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바라는 노동이란 이런 것이다. 게으름피우지 않고 응당 열심히 해야 하는 것. 힘들어도 자기실현을 위해 견뎌야 하는 일. 의존하지 않고 자립적 노력을 통해 획득해야만 하는 능력. 서로 다른 처우는 그 능력의 많고 적음에 따른 것이므로 정당하다고 여기는 일. 그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는 것.
정부가 바라는 노동의 상(象)이란 지금 한국 사회의 노동윤리를 더욱 강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과연 이를 ‘개혁’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미 지난 두 번의 논평에서 살펴보았듯이, 지금 노동개혁의 방향은 이전의 권력 관계와 균형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이 질문은 유효하다(논평 바로가기1, 2).
그 내용과 방향의 옳고 그름을 차치하더라도 노동시간이나 임금과 같은 일부 제도를 개편하는 것만으로는 최소한의 지지와 동력을 얻기도 어렵다. 개혁이 변화를 전제하는 것이라면 노동개혁은 노동을 둘러싸고 “이미 존재하는 구조와 힘의 관계를 바꾸(논평 바로가기)”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개혁의 첫 단계는 그야말로 새로운 노동을 전망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노동윤리를 다시 세워야 한다.
지금과 같은 노동윤리에 기댄 사회에서 노동은 살기 위한 일이기보다는 존재의 쓸모와 자격을 증명하는 일에 더 가깝다. 이 노동윤리는 건강을 생산성을 갖춘 노동자가 되기 위한 토대, 개인의 경제력 혹은 경쟁력, 스스로 관리해야 하는 자본으로 간주하는 건강관과 만나 노동윤리를 거부하는 이들을 무력화하면서 그 이유를 막론하고 사회 주변부로 내몰고 있다. 내몰린 이들을 위한 사회 안전망조차 구직 노력 등 노동과 관련한 활동을 통해 그 자격을 증명하라 요구한다. 노동하지 못해 존재와 쓸모를 증명하지 못한 이들의 결과는 질병, 사고, 또는 때 이른 죽음이다.
생명을 경시한 채, 생산과 이윤을 담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노동을 거부하고 새로운 노동윤리를 만들어야 한다. 건강한 노동, 사람을 살리는 노동에 핵심이 있다.
둘째, 노동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존재하는 구조와 힘의 관계를 바꿀 때, 우리는 이를 개혁이라 부른다. 개혁은 따라서 불평등 구조를 평등의 구조로 변화시키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시장을 근간으로 하는 곳에서 불평등은 노동을 공식의 영역에서 고용주 또는 사용자로부터 받는 임금을 동반하는 일에 경계 짓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동시에 이러한 노동을 우선하는 복지와의 제도적 연계는 다른 형태의 노동을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고 책임지는 부권적 노동으로의 전환을 유도함으로써 노동과 노동의 경계를 더욱 뚜렷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 비임금 노동, 비공식 노동, 무급 노동 등 다양한 노동의 형태와 관계는 은폐된다.
이 경계를 허물기 위해 중요하고 또 필요한 것은 돌봄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 우리는 과거로부터 가사, 육아, 간병 등 무급재생산노동에 대한 가치절하와 외면은 불평등 구조를 더욱 강화할 뿐임을 배웠다. 노동시장은 물론 복지의 영역에서 주로 여성과 노인과 청년 등을 배제함으로써 불평등한 관계를 재생산하는 이 구조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돌봄 노동에 대한 인정과 평가가 적어도 생산노동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야 한다.
노동의 경계를 허무는 일은 모두가 의존적 존재이자,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점, 돌봄과 그 관계에 대한 책임의 공정하고 공평한 분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자립적 존재와 개인 책임을 강조하는 과거의 노동윤리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것과도 이어진다.
셋째, 다양한 주체를 인정하기.
예컨대 노동 개혁의 명분으로 계속해서 내세운 청년 노동자들조차 단일한 사회적 집단이 아니다. 직업이 다르고, 젠더가 다르고, 생활공간과 지역이 다르고, 고용 조건이 다르고, 가족 형태도 모두 다르다. 서로 다른 주체들의 서로 다른 조건이 교차하고 중첩한 결과로 나타나는 노동과 그 필요는 같을 수 없다. 다양한 주체를 인정함으로써 그 필요의 사회적 분포, 다시 말해 노동자 내 불평등을 파악하는 것 역시 개혁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고통을 경험하는 이들은 누구고, 누군가의 고통으로 이득을 취하는 이들은 또 누구인지, 이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떠받치는 구조는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넷째, 노동의 전 생애를 전망할 것.
노동은 한 세대가 특정 시기에만 특별히 전유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우리가 노동의 경계를 허문다면, 노동의 다양한 주체를 인정한다면 노동은 태어나서 죽기까지 전생애에 걸친 사회적 활동과 어떻게든 관련한다. 지금 청년이 노인이 되어 노동하는 모습은 지금의 노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 중장년이 청년 시절 노동하던 모습 역시 지금 청년의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동시대 세대 간 불평등을 가시화 하는 것은 정치적 필요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중요하다(관련 자료 바로가기). 따라서 청년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전 생애에 걸친 노동의 목소리를 듣는 것과도 같다.
지금 우리의 노동은 파트너, 자녀, 또는 부모와 함께 살아가기 위한 토대가 되기도 한다. 노동의 전 생애를 전망할 때 이 노동은 사람을 살리는 노동이 된다. 덧붙이자면, 이 맥락에서 노동개혁은 청년 노동자만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일하거나, 일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야 마땅하다.
다섯째, 자본 개혁이 먼저다.
구태여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근본적인 변화는 불평등 구조와 관계를 해결하는 것이고, 이는 결국 그 원인이자 동력인 자본을 개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편, 제도 변화도 여전히 중요하다. “노동시간이 제도보다 관행과 문화로 결정”된다지만, ‘장시간 노동체제’라는 말이 명징하게 드러내듯이 장시간 노동이 노동윤리로 작동하게 된 데에는 이를 허용하는 제도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도나 정책이 사회 구성원들의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역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 개혁은 자본이 아닌 일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건강과 생명을 해치기보다는 더 나은 삶과 건강을 전망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것은 노동의 권리다. 탄압의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계속해서 건강과 생명을 가치로 저항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