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의 21대 국회 본회의 통과 여부에 이목이 쏠려 있다. 정부와 보험업계는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법”이라고 부르지만, 의약단체와 시민사회는 “민간보험사의 환자정보 약탈법”이라고 부르는 법안이다. 소액진료비 청구를 위해 필요한 내용뿐만 아니라 모든 진료정보가 강제 전송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 이른바 ‘보수’와 ‘진보’ 정부를 가릴 것 없이 보건의료서비스는 자본의 투자와 증식을 위한 산업으로 여겨졌고, 코로나19와 저성장 시기를 겪으면서는 ‘경제성장을 견인하여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산업’ 으로 호명되었다. e-health, m-health, 디지털 헬스케어, 바이오헬스 등 이름을 달리하지만, 이 오래된 보건의료산업화(의료영리화)의 핵심은 ICT기반 보건의료 구축이고 여기에서 생성되는 개인의료정보의 활용에 있다.
이미 4천만 명의 가입자 정보를 집적하고 있는 보험업계가 직접 의료기관으로부터 진료정보를 전자적 형태로 전송받아 DB화하는 것을 얼마나 염원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개인의 진료 및 건강정보를 활용한 부가시장을 창출하기 위하여 대기업들은 기기제조업체부터 솔루션 제공자, 통신사, 의료제공자, 보험사를 아우르는 수직계열화를 추진하고 있다.
보건의료산업화를 위하여 민감한 개인정보에 대한 불충분한 보호라는 정보인권적 쟁점과 소비자 편익 훼손이라는 시민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정부는 2020년 데이터 3법(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신용정보법)을 개정했다. 이를 기반으로 윤석열정부는 2022년 의료 마이데이터 사업과 ‘건강정보 고속도로’를 통해 분산된 개인 의료데이터의 통합·중계·활용과 플랫폼을 이용한 건강관리서비스 개발을 바이오헬스 산업의 핵심전략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정부는 보건의료를 더 많이 산업화함으로써 시민들이 더 건강해지는지 답해야 한다. 실손보험에 가입한 만큼 더 많은 시술과 처치를 받고, 안전과 효과가 충분히 확인되지 않은 기술과 기기를 건강보험재정을 지출하면서까지 사용하고, 플랫폼을 이용하면서 전문가의 도움없이 의약품 오남용과 불법조제라는 선택권을 가지게 되는 지금 현실이 과연 더 건강한 삶이라 할 수 있는가.
현재 우리의 삶과 건강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초고령사회를 살아가야 한다는 막연함과 불안감이 아닐까 싶다. 길어진 노후를 대비할 만큼 안정된 일자리를 가지기도 어렵고 노후소득도 부족한데다가, 1인 가구가 가장 많은 세대유형이 될 정도로 사람들의 관계맺기는 달라졌다. 현재 16%인 65세 이상 인구는 전체 건강보험 진료비의 43%를 지출하고 있는데, 고령화는 암과 심뇌혈관질환, 고혈압과 당뇨같은 만성질환과 더 오래 동반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개인에게 건강관리의 책임을 부과하는 정보통신기술기반 의료서비스가 얼마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게다가 정보통신기술의 디지털 격차는 코로나19때 확인한 바와 같이 노인뿐만 아니라, 장애인, 아동, 이주민, 빈곤층 등 이미 사회적·의료적 보호가 더욱 필요한 사람들을 배제하는 불평등 악화로 증명된 바 있다. 민영보험이 단순한 접근의 문제를 넘어 지불능력에 다른 차별화된 서비스의 이용, 질병위험이 높은 사람에 대한 보장 회피와 동반하여 확대되는 경우 인구집단간 불평등과 공동체의 파편화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우리는 일차의료를 통해 개인의 건강위험요인들을 평소에 진단·관리하고, 응급이나 필수의료가 지역 내에서 완결적으로 제공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본다. 더 나아가 노동자의 건강을 지킬 수 있는 노동 환경과 적정한 주거, 합리적인 가격으로 공급되는 신선한 식료품, 안전한 보행로와 도시 내 녹지공간, 아동·노인·장애인에 대한 지역사회돌봄, 지속가능한 에너지정책과 같은 광범위한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에 개입하는 공중보건정책이 사람들이 건강하게 사는데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조건들은 산업화 전략보다는 공공성을 우선하는 정책을 통해 보장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이런 필수 소비재와 서비스들을 필요한 시점에, 적정한 가격으로, 차별없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윤 축적이 일차적 동기인 자본과 산업은 이를 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성장담론은 인간 삶의 필수요건들을 분해하여 상품화·영리화의 대상으로 변형시켜감으로서 지속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개인의 전인적 삶의 결과인 건강과 질병의 상태를 정보통신기술기반 의료의 국소적 개입을 통해 관리할 수 있다는 주장에 이르게 되었다.
보건의료에 대한 경제성장담론은 이제 어떤 정부나 국가권력도 포기할 수 없는 영역이 되었고, 집권자들의 계급적 이해는 이 담론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게 했다. 모든 것을 전(前)정권 탓을 하는 윤석열정부에서 유독 보건의료산업정책이 전임정부와 일관된 기조라는 것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사람들의 건강과 질병의 매커니즘, 의료영리화의 건강효과와 경제효과에 대해서는 우리 연구소 논평과 보고서를 통해 여러 차례 그 무효함을 설명했음에도(논평1, 논평2, 시민건강이슈), 산업화의 이데올로기적 가상 미래에 대한 집착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기꺼이 민간보험사들의 보험상품과 서비스 개발을 위해 공공데이터를 제공하고, 손해율이 높아 보험료를 인상해야 한다는 보험사의 청구 간소화를 나서서 거들고, 공·사의료보험 연계를 추진하며, 보험업법 법제화와 표결·심의 과정을 졸속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경제권력의 자기 생존을 위한 전략에 국가권력의 생명통치를 정당화하는 전도가 일어남으로써 경제권력이 정치권력을 잠식한 결과이다. 전국민의 연대로 만들어낸 국민건강보험을 약화하고 보장성을 줄이면서 민간보험의 활성화와 이익 극대화를 지원하는 국가권력은 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묻는다.
지금까지 의료민영화 시도를 저지해 왔던 노동·농민·보건의료·시민사회 단체와 의약계 그리고 개혁적·진보적인 제도 정치권의 연대는 이전보다 약화되었다. 제도권 정치는 경제권력의 집요한 전략에 포섭되어 사회권력과 연대할 수 있는 접촉면이 급격히 축소되었다. 사회권력 내에서도 환자단체들은 이미 보험업계의 미지급 문제 등을 가시화하며 보험업법 개정에 반대하고 있지만, 소비자단체들은 소비자 편익증대를 이유로 이에 찬성하고 있는 등 결속력은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건의료산업화 전략을 비판하는 우리의 요구는 정부의 이런 시도가 처음 등장했던 2009년과 한치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정부의 의료민영화 정책 전면 중단과 보건의료정책의 재검토를 요구한다. (중략) 오히려 민간보험은 규제하고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고, 보건의료 인력의 확충을 통해 의료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고, 공공병상의 확대와 지역병원에 대한 공적 재원의 투자를 통해 의료 공공성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2009년 6월 24일. MB 의료민영화 악법 저지를 위한 시민사회단체 및 정당 대표 100인 선언)
우리는 시민들의 한결같은 요구를 외면하며 국가권력이 주도하는 희망이 사라져가는 미래를 그저 지켜만 보지 않을 것이다. 시민의 안전과 편익, 공공성을 고려하지 않는 의료산업적 정책만을 추진하려는 무능한 국가권력을 비판하고 우리를 위한 권력을 확보하기 위한 더욱 공세적인 압박을 이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