞선다. 기본권 중에서도 이른바 사회적 기본권(또는 ‘사회권’), 그리고 우리의 관심인 건강권은 더 불확실하다. 이 논평은 주로 건강권에 관심을 두지만, 다른 사회적 기본권도 근본에서는 ‘오십보 백보’가 아닌가 싶다. 사회적 기본권으로서 건강권이 크게 진전되기 어렵다는 것은 국가인권위원회의 개정안에서도 드러난다. 이 개정안은 건강권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모든 사람은 건강을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 질병 예방과 보건의료체계의 향상 등 구체적인 내용은 법률로 정한다.” 개정안이 기존 헌법 조항(“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보다 한 걸음 나아간 것은 분명하나, ‘건강을 향유할 권리’는 여전히 추상적이고 선언적이다. 질병 예방과 보건의료체계의 향상 등을 법률로 미루었으니, 국가의 책무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한계가 명확하다. 국회 개헌특위가 마련한 개정안 초안도 건강권이 획기적으로 강화되었다 하기 어렵다. 특위의 분과에서 만들었다는 초안의 건강권 조항은 다음과 같다. “모든 국민은 적절한 보건, 의료 서비스를 보장받을 권리가 있으며, 국가는 국민의 건강 증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이 초안은 건강권을 건강이 아니라 보건, 의료 서비스를 보장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국가의 책무는 ‘의무’가 아니라 ‘노력’하는 것에(전통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 조항만으로는 새로운 헌법도 건강권을 보장하는 실질적인 지침 노릇을 하기 어렵다. 시민사회단체가 제안하는 건강권은 훨씬 적극적이다. 예를 들어 참여연대가 중심이 된 ‘개헌과 사회권 토론회’(2017년 5월 24일)에서는 다음과 같은 초안이 제안되었다. ① 국내에 합법적으로 거주하는 모든 사람은 정신적 및 육체적 건강에 대한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개인의 경제적 부담능력에 따라 건강권이 침해되지 않는 수준의 적절하고 합리적인 의료보장 및 공공 보건서비스 및 관련 제도를 실시할 의무를 진다. ②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공공책임 하에 제1항의 의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충분한 공공의료를 확충하여야 한다. ③ 국가는 질병 및 사고를 당한 생활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생명 또는 신체의 중대한 위험에 직면한 긴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적절한 의료보장을 실시하여야 한다. 분명히 나아진 것이나 우리는 이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건강권은 보건의료 서비스나 의료보장제도에 대한 권리를 넘어 누구나 건강한 상태(결과)를 누릴 수 있는 권리여야 한다. 최근 ‘사회적 결정요인’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잘 알려진 만큼,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소득, 교육, 노동, 고용 등도 권리의 대상에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사회적 기본권에 ‘개입’하는 것이 당연하다(다음 글을 참조할 것. ‘개헌과 건강권’ 바로 가기). 국가의 책무도 더 적극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사회권에 대한 국가 책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샌드라 프레드먼의 주장에 동의한다. 권리를 모두 충족하지 못해도 또는 그 권리를 충족하기 위한 의무가 아무리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그것이 의무를 소홀히 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즉, 권리가 충족되는지와 무관하게 (국가의) 의무는 존재한다(샌드라 프레드먼 지음, 조효제 옮김. <인권의 대전환>, 교양인 펴냄). 적극적으로 건강권을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지금은 건강권이 선언 수준 이상으로 규정될 가능성이 적다는 점을 인정한다. 헌법 개정과 그 방향이 상황과 맥락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면, 건강권을 보장하는 수준은 시민과 대중이 이해하고 참여하며 논의하는 것 이상으로 ‘돌출’할 수 없다. ‘사회적 이해’의 수준을 고려하면 건강권(나아가 사회적 기본권)에 대한 강한 지지와 옹호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취약한 사회적 이해 또는 기반 때문에라도 내용을 넘어 헌법 개정의 ‘과정’을 다시 꺼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부 집단과 정치인이 아니라, 대중과 시민이 개헌 논의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2016년 7월 18일 <서리풀 논평> ‘시민이 이끄는 개헌 논의를’ 바로 가기). “우리는 개헌이 목표로 하는 헌법 내용보다 그곳에 이르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중략)…누가 개헌을 이끌고 과정을 지배하는 주체인가? 형식적 절차를 준수해야 한다는 뜻보다는 헌법이 실질적인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 논의가 민주적이고 참여적일 때, 결과로서의 헌법은 비로소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시민이 만들어가고 또 만들어내는 헌법, ‘시민의 헌법’이 필요하다.” 과정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거듭 주장한다. 어떤 형식과 절차든 기본권, 사회적 기본권(사회권), 건강권을 배우고 논의하며 요구하는 것이 더 좋은 헌법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시민회의, 만민공동회, 시민행동, 그 무엇이든 좋다.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고 토론하고 요구해야 한다. 농민, 어민, 비정규 노동자, 아동, 소수자의 목소리를 들어 담지 않고 어떻게 개헌을 논의할 수 있단 말인가? 건강권도 마찬가지다. 삼성반도체 건강 피해 노동자, 핵발전소 주변 주민, 홈리스와 쪽방 거주자, 비정규 노동자, 섬에 사는 노인이 건강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알지 못한 채 건강권을 규정할 수 있을까? 건강을 잃은 사람들 그리고 불평등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따질 수 있을까? 더 많이 참여하고 어떤 소리라도 내고 듣는 민주적 개헌이 필요하다. 시간이 모자라면? 꼭 내년 4월에 개헌을 해야 할 급박한 이유가 있는가? 필요하면 시기를 늦추고 차분하게 그러나 치밀하게 논의해야 더 좋은 헌법을 가질 수 있다.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장담할 수 없으니, 더 신중해야 한다.

서리풀 논평

‘법치주의’ 시비

몇 달 동안 법이 유례없이 가까워졌다. 대통령 탄핵이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기다리고, 특별검사가 이른바 ‘국정 농단’의 당사자들을 수사하고 있다. 헌법 개정도 시기만 문제지 언제든 시작할 수 있는 분위기다. 법은 어느 때보다 일상 속에 들어와 있다. 시민 전체가 이렇게 깊게 법을 공부한 시기가 있었던가? 헌법재판만 해도, 수없이 많은 사람이 절차와 내용을 알고 의견을 주장한다. 모두 법 전문가가 되어야 하니, 어찌 보면 시대적 불행이다. 모든 국민이 헌법재판의 내용과 절차를 알아야 하는 사회가 어찌 좋다고만 하겠는가. 이런 법(들) 또는 법 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지금 이 시기, 법이 사회발전의 동력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대통령을 탄핵하고,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자들을 단죄하는 것, 나아가 죄를 고발하고 책임을 묻는 데에 법이 작동한다. 많은 사람이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헌)법이 곧 권력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인 한, 법과 법치주의는 존중받아야 한다. 특히 권력 집단의 전근대적이고 불합리한 횡포와 악행을 줄일 수 있다면, 법의 역할을 낮춰볼 수 없다. 한때는 근로기준법이 노동자의 삶을 보호하는 중요한 근거 노릇을 했다. 그뿐인가,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소득과 부동산에 높은 세금을 매기는 것을 어찌 법의 횡포라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법은 또한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다. 삶의 보호와 안녕이 아니라 자칫 억압과 기득권 보호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법리를 따진다는 명분으로 명백한 죄를 논란으로 만드는가 하면, 실정법을 핑계로 죄를 도덕과 정치의 문제로 바꾸는 일도 흔하다. 당장 며칠 전

서리풀 논평

‘의료’의 창으로 본 박근혜 정부, 이미 낙제점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했으니 절반, 아니 70%쯤은 이루었다고 믿고 싶다. 헌법재판관의 성향이 어떠니 위헌 사유가 어떠니 하지만, 헌법재판은 법률이 아니라 ‘정치’가 본질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민심과 열망이 이 정치의 핵심이면, 그들이 ‘시민권력’을 이길 수는 없다. 이런 믿음이 곧 헌법재판소를 신뢰한다는 뜻은 아니다. 과거 헌법재판소가 어떤 역할을 해 왔는지는 논쟁적이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 때처럼 부당하게 행사된 의회권력을 바로잡은 적도 있지만, 저 유명한 ‘관습헌법’ 판결처럼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현실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 또한 헌법재판소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대통령, 대법원, 국회가 추천하니 겉으로는 삼권분립의 원리에 충실한 듯 보이지만, 실제 그런가는 의심스럽다. 한국에서 권력의 분립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있을까? 대통령 비서실장이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미리 안다든지, 또는 사법부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려 했다는 의심들은 전혀 놀랍지 않다. 독립적 판단은 허상일지도 모른다. 헌법을 바탕으로 행정, 입법, 사법을 견제하는가도 문제지만, 이들이 주권자(국민)를 대표하지 않는 것이 더 큰 한계다. 헌법재판이 ‘숙고’를 통하여 판단한다고 하겠지만, 이 판단은 단지 지식과 경험에 기초한 기술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숙고는 사회 구성원의 여러 다양한 가치와 생각을 반영하는 민주적 과정의 일부이며, 헌법재판과 재판관은 마땅히 이를 ‘대표’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숙고를 위임했을 뿐이다. 여러 국가에서 법관과 검사를 선거로 뽑는 것도 민주주의의 대표성 원리 때문일 것이다. 이제 모든 국민이 헌법재판 전문가가 될 조건이니, 사법과 헌법재판에 민주주의의 원리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논의해야 한다.

서리풀 논평

시민이 이끄는 개헌 논의를

17일인 제헌절이 막 지났다. 제대로 공휴일 취급을 받지 못해서 그런지, 아니면 ‘헌법’이 크게 의미가 없어서인지, 별 ‘임팩트’가 없다. 의례적인 언론 보도와 특집 기사가 있지만, 공론장에 도달하는 데에는 크게 미치지 못한다. 이런 조용함은 헌법의 현실과 그것의 전사회적 기초를 동시에 반영하는 것일 터, 꼭 올해만의 일은 아니다. 되돌아봐도 꽤 오랜 기간 헌법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한 기억이 희미하다. 지금의 헌법체계가 안정적으로 잘 작동하기 때문이라면 크게 문제로 삼을 일이 아니지만, 그보다는 관심과 논의의 ‘효능’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들어 여러 경로로 개헌 이야기가 나오는 것까지 생각하면, 이런 상황은 걱정스럽다. 그냥 지나간 제헌절이 미약한 관심과 치우친 논의 공간을 상징한다면, 새롭게 헌법을 논의하더라도 투입-과정-결과가 모두 ‘그들’만의 것이 될 공산이 크다. 누가 무엇을 논의하든 정략의 산물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지금부터라도 헌법을 논의하는 시민의 힘을 키워야 한다. 헌법 논의에서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문제는 으레 나오는 형식적, 일반적 과제가 아니다. 현행 헌법은 진작부터 평범한 시민의 삶과 행복을 잘 보호하는 ‘가이드’나 ‘스폰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태다. 사드 배치가 그렇고, 성적 소수자 차별이 그러하며, 건강보험료 부과 논란도 마찬가지. 개인정보 유출과 통신 감청은 또 어떤가.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 헌법은 무엇을 해 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고 또 잘 모르겠다. 헌법의 소외, 그리고 헌법으로부터의 소외다. 지금까지 말한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새로운 헌법이 포함해야 할 가치와 목표 몇 가지를

서리풀 논평

헌재는 공공의료를 심판할 것인가

  며칠 전까지 “기부를 강요하는 사회”를 논평 주제로 생각했다. 연말연시라는 때가 때인지라, 허술한 복지를 온정과 자선이란 이름으로 메꾸는 현상을 생각해 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헌법재판소의 정당 해산 판결이 끼어들었다. 언뜻 보기에 우리(시민건강증진연구소)가 하는 일과 직접 관련은 없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직접’이란 무엇이고 ‘관련’이란 무엇일까. 무엇이라 말하든 이 시대를 사는 시민이면 누구라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연구소가 가지는 관심, 하는 일, 해야 할 과제도 벌써부터 걱정이 많다. 이 논평부터 벌써 ‘자기 검열’에서 자유롭지 않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헌재 판결의 논리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수도 이전을 둘러싸고 ‘관습헌법’의 논리를 동원했던 전과만으로 충분하다. 다만 한 가지, 몇몇 재판관이 판결문에 썼다는 다음 표현은 (기억을 위해서라도) 기록해 두어야 하겠다. “소위 대역(大逆)행위로서 이에 대해서는 불사(不赦)의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히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와 본질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겨레 2014년 12월 20일, 바로가기) 근대도, 논리도, 법률도 아니다. 조선 왕조나 일제가 되살아난 줄 알았다. 아니 기시감이 있긴 하다. 40여년 전 유신과 긴급조치, 그리고 정말(!) 약간의 몸부림을 여지없이 ‘단죄’하던 재판들이 재현되는 것을 봤다. 이번에는 그 수준과 내면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번 일에 논점은 크게 두 가지로 모아진다. 실무적이고 기술적인 것은 빼고, 그리고 냉소하지 않는 한에서 그렇다. 하나는 다른 생각과 이념에 대한 제도적 폭력(국가가 물리적

서리풀 논평

새로운 헌법의 조건

  헌법은 보통 사람의 일상 생활과 멀다. 아니 다들 그렇다고 생각한다. 죠지 버나드 쇼의 말마따나 “굶어죽을 지경만 아니라면 시민들은 미련할 정도로 형이상학적”이지만, 그래도 헌법까지 마음을 쓰는 이는 적다. 그런 헌법을 바꾸자는 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다. 대통령과 여당, 야당 사이에 벌어지는 현실 정치가 복잡하더라도 개헌 논의가 없어질 것 같지는 않다. 이들 사이에 걸려 있는 정치적 이해가 질기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개헌 논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시끄럽다. 본론에 들어가지 못한 셈이다. 최근에는 여당 대표가 분위기를 띄었고 대통령이 말리는 모양새다. 여론과 언론의 논조도 한 가지로 정리되지 않는다. 논의하자는 쪽은 지금 권력구조가 가진 문제점을 불러낸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가 심하다는 명분이 앞에 있다. 이 논리를 따르면 권력구조 가운데서도 5년 단임의 대통령제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를 중심에 놓아야 한다. 개헌 논의를 반대하는 쪽도 이유가 분명하다. 권력구조에만 초점을 맞추는 개헌이 국민의 현실 이해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정략에 따른 개헌이라면 그들만의 거래와 야합일 뿐 보통 사람들의 삶과는 무관하다. 정 권력구조의 폐해가 관심이라면, 다른 제도, 예를 들면 선거법부터 바꾸라고 반박한다.   어느 쪽임을 나눠야 한다면, 우리는 개헌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두 해 안에 결론을 보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그래도 논의를 시작하자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실용적 이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과제가 헌법과 연결되어 있다.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답답한 문제에 물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