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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풀 논평

성남시의료원과 지방자치

  지난 6월 2일 경기도 성남시의료원이 문패를 달았다. 2017년 12월에 문을 열 예정이지만, 병원을 짓는 중에 기관을 먼저 ‘창립’하고 일을 시작한 것이다. 당부를 말하기 전에 의료원이 출범한 것을 축하하고 앞날을 응원한다. 오랜 기간 성남시에 공공병원을 세우기 위해 노력한 시민들에게 특별한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많은 당사자의 노력과 실천 가운데서도 2003년 이후 구심점 노릇을 한 시민의 사회적 연대(특히 현재의 ‘공공의료성남시민행동’)를 기억하려 한다(바로가기).   성남시의료원이 건립되는 것은 몇 가지 중요한 의의가 있다. 첫째, 공공병원이 늘어나는 것 그 자체에 뜻을 두고 싶다. 어느 나라에 비해서도 공공병원의 수가 적고 역할이 빈약한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새로 공공 의료기관을 만들고 운영하는 것은 중요한 ‘실험’이다. 단 한 개가 늘어난다고 해도, 압도적 주류 경향을 거스르는 ‘사건’이라 불러야 한다. 다른 지방 정부가 자극을 받고 중앙 정부가 긴장할 것이 분명하다. 둘째, 시민들이 만들어낸 공공병원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1990년대 이후 ‘공공의료 강화’는 시민과 소비자, 환자들의 공통된 요구였지만, 성남시의료원과 같은 구체적 성과는 드물다. 행정과 현실 정치, ‘그들’의 결정이 아니라 주민과 시민이 참여하고 실천한 결과물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시민과 주민이 주도한 ‘민주주의’ 확대라는 점을 더욱 강조하고 싶다. 더디고 힘든 민주주의의 실천, 그중에서도 더 어려운 지역의 민주주의 실험이 결실을 보았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단언하지만, 우리는 성남시의료원의 설립과 그 경과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될 것으로 믿는다.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 ‘보편’으로 확대될

서리풀 논평

동네 병원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간단한 퀴즈 하나. 다음 두 뉴스에 같이 등장하는 말은?   “의료보험제도 실시 이후 보험가입자들이 의원급을 외면하고 종합병원으로만 몰려들어 큰 혼란을 빚자 대한의학협회와 대한병원협회는…이와 같은 부작용을 의료계 자율적으로 시정키로 하고 「의료전달체계연구소위원회」를 구성, 앞으로 의원급에서는 원칙적으로 응급 및 외래환자만 취급하고 병원급에서는 입원환자만을 취급토록 한다는 조정원칙을 세웠다.” (동아일보 1978년 6월 14일) “제대로 안내를 받지 못한 환자들은 이 병원, 저 병원을 돌아다니며 바이러스를 퍼날랐다. 환자가 다닥다닥 붙은 병실 환경, 가족이 모이는 병문안 문화, 대형병원 응급실에 환자들이 몰려들게 한 의료전달체계 모두 이번 메르스 사태를 키운 원흉으로 지목됐다. 결국 첫 환자가 발생한 지 한 달이 못 돼 메르스 감염자 수는 세 자릿수를 돌파했다.” (연합뉴스 2015년 6월 18일 바로가기)   정답(또는 그 가운데 하나)은 ‘의료전달체계’. 30년 이상의 시간 간격을 뛰어넘어 같은 말이 또 나왔다. 같은 ‘문제’가 지속된다는 뜻이다. 한국 사람의 시간 감각으로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닌데, 끈질기다. 병으로 치면 고질병이라고나 할까. 더 들어가기 이전에 우선 의료전달체계라는 말부터. 단어 하나하나는 그리 어려울 것이 없다. 의료, 전달, 체계,…세 마디 모두 익숙하고 알 만한 것들이다. 하지만 셋을 합해 놓으면 ‘악명 높은’ 개념이자 제도로 바뀐다. 내용이 어려우니 의사소통도 쉽지 않다.   우리는 이 말부터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간단하게 생각해도 의료는 ‘전달’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전달이 무엇인지, 누가 주고 누가 받는 것인지 모호하다. 환자를 짐이나 서류처럼 주고받는 것도 아닌데, 환자가 중심이

서리풀 논평

부정한 돈, 부패한 가치

  진작부터 큰 기대는 없었지만 해도 너무한다. 도대체 성한 구석이 없고 구린내가 나지 않는 데가 없다. 5공 시절 텔레비전 연속극 대사로 유행했던 일본말, “민나 도로보 데스(모두가 도둑놈이다)”가 다시 생각난다.   방위산업 비리가 압권이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말하고 아무 데나 안보위협을 내세우는 별 달은(또는 달았던) 사람들이 범죄의 한복판에 있다. 그들은 부끄러움도 없다.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소리가 무성하니 앞으로도 얼마나 더 놀라고 한심해 해야 할까. 더불어 무기중개상과 대기업이 등장하고 횡령과 배임의 죄목이 붙었다. 민관 협력(?)이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5백억 원이 없어졌다고 하나, 그게 전부일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원개발을 둘러싼 비리는 또 어떤가. 공기업과 굴지의 대기업이 등장하고, 몇 백억이나 몇 천억이니 하는 돈은 그냥 푼돈 정도다. 이제 정치인과 공무원이 곧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무슨 결과가 나와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성공불융자금’이라는 기억하기 어려운 이름의 돈줄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 정부가 해외자원 개발을 하도록 기업에 돈을 빌려주고 실패하면 갚지 않아도 되는 제도다. 첫 인상부터 엉성하게 생겼다. 아니나 다를까, 2011년부터 작년까지 갚지 않도록 되게 감면한 돈이 2천 245억 원이라고 한다 (연합뉴스 바로가기 ). 자원개발이 본래 실패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명분으로, ‘한국적’으로 운영되었을 것이 뻔하다.   스스로 국민의 기업이라고 말하는 포스코 일도 한심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리품 노릇을 하더니 이제는 돈을 둘러싼 온갖 잡음에 비리의 의심이 가득하다. 지금까지 나온 것만으로도 여러 사람이

서리풀 논평

헌재는 공공의료를 심판할 것인가

  며칠 전까지 “기부를 강요하는 사회”를 논평 주제로 생각했다. 연말연시라는 때가 때인지라, 허술한 복지를 온정과 자선이란 이름으로 메꾸는 현상을 생각해 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헌법재판소의 정당 해산 판결이 끼어들었다. 언뜻 보기에 우리(시민건강증진연구소)가 하는 일과 직접 관련은 없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직접’이란 무엇이고 ‘관련’이란 무엇일까. 무엇이라 말하든 이 시대를 사는 시민이면 누구라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연구소가 가지는 관심, 하는 일, 해야 할 과제도 벌써부터 걱정이 많다. 이 논평부터 벌써 ‘자기 검열’에서 자유롭지 않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헌재 판결의 논리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수도 이전을 둘러싸고 ‘관습헌법’의 논리를 동원했던 전과만으로 충분하다. 다만 한 가지, 몇몇 재판관이 판결문에 썼다는 다음 표현은 (기억을 위해서라도) 기록해 두어야 하겠다. “소위 대역(大逆)행위로서 이에 대해서는 불사(不赦)의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히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와 본질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겨레 2014년 12월 20일, 바로가기) 근대도, 논리도, 법률도 아니다. 조선 왕조나 일제가 되살아난 줄 알았다. 아니 기시감이 있긴 하다. 40여년 전 유신과 긴급조치, 그리고 정말(!) 약간의 몸부림을 여지없이 ‘단죄’하던 재판들이 재현되는 것을 봤다. 이번에는 그 수준과 내면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번 일에 논점은 크게 두 가지로 모아진다. 실무적이고 기술적인 것은 빼고, 그리고 냉소하지 않는 한에서 그렇다. 하나는 다른 생각과 이념에 대한 제도적 폭력(국가가 물리적

서리풀 논평

공공부문 ‘개혁’을 개혁하라

  작심하고 공공부문을 압박하기로 한 모양이다. 그래도 ‘개혁’이라면 1990년대 말 경제위기 이후 일상사가 된지라 그리 낯설지 않다. 공무원 연금을 포함해 모든 수단을 묶은 종합 패키지라는 것, 그리고 되풀이되는 말의 약효 탓인지 ‘정상화’라는 대통령의 어법을 쓰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개혁인지 자해 행위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정권의 의례인지 판단하려면 정신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핵심 한 가지는 바른 이름, 즉 정명(正名)이다. 공공부문과 공공을 제대로 규정해야 그 다음이 풀린다. 공공부문이 제 이름값을 못하고 있는 현실은 부인할 수 없다. 공익과 공공성을 실현하는 주체라기보다 흔히 비효율과 철밥통을 상징한다. 정부 고위직도 그리 알고, 생업에 충실한 보통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비효율과 부패라면 꿀릴 것이 없는 기업이 가장 열렬하다.   다시 확인할 일은 국가와 시장, 공공부문은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고 그래 왔던 국가와 경제가 공공부문을 ‘식민지’로 만든 탓에 오늘 같은 사달이 났다. 그 가운데서도 사익의 각축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국가가 대중과 시민을 배제한 것이 핵심이다. 한 마디로 지금 공공부문은 제 모습이 아니다. 개혁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오히려 사익을 대변하는 국가와 경제 영역이 주인 노릇을 한 결과로 이 꼴이 났다는 것을 다시 강조한다. 그들에게 맡길 수 없다.   기본 원칙은 명확하다. 국가를 그대로 둔 채로 국가화할 일도 아니고, 극단적인 사익 추구만 남아 있는 시장을 새로운 상전으로 맞이할 것도 아니다. 공공부문 개혁은 여전히(또는 새롭게) 어떤 사회적 통제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달려

서리풀 논평

혐오의 시대, 국가를 되찾자

  국가는 정치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다. 간단한 듯 보이나 어렵고 복잡하다. 마키아벨리가 처음으로 개념으로 만들었다고 했던가. 이후 많은 사람들이 설명하려 했지만 아직도 간단하지 않다. 개념치고는 썩 좋은 축에 끼지 못한다고 할까.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실체라는 점에서 현실은 다르다. 국가가 현실에 사용되는 방식은 매우 구체적이다. 예를 들어 국가보안법이라고 하면 어떤가. 이게 못마땅하면 국가보훈처나 국가장학금이라는 용법도 있다. 물론 현실이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국가 브랜드라는 말도 쓰이고, 최근에는 국가개조라는 말도 등장했다. 국가장학금과 국가 개조, 양쪽의 국가는 아무래도 느낌이 좀 다르다. 어찌되었든 일상의 국가 경험은 훨씬 더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과정을 거쳐 추상적인 개념과 이해가 만들어지긴 하지만, 그것은 현실과 분리될 수 없다. 국가는 추상적 이론이면서 동시에 구체적 행위자다. 예를 들어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의 폭력성을 경험한 사람이면 국가 폭력이란 말을 쉽게 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되풀이되면 폭력 국가라는 말이 실체를 얻게 된다. 보통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국가는 늘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이처럼 국가의 이론과 현실 경험을 되새기는 이유가 있다. 최근 우리 사회가 국가와 관련된 집단적 경험을 하고 있어서다. 바로 세월호 참사와 의료 영리화 정책이다. 다양한 성찰의 과제를 제기했고 아직도 진행형이나, 한 가지 핵심 질문을 돌아가기 어렵다. 우리에게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   세월호 참사는 두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거의 모든 국가 기관과 조직의 부실과 무능력이 100일이 넘게 낱낱이 생중계되고 있다. 꼭

서리풀 논평

사병들의 건강권

  본래 군(軍)과 건강은 관련이 깊다. 우리의 보건복지부에 해당하는 일본 후생성(현재는 후생노동성이다)이 육군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군대와 건강의 관련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1938년 일본 육군은 건강한 장병을 육성해야 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건민건병정책(健民健兵政策)’을 시작했고 이를 위해 새로 후생성을 만들었다. 제국주의 국가가 국민의 건강과 위생을 강조한 이유를 이만큼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예도 드물다. 군대가 장병의 건강에 무심할 수 없는 것은 전쟁 때에 더하다. 그들의 건강은 전투력과 직결되고,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역사적으로도 수많은 전쟁이 장병의 건강과 질병에 따라 결과가 바뀌었다.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으로 유명해진 고엽제 피해나 이라크와 아프칸 전쟁에 참여했던 군인들이 겪는다는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는 누구나 아는 증거들이다.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의 군대가 발진티푸스와 참호열로 수많은 군인을 잃은 것도 유명하다.   지금 여러 나라의 군대와 전쟁에서 건강 문제를 이끌어내는 사정이 자못 착잡하다. 6월 21일 동부전선에서 일어난 총기 사고 이야기를 해야 해서다. 세월호 참사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여전히 많은 젊은이의 꽃다운 목숨이 하릴없이 스러졌다. 지금 다들 대책과 앞으로의 과제를 말한다. 문제의 심각성이나 구조를 볼 때 정치적, 사회적 측면을 포함하여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상세한 진단과 분석은 이 논평이 다룰 범위를 넘는다. 다만 한 가지, 원인과 처방을 개인과 예외에서 찾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든 이번 총기 사건이든, 몇몇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행동으로 치부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정확하지 않을 뿐

서리풀 논평

누구를 뽑을 것인가

  다음 주면 지방자치 단체장과 의원을 새로 뽑는다. 전과 달리 이번 주 금요일30일)과 토요일(31일)에 사전 투표도 할 수 있다고 한다. 덕분에 투표 참여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1991년에 처음으로 지방선거가 있었으니 본격적인 지방자치가 시작된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성년이 되었으니 자리를 잡을 법도 하건만 평가는 여전히 박하다. 오죽했으면 기초자치체의 정당 공천 문제가 불거졌을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굳이 말하자면 자치가 ‘짝퉁’ 신세여서다. 한국의 지방자치를 흔히 ‘반쪽’ 또는 ‘2할 자치’라고도 부른다. 특히 ‘2할 자치’라는 말은 이웃 나라 일본에서 쓰는 말을 그대로 가져왔다. 일본의 ‘3할 자치’는 과거 지방자치의 불완전성을 상징하는 용어로 유명하다. 2할이니 3할이니 하는 이유는 누구나 짐작하는 그대로다. 재정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70퍼센트나 80퍼센트를 중앙정부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재정이 이 지경인데 업무라고 다를 까닭이 없다. 감투만 늘려 놓은 채 그냥 말잔치로 그칠 수밖에. 그러나 지방 재정 문제는 이 정도로 해둔다. 워낙 해묵은 논란인데다 중앙과 지방정부의 이해가 엇갈려 풀기가 쉽지 않다. 꼭 선거가 아니라도 두고두고 논의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는 점만 확인해 놓자.   지방자치에 심드렁한 또 다른 이유는 ‘효과’를 확신하지 못해서다. 20년 넘게 계속해 온 이 제도가 과연 지역 주민의 삶을 더 좋게 만들었는가? 어떤 면에서도 후한 평가를 하기 어렵다. 지역 토호만 살찌운다는 비판이 내내 매서웠다. 이렇게 된 이유 또한 한두 가지로 줄이기는 어렵겠지만, 선거가 코앞이니 관계된 것 한 가지만

서리풀 논평

돌봄 노동자의 의무와 권리

  지난 석 달 사이 사회복지 공무원이 세 명이나 아까운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자세한 개인적 사정이나 상황을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일하는 환경과 노동이 사고를 일으킨 한 가지 조건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떤 사회복지사는 자정을 넘겨 퇴근해야 할 정도로 격무에 시달렸다. 스트레스와 정신적 고통, 신체적 고단함이 컸다는 것이 언론의 취재결과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자살은 당연히 ‘직업병’이다.   자연스레 사회복지 공무원의 고단함이 드러났다. 한국의 사회복지 공무원이 담당하는 인원은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평균의 세 배나 된다. 이제라도 사회복지 공무원 수를 늘리는 것은 응당 해야 할 일이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기본을 갖추어야 그 다음을 말할 수 있다. 지나친 노동시간과 가혹한 근로조건 속에서 복지 서비스의 질을 찾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력을 늘려야 한다는 당위는 단지 일부일 뿐이다. 행정이나 관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나마 미봉책에 그친다. 인력의 적정성에 매몰되면 논쟁은 흔히 투입과 산출의 효율성을 두고 다툰다. 끝없이 더 나은 관리 방법을 찾는 ‘기술 숭배’가 당연하다.   사실, 사회복지 공무원들의 아픈 현실은 모든 돌봄 노동이 겪는 문제와 그리 다르지 않다. 좀 더 범위를 넓히면 사회적, 공적 가치를 만들어 내는 일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많은 노동이 비슷하다.   이런 노동은 대개 생산과 소비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일어난다. 사람들이 직접 접촉하고 상호작용이 생기며 정서적 교류와 반응이 뒤따른다. 그래서 ‘휴먼’

서리풀 논평

보건의료정책에 더 많은 민주주의를

1985년 미국 오레곤 주는 메디케이드(저소득층을 위한 의료지원 프로그램으로 한국의 의료급여와 비슷하다)가 재정위기에 빠지자 장기이식을 급여 항목에서 제외했다. 이 조치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일곱 살 먹은 백혈병 환자가 한국 돈으로 1억 원이 넘는 수술비용을 마련하려고 모금운동을 하는 중 사망하자 논란은 더욱 커졌다. 주정부가 쓸 수 있는 재정은 한도가 있는데 어떤 병을 가진 사람이 우선 대상자가 되어야 하는지가 논란의 핵심이었다. 비싸지만 극소수의 환자는 확실하게 낫게 할 수 있는 의료 서비스인가, 싸고 흔하지만 여러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서비스가 우선인가. 이런 논란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예컨대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올리자는 데는 이론이 없지만, 노인 틀니가 먼저인지 새로 나온 초고가의 항암제가 우선인지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다. 오레곤 주는 이런 논란을 해결하기 위해 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길을 택했다. 주 의회의 상원의장이던 존 키츠해버(Kitzhaber)는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을 제안한다. 미리 기준을 정해놓고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순서대로 진료항목을 명시적으로 정해놓자는 것이었다 (입법화). 당시까지 이런 방법은 전례가 없는 획기적인 것이었고, 그 때문에 여러 찬반 의견과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현재까지도 의의와 한계를 두고 연구와 평가가 계속되고 있다. 보건정책 분야에서는 이른바 “오레곤 실험(Oregon Experiment)”이라 불린다. 오레곤 실험이 법으로 만들어지고 실제 적용되는 길은 매우 멀고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정책이 만들어지는 기술적이고 실무적인 과정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이 과정에서 보통의 시민들이 가진 시각과 판단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대중들은